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8화 (8/199)

8

“사람을 쓰려면 정신 멀쩡한 사람을 써야지.”

엔디미온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적과의 거리를 쟀다. 라이오넬이 다시 처음의 공격 자세를 잡았다. 그의 검은 본래 빨랐지만 저런 식으로 자세를 잡았을 때가 가장 빨랐다. 그리고 천둥 같은 소리가 나는 것도 저런 자세를 취할 때뿐이었다. 그는 아까 전에 소리를 지른 것은 까먹은 듯이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외쳤다. 이름을 말해주지 않으면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 같아서 엔디미온은 얼른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엔디미온이다. 선량한 여행객이지.”

“엔디미온?”

라이오넬이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그 이름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 행동이 엔디미온의 기시감을 건드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노인은 기억에 없었다. 그가 아는 사람 중에 노망이 난 장님 노인은 없는 것이다.

“엔디미온인가.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엔디미온은 이제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을 조용히 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남을 조용히 시키려면 주먹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단점은 잘못하면 상대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을 상대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는 노인답지 않게 건장했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힘껏 때리더라도 그는 벙어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흐음,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라이오넬은 여전히 엔디미온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몸은 힘껏 당겨진 끈과 같았다. 누가 손을 대면 끈이 끊어지면서 번개 같은 공격이 상대를 잡아먹을 것이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전진했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서 발바닥으로 라이오넬의 몸을 밀어서 찼다.

별 것 없는 동작이었지만 라이오넬은 반응하지 못했다. 언제든지 검을 휘두를 수 있게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근육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성배의 힘을 다루는 기사는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나, 이 노망난 영감아.”

라이오넬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한 손을 뻗어서 바닥을 누른 뒤에 손목의 힘을 이용해서 공중으로 날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 바닥에 착지했다. 인간답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수련한 요정들도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엔디미온은 작게 웃었다. 백 년 뒤의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싸울 만한 상대였다. 그는 이제 멈추지 않았다. 힘껏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다. 라이오넬의 검은 빗나갔고 대신에 엔디미온의 주먹이 그의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스쳐지나가는 주먹에 살짝 부딪혔을 뿐인데 살갗이 벗겨졌다.

라이오넬은 당황하지 않았다. 노망이 났지만 싸울 때만은 그 누구보다 진지한 한 명의 검사였다. 그는 날아오는 발차기를 허리를 숙여서 피한 뒤에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가며 검을 내질렀다. 엔디미온은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서 검을 피했다. 그리고 왼발을 축으로 삼아서 오른쪽 다리로 발차기를 날렸다. 아직 검을 뒤로 회수하지 못한 라이오넬은 발차기에 맞고 뒤로 날아갔다.

가구에 부딪혀서 커다란 소리가 났지만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었다. 아주 빨랐다. 그의 검술은 간단했다. 베고 찌르고 막는 것뿐이었다. 그의 검술에는 오직 직선만이 있었고 다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강력했다. 재능이 없어서 다른 것을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것만 있으면 충분했을 뿐이었다. 가장 간단한 것을 단련하고 또 단련해서 아무도 쫓아올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검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사나웠다. 엔디미온이 입고 있는 옷들이 점점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칼바람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이오넬은 매서운 공격을 한 번 끝내고 나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호흡을 정리했다.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이라면 격한 움직임에 체력을 소모하는 법이었다. 그는 노인인 만큼 호흡이 더 모자란 모양이었다.

숨을 한 번 크게 삼킨 그가 다시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엔디미온은 이러다가 위험해지겠다고 생각했다. 라이오넬의 검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얼른 몸을 돌려서 공격을 피한 다음에 바닥에 떨어진 탁자를 다시 집었다. 그리고 라이오넬을 향해서 휘두르자 금세 반토막이 나고 말았다. 그는 두 손에 탁자 다리 하나씩을 잡고서 휘둘렀다. 그러나 검에 의해 잘려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애초에 저깟 탁자 다리 가지고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탁자 다리는 그냥 시간 끌기였을 뿐이다. 엔디미온은 탁자 다리를 휘두르면서 라이오넬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탁자 다리 하나를 휘두를 때 한 걸음씩, 그런 식으로 두 걸음을 걸어서 라이오넬에게 주먹이 날릴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엔디미온의 주먹은 몹시 단단했고 빨랐다. 힘껏 휘두른 주먹이 라이오넬의 머리를 때렸다. 커다란 타격음이 났다. 그 다음에 왼쪽 주먹이 반대쪽 머리를 때렸다. 엔디미온은 어깨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어깨를 다시 당기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라이오넬의 고개가 부러질 듯 크게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엔디미온이 힘껏 내지른 주먹을 맞고도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검술에는 세 가지 경지가 있다.”

엔디미온은 주먹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라이오넬의 얼굴을 때려서 묻은 피가 아니었다. 그건 그의 피였다. 그는 주먹을 뒤로 당겨서 상처가 난 것을 보았다. 기다란 상처는 결코 얕지 않았다. 마치 검에 베인 것 같았다. 라이오넬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부러진 코뼈를 스스로 맞추고 있었다. 뚜둑뚜둑하는 소리가 섬칫했다.

“셋의 경지는 검을 휘둘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라이오넬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둘의 경지는 검을 휘둘러 적을 베는 것이다.”

라이오넬의 덩치가 더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베로니카와 번스타인의 숨을 막히게 했다. 오직 엔디미온만이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경지는 베지 않고서 베는 것이다.”

일생을 오직 검의 길을 걷는데 오롯이 바친 노인은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외쳤다.

“내가 누구냐!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노성과 함께 터져 나온 기세가 실체를 가지고 사방의 모든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엔디미온의 옷도 찢어져서 넝마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는 손으로 자기 옷을 완전히 찢었다. 번스타인과 함께 방의 구석에 숨어있던 베로니카는 엔디미온의 등 뒤에 있는 성배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것은 빛이 바랜 그림일 뿐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단련된 등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엔디미온은 숨을 한 번 삼켰다가 다시 뱉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다. 마