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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6화 (6/199)

6

“시간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이야.”

엔디미온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에 잡은 줄을 흔들었다. 그것은 얼른 가자는 신호였다. 베로니카는 마치 자신이 개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엔디미온이 주먹 하나만으로 여섯 명을 처치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들이 얼마나 참혹한 꼴을 당했는지 잘 알기에 함부로 그에게 대들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번스타인에게 죽거나 이 남자에게 죽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번스타인보다는 엔디미온이 좀 더 말이 통할 것 같기에 비위를 맞춰주며 자비를 구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녀는 요정답게 빼어난 용모가 자랑거리였고 그것을 활용하기로 했다. 눈을 내리깔며 은근하게 웃으면 그 미소에 빠져들지 않는 남자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어서 걸어.”

엔디미온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줄을 흔들었다. 베로니카가 쳇 하고 혀를 차며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껄였다.

“혹시 요정혐오자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제 웃음에 반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난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해. 그리고 요정도 싫어하고. 그런데 너는 말이 많은 요정이지. 대답이 됐나?”

“그럼 어떤 사람이 이상형인데요?”

별 생각도 없이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답지 않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성녀.”

“요즘 세상에 성녀가 어디 있어요? 마지막 성녀가 백 년 전에 대악마 다르디낭에게 죽은 이후로 이제는 한 명도 안 태어나는데.”

“성녀가 없다고? 그럼 기름부음은 누가 하지?”

백 년 전에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성녀가 신을 대신해 축복하며 그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온누리에 널리 알렸다. 그것이 곧 왕의 적법함과 정통성을 알리는 일이었기에 기름부음 받지 못한 자는 진정한 왕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기름 아깝게 왜 붓는데요?”

“······흠, 그래.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군.”

엔디미온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들은 금세 성문에 도착했다. 경비병이 일단 그들을 제지했다. 얼굴이 후덕하고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남자였는데 베로니카의 얼굴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베로니카, 도망친 거 아니었어? 번스타인이 널 찾고 있어. 왜 돌아온 거야?”

베로니카는 경비병과 아는 사이인 듯 했다. 그녀는 덩치에 맞지 않게 호들갑을 떠는 경비병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진정해, 알디. 도망치려고 했는데 일이 좀 꼬여서 다시 돌아온 거야. 난 괜찮아. 그것보다 좀 지나가도 될까?”

“아, 물론이지. 잠깐만. 그런데 이 덩치 큰 형씨는 누구쇼?”

경비병 알디가 엔디미온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참 호들갑을 잘 떠는 남자였다. 엔디미온은 그의 콧수염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량한 여행객이오.”

“선량한 여행객이라고?”

알디는 엔디미온을 한 번 보고 베로니카를 한 번 보았다가 둘 사이에 있는 끈을 보았다. 누가 보아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마치 죄인을 잡아가는 듯한 모습이라서 알디는 의구심을 거두지 못했다. 설마 번스타인이 보낸 추격자가 이 남자일까? 그런 것치고 함께 있는 베로니카의 태도가 참 당당했다. 알디는 베로니카에게 손짓을 한 뒤에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 사람 뭐야? 번스타인으로부터 몸을 지키려고 고용한 용병 같은 거야? 그런데 너는 꼴이 왜 그래?”

“날 지켜주긴 했지. 그것 때문에 이 꼴이 됐지만. 그리고 선량한 여행객 맞아. 맨손으로 사람 여섯 명을 때려죽이는 것만 빼면.”

알디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엔디미온의 민감한 청각은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겠소?”

경비병은 고민했다. 베로니카가 한 마디 했다.

“나쁜 사람 아니니까 일단 들여보내줄래? 나 믿지, 알디?”

알디는 결국 엔디미온과 베로니카를 통과시켜주었다. 그는 베로니카에게 몸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성 안으로 들어온 엔디미온은 완전히 달라진 할리아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 작은 마을이 이만큼이나 변한 것을 보고서 정말 백 년이란 시간이 길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베로니카가 겁도 없이 엔디미온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전 이 도시에 대해서 빠삭하답니다! 말만 하세요!”

“그럼 번스타인이 있는 곳.”

활달하게 떠들던 베로니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거길 바로 간다고요? 식사는 안 하세요? 도시 구경은요? 여관에 방이라도 먼저 잡는 건 어떨까요? 여기까지 오느라 제법 걸었는데 좀 쉬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쉬어야지. 해야 하는 일부터 끝내고 나서.”

엔디미온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는 얼른 번스타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는 듯이 턱을 까닥였고 베로니카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을 걷다가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햇볕이 들지 않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이 남의 돈이나 뺏으며 사는 더러운 놈들이 살기 딱 알맞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베로니카는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헤매지 않고 거침없이 통과했다. 골목길이 끝나자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이 있었다. 이런 곳에 저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엔디미온은 저택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남자 두 명을 보며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여기가 번스타인이 사는 집이냐?”

“번스타인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강철 주먹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잘 찾아왔군.”

엔디미온은 끈을 잡아당기며 베로니카보다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베로니카는 식은땀이 줄줄 흘렸다.

