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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5화 (5/199)

5

요정을 싫어한다는 말이 단순한 농담 같지 않아서 베로니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엔디미온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까의 전투로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녀의 생사는 이 무뚝뚝한 남자의 손에 달려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을 넘었다. 베로니카는 요정답게 몸이 날래고 체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엔디미온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숨 한 번 헐떡이지 않고 걸었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오르막길을 잰걸음으로 가면서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그건 베로니카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휴식도 하지 못하고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다. 점차 숨이 가빠지고 목이 말랐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내리막길이 나오지만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참다못한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맹랑하게 지껄였다.

“저기 혹시 사람이 아니라 악귀신지······.”

“무슨 헛소리야?”

“아니, 이상하잖아요? 사람이 아무리 체력이 뛰어나도 이런 식으로 휴식도 없이 쭉 걸어갈 수는 없거든요? 딱 잘라 말해서 당신은 가능할지 몰라도 난 안 된단 말이에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쉬자고 말을 했어야지.”

“······지금이라도 했으니까 좀 쉬면 안 될까요?”

베로니카는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엔디미온은 잠깐 고민했다. 그는 강철 같은 체력을 가졌지만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휴식하자고 말했다. 베로니카가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기뻐했다.

“그런데 쉴 때도 이러고 있어야 해요?”

베로니카가 등 뒤로 내민 손을 흔들었다. 엔디미온이 잡고 있는 끈이 흔들렸다. 끈은 몹시 질기고 단단해서 베로니카의 힘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아는 그녀는 일찌감치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다. 그냥 얌전히 할리아까지 안내만 할 생각인데 이것 좀 풀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베로니카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시렁댔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엔디미온이 말했다.

“내가 왜 너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줄 알아?”

“어, 저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서?”

“물건이 깨끗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으니까.”

엔디미온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술만이 움직였다.

“난 너의 팔을 부러트리고 다리를 분질렀을 수도 있어. 눈과 입만 있다면 길안내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그걸 감사하게 생각해. 쓸데없는 불만만 생각하지 말고.”

“······협박하시는 건가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리고 네 처지를 상기시켜주는 거고.”

베로니카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는 엔디미온과 입씨름을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입을 꾹 다물고 부루퉁한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는데 엔디미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선한 바람과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밀려오는 졸음과 싸우고 있던 베로니카가 깜짝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히끅히끅 소리를 내는 그녀를 잠깐 쳐다보던 엔디미온이 말했다.

“충분히 쉬었지? 가자. 난 바쁜 몸이야.”

“히끅, 지금 간다고요?”

“그럼 언제 가려고?”

“하지만 방금 쉬기 시작했잖, 히끅, 요!”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그리고 내가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지 마. 나는 바빠. 그것도 아주.”

베로니카는 히끅히끅 소리를 내면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먼저 걸어가면 엔디미온이 끈을 잡은 채로 뒤를 따랐다. 그들은 빠르게 산을 넘었고 이제는 너른 들 위를 걷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서 흔들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베로니카가 콧노래를 불렀다. 썩 잘 부르는 것은 아니지만 고운 목소리 덕분에 들어줄 만은 했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것을 그냥 두었다. 할리아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묻자 그녀는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도착할 거라고 대답했다. 두세 시간 내에 도착한다는 소리였다. 만일 엔디미온 혼자였다면 더 빨리 걸었을 것이고 할리아까지 한 시간이면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없으면 길을 모르니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심심하군.”

베로니카는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서 엔디미온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사람을 죽일 때와 길을 걸을 때의 얼굴이 똑같았다.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초연함이 때때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분명히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심심하다니? 저 바위 같은 남자가? 에이, 설마.

“내 말 무시하나? 심심하다고.”

그런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분명하게 심심하다고 말했다. 베로니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뒤로 돌아섰다. 돌아설 때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아, 심심하시구나. 그럼 혹시 제가 재롱이라도 부려야 하나요? 춤추고 노래하고? 지금 여기서?”

“그딴 걸 누가 봐? 그냥 이야기나 좀 하자.”

베로니카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면 제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야 되겠군요? 그쪽은 입담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그녀는 말을 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함께 다닌 이 남자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통성명을 하자고 했을 때 자기 혼자만 이름을 말하고 엔디미온은 말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혹시 성함이······?”

“엔디미온.”

그는 생각보다 선선히 대답했다.

“너, 할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번스타인이라는 자는 누구지?”

베로니카는 버릇처럼 눈알을 한 번 굴린 후에 답했다.

