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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이런 상황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는 성배의 힘을 빌려 대악마를 죽인 영웅들 중 하나였고 비록 지금은 성배의 힘 중 일부만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이깟 왈짜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움직여서 의기양양하게 시가 연기를 뻑뻑 뿜고 있는 번스타인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것은 엔디미온뿐만 아니라 그도 마찬가지였다. 천지 구분 못하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엔디미온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른이라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
번스타인은 손을 까딱여서 부하들을 움직였다. 열 명의 남자들이 슬금슬금 엔디미온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맨손이었지만 숫자가 숫자인 만큼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번스타인은 부하들이 엔디미온을 상대하는 사이에 베로니카의 아름다움을 탐미할 생각이었다. 나의 꽃, 나의 요정. 그가 혀를 날름거리며 베로니카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였다.
엔디미온이 탁자를 향해 달려가면서 말했다.
“자신 있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자신 말이야.”
엔디미온은 탁자를 번쩍 들어올렸다. 무거운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는 들 수 없었다. 못해도 두 사람은 달라붙어야 하는 무게인데 그는 두 손으로 탁자를 들어서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남자 세 명을 향해 휘둘렀다. 세 명의 남자는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엔디미온은 정면에서 달려오는 남자의 머리를 향해서 탁자를 내려찍었다. 어찌나 세게 내려찍었는지 남자의 머리가 탁자를 부수고 튀어나왔다. 그는 목이 부러져서 일격에 죽었다.
다른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은 아까의 충격으로 부러진 탁자의 다리를 하나씩 손에 들고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남자 한 명씩 나가떨어졌다. 그에게 무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몸 자체가 무기였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 모두 흉기였다. 휘두르는 힘을 이기지 못한 탁자 다리들이 박살나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남은 적은 다섯 명이었고 엔디미온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는 적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빠르게 달려가서 발차기를 날렸다. 다리가 마치 채찍처럼 움직였다. 발차기에 맞은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사이에 남자 한 명이 뒤에서 기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두른 주먹에 맞고 기절했다.
남은 것은 셋. 엔디미온은 거침없이 움직이며 적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그 사이에 몇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간지러울 뿐이었다. 매섭게 뻗은 손이 마지막 남자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날아온 따귀가 그의 입에서 몇 개의 이를 뱉어내게 했다. 그는 옹알이를 하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엔디미온은 눈물까지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 그냥 살려주었다. 주인 잘못 만난 게 죄라면 죄지. 퉁퉁 부은 얼굴로 울고 있는 남자에게 턱짓을 했다. 얼른 꺼지라는 의미였다. 그가 얼른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열쇠로 문을 열고 달아났다.
이제 남은 것은 번스타인 하나뿐이었다. 그는 베로니카를 만지던 것을 그만두고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이제야 겁이 좀 나는가 보지. 엔디미온이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본 번스타인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싸우는군.”
“부하들은 다 기절하거나 죽었다. 도망친 놈도 있고. 이제 어쩔 거냐? 강철 주먹이 직접 나설 건가?”
“잘난 척 하는 것도 거기까지다. 난 말이야, 적이 아주 많아. 잘난 사람은 늘 시기를 받거든. 그래서 내 신변을 보호할 비책을 마련해야 한단 소리야.”
“강철 주먹이라며? 그냥 자기가 싸우면 되잖아.”
“닥쳐! 나보고 싸움을 하라고? 그건 아름답지 않은 일이야!”
무슨 개소리야. 엔디미온은 그냥 번스타인을 때려눕히고 돈만 챙겨서 나가려고 했다. 천천히 걸어가는데 번스타인이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 불었다. 새된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는 여러 번 호각을 분 뒤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엔디미온은 웃으며 말했다.
“엄마라도 부르는 거냐? 구해달라고?”
“흥! 잘난 척 하는 것도 거기까지다. 아까 말했지? 나는 날 보호할 비책을 가지고 있다고.”
엔디미온은 잠자코 기다렸다. 무슨 수가 있는 모양인데 한 번 봐주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민감한 감각이 누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단순히 몸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가벼운 발걸음을 얻은 사람이었다. 요정들이 주로 배우는 걸음이었다. 그럼 요정인가? 하지만 아니었다. 요정들의 몸에서 나는 풋내가 나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엔디미온은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도망친 남자는 참 정중하게도 문을 다시 닫고 도망갔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누가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문 근처에서 멈추었다. 잠시 뒤면 번스타인이 준비한 비장의 수가 문을 열고 나타날 것이다. 엔디미온은 기대감을 느끼며 얌전히 기다렸다.