“너 누구야?”

저택 입구를 지키는 남자 중 한 명이 엔디미온의 접근을 제지했다. 엔디미온은 간단히 대답했다.

“혹시 번스타인 안에 있소?”

“이게 번스타인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네. 너 뭐하는 놈이냐고?”

“거래를 하러 왔소. 번스타인이 찾는 여자를 잡아왔으니 거래하자고 전하시오.”

엔디미온이 줄을 당겨서 남자에게 베로니카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깜짝 놀라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베로니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엔디미온을 잘 구슬려 볼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다 틀렸다. 다 끝난 것이다.

저택 안에서 남자가 나와서 말했다.

“번스타인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신다. 혹시 무기를 가지고 왔나? 몸수색을 하도록 하지.”

엔디미온은 허리춤에 있는 검을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가 몸수색을 했지만 다른 무기는 찾지 못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고 말했다. 남자 두 명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베로니카를 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베로니카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저택 안에는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많았다. 엔디미온이 그것을 감상하고 있으니 집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서 길을 안내했다. 베로니카는 힘없이 줄줄 끌려가면서 묻지도 않은 것을 말했다.

“······번스타인은 좀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저런 그림이나 조각상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요. 아름다움에 대해서 탐미하는 것이 즐겁다나? 요정성애자인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안 물어봤어.”

“저도 알아요. 그런데 긴장 때문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네요.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서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엔디미온은 무시했다. 그들은 집사의 안내를 따라서 커다란 문을 가진 방에 도착했다. 집사가 문을 열어주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응접실 안에는 열 명 정도 되는 남자들과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번스타인인 듯 했다.

“당신이 번스타인이오?”

중년 남성이 탁자 위의 상자에서 갈색 막대기 같은 것을 집었다. 그리고 끝을 칼로 자르고 입에 물었다. 입으로 물지 않은 쪽에 불을 붙인 뒤에 한껏 빨았다가 희끗한 연기를 뱉었다. 엔디미온이 베로니카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저게 뭐야?”

“뭐기는요? 시가잖아요. 시가 몰라요?”

“나 때는 없었어.”

중년 남성은 충분히 시가의 맛을 즐긴 후에 말했다.

“그래, 내가 번스타인이다. 강철 주먹의 번스타인이라고도 불리지.”

“옛날에 내 친구 중에서도 강철 주먹을 가진 자가 있었소.”

“하하, 그 자도 주먹이 아주 단단했나 보군?”

“아니, 주먹이 진짜 강철이었소. 난쟁이들이 만들어 주었지.”

번스타인은 잠깐 침묵했다. 농담을 하는 것 치고는 엔디미온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그는 시가를 한 모금 더 빨았다가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재밌는 친구로군. 베로니카를 데리고 왔다고? 어디 우리 요정 아가씨의 얼굴이나 한 번 볼까.”

번스타인의 시선이 베로니카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 추접해서 소름이 돋았다.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해도 숨을 곳은 없었다. 마치 뱀에게 붙잡힌 개구리의 기분 같았다. 두렵고 불쾌했다.

“정말 베로니카로군. 나와 거래를 하겠다고 하던데 무엇을 바라나? 돈인가? 아니면 다른 것?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마법과 관련된 물건들을 거래하는 가게를 소유하고 있어. 혹시라도 희귀한 물건들을 바란다면 그걸 줄 수도 있지.”

엔디미온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돈으로 주시오. 내가 얼마나 받을 수 있겠소?”

“돈이 급했던 모양이군. 그러면 돈으로 주지. 금화 열 개는 어떤가?”

금화 열 개면 사람 하나 잡아오는 일의 대가로 받기에는 많은 돈이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고 번스타인이 곁에 있던 부하에게 주머니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는 주머니의 주둥이를 열어서 금화 열 개를 꺼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나열했다.

“자, 금화 열 개다. 가져가라.”

엔디미온은 줄을 잡아당겨서 베로니카를 번스타인 근처로 끌고 갔다. 그리고 줄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돌아서면서 탁자 위의 금화 열 개를 챙겼다. 뒤로 돌 때 베로니카의 떨리는 눈을 보았지만 무시했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한때는 그랬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는데 갑자기 번스타인이 멈추라고 말했다. 그는 손으로 베로니카의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혹시 내가 보낸 추격자들을 만나지는 않았나? 그들이 통 연락이 없어서 말이야.”

엔디미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만났소.”

“오, 그래? 그들은 어찌 됐지?”

“다 죽었소.”

“저런. 산에서 곰이라도 만난 모양이군.”

엔디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손잡이를 잡았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덜컹덜컹 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났다. 그는 손잡이를 부술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서 번스타인을 쳐다보았다.

번스타인은 겁을 먹고 목을 잔뜩 움츠린 베로니카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씨발, 좀 역겹네. 엔디미온은 무심하게 생각했다.

“할리아는 처음인 것 같으니 한 가지 가르쳐주지, 덩치 큰 친구.”

번스타인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철 주먹은 거래 따위 안 해. 오직 빼앗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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