“번스타인은 어, 그러니까, 나쁜 놈들의 우두머리라고 설명할 수 있겠군요. 그 왜 있잖아요, 할 일 없는 왈짜들 몰고 다니면서 사람들 괴롭히고 보호세 명목으로 돈 빼앗고 그런 거.”

그런 거라면 엔디미온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백 년이나 지났는데 사람 살아가는 것은 아직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더 설명해 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였다.

“번스타인은 강철 주먹이란 조직의 대장이에요. 나쁜 놈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사람이지요. 어, 그런데 그 사람이 좀······. 요정성애자라고 할까요? 요정이라면 아주 환장을 하는 사람인데 문제는 그 사람이 저에게 반해버렸다는 거지요.”

“반했다고?”

“엄밀히 말해서 진짜 문제는 저의 아름다움이겠군요. 아, 저는 참 죄 많은 요정이에요.”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뒤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흘겼다.

“지금 절 바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럼 멍청이라고 생각했나요?”

“번스타인이랑 그런 사이라면 더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 말은 재잘거리는 베로니카의 입을 다물게 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는군. 번스타인이 너한테 반했다고 하자. 그런데 너는 왜 할리아에서 도망쳤고 번스타인은 왜 추격자를 보내서 널 죽이려고 하는 거지?”

“그게 사실은요······. 그 사람의 제안을 제가 거절했거든요.”

“제안을 거절했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나? 대체 무슨 제안을 했는데?”

“그래요. 이 상황에서 숨길 게 뭐가 있겠어요? 저는 보시는 것처럼 마법사랍니다. 그래서 때때로 마법 실험을 위해서 희귀한 물건을 구하러 다녀요.”

“마법사라고?”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의 어디를 보면 마법사란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의 얼굴을 본 베로니카가 입을 씰룩였다.

“아니, 딱 보기에도 마법사잖아요?”

어딜 봐서? 고깔모자라도 좀 쓰고 다니던지. 엔디미온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베로니카의 등을 손으로 밀면서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마법사라면 마법으로 다른 도시로 도망치면 되잖아. 그러면 번스타인의 추격자들에게 쫓길 일도 없었을 거고.”

“지금 저 놀리시는 건가요?”

“아닌데.”

“제가 다른 도시까지 한 번에 마법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실력의 마법사였다면 그깟 추격자들을 두려워했을 리가 없잖아요!”

베로니카가 빽 소리를 지르자 엔디미온이 움찔했다. 목청이 참 큰 요정이었다.

“요즘 마법사들은 그런 마법은 못 쓰나? 나 때는 마법사들이 당최 걸어 다니지 않아서 문제였는데. 그래서 다들 운동 부족이었거든.”

“저기요, 당신이 말하는 그때는 대체 언제인가요?”

“백 년 전.”

베로니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당신이 백 년을 넘게 살았다고요? 그 얼굴로?”

내 얼굴이 어때서. 엔디미온이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는 다시 번스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번스타인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 그게요, 제가 마법 실험 때문에 희귀한 물건을 구하러 다닐 때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할리아에서 그런 물건을 취급하는 유일한 가게가 번스타인이 관리하는 구역에 있거든요. 여기서부터는 사정이 좀 긴데 전부 말할까요?”

“간단하게.”

“이러쿵저러쿵해서 번스타인의 부하와 시비가 붙었고 그 사람이 다쳤어요. 번스타인은 당연히 화가 났고 절 잡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제가 요정이란 걸 알고 자신의 첩이 되면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전 거절했고 그 다음은 아시겠지요?”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 거 없는 이야기였군. 난 또 엄청 큰 사고라도 쳤다고.”

“······강철 주먹의 번스타인과 척을 졌는데 그게 엄청 큰 사고가 아니라고요?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막 말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맞아. 내 일이 아니잖아.”

“······짜증나.”

그 이야기를 끝으로 엔디미온과 베로니카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로 길을 걸었다. 해가 점차 저물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새빨간 노을을 보면서 오두막을 떠올렸다. 본래라면 오두막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여기는 오두막이 아니었고 낯선 길 위였다. 그는 첫 번째 의무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된 것이다. 기쁨은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 드디어 할리아에 도착했어요!”

갑자기 베로니카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엔디미온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았다. 커다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주 컸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저게 할리아라고? 옛날에는 그냥 작은 마을이었는데.”

백 년 만에 마주한 할리아는 엔디미온의 기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본래 작은 마을이었던 할리아는 이제 커다란 도시로 변해 있었다. 단단한 성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고 그 위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첨탑에는 할리아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멍하니 성문을 쳐다보았다. 문루 위의 병사가 촌뜨기라도 본 것처럼 킬킬거렸다.

엔디미온은 자신이 이 세상에 융화될 수 없는 떠돌이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이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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