그 순간 그는 천둥의 소리를 들었다. 귀를 얼얼하게 만드는 굉음이 나더니 문이 대각선으로 잘려서 방 안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검을 든 노인이 절반만 남은 문을 넘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가 희게 셌고 산발이었다.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라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많았지만 허리는 꼿꼿했다. 덩치는 청년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 건장했다. 키는 보통이었고 손에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가장 큰 특징은 얼굴에 두르고 있는 검은색 천이었다. 그건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움직임부터가 그랬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발걸음은 가벼웠고 몸이 빨랐다. 상당한 실력의 강자였다. 어째서 번스타인이 당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노인은 검을 지팡이처럼 사용해서 방 안을 걸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오직 번스타인만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군! 너도 딱 보면 알겠지! 이 자는 내 경호원이다!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라이오넬?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엔디미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오넬은 노인답지 않게 큰 성량을 자랑하며 외쳤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엔디미온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라이오넬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번스타인이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라이오넬 씨? 거긴 벽이야. 적은 저기에 있다고!”
“아, 그래요? 허허, 제가 요즘 눈이 침침해서.”
라이오넬이 머쓱하게 웃으며 방향을 다시 잡았다.
“그럼 여기인가요?”
“아니, 조금 더 왼쪽으로. 어, 너무 갔는데.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아, 거기야! 바로 거기!”
엔디미온은 둘이서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광대를 데려온 거냐? 재밌기는 한데 그래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나?”
“웃을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번스타인이 이를 갈았다. 이제 제대로 방향을 잡은 라이오넬은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아까 말했잖아.”
“내가 자기소개를 했나? 언제 했지?”
라이오넬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멋쩍은 듯이 입으로 쩝 소리를 내다가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검을 든 자세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엔디미온은 저 자세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상대는 검을 들었고 엔디미온은 맨손이었다. 라이오넬은 상당한 강자였고 그런 자를 맨손으로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엔디미온이라도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기를 압수당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라이오넬은 검을 든 손을 바닥을 향해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왼발을 내밀고 오른발을 뒤로 뻗고 있었다. 왼쪽 다리는 약간 구부린 채였고 오른쪽 다리는 쭉 뻗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자세였다. 엔디미온은 그 자세를 보고서 기시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베로니카는 자꾸 치근덕대는 번스타인을 손으로 밀어냈다. 에라, 모르겠다. 이대로 엔디미온이 이겨서 이 짜증나는 번스타인을 죽이면 나는 자유잖아? 그녀는 정말 간절하게 엔디미온의 승리를 기원했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벌써 세 번째 같은 소리를 하면서 라이오넬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구부리고 있던 왼쪽 다리로 바닥을 힘차게 박찼고 그 다음에 쭉 뻗고 있던 오른쪽 다리를 당겨오면서 빠르게 바닥을 한 번 박찼다. 단 두 번의 발걸음만으로 엄청 빠르게 거리를 좁힌 그가 아래를 향하고 있던 검을 위로 당기며 휘둘렀다.
강력한 베기 공격을 하려면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의 공격은 불리한 자세에서 하면서도 아주 빠르고 강력했다. 엔디미온은 번개처럼 거리를 좁힌 뒤 날아오는 공격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에 주먹을 들어서 검을 향해 내질렀다. 검과 주먹이 부딪혀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아까 라이오넬이 문을 자를 때 어째서 천둥치는 소리가 났는지 알았다. 그건 검이 공기를 가를 때 나는 소리였다. 그만큼 검이 재빨랐다. 과연 천둥검이라고 자칭할 만했다.
그는 검을 막아낸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제법 많은 양의 피였다. 생채기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그에게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웃었다. 새끼, 좀 하네.
라이오넬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빠르게 검을 뒤로 당겨서 다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 역시나 빨랐다. 그의 검은 어지럽게 움직이면서 엔디미온의 몸을 노렸다. 엔디미온 역시 빠르게 움직이면서 기회를 노렸다. 두 사람의 공방은 번스타인이나 베로니카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들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가끔씩 검이 번쩍이는 것과 공기를 가르는 소리뿐이었다.
라이오넬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뒤로 한 번 뺐다. 그리고 왼발로 전진하면서 검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엔디미온은 넘어지듯 몸을 숙인 다음에 왼손과 왼발로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오른발을 들어서 라이오넬의 다리를 세게 찼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리가 부러졌어야 하지만 그는 약간의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엔디미온은 얼른 몸을 일으켜 라이오넬의 배를 후려찼다.
노인의 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벽에 부딪힌 라이오넬이 피 한 움큼을 뱉어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침과 함께 피를 뱉어내며 씩 웃었다.
“젊은 친구가 좀 하는군.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엔디미온은 확신했다. 이 노인은 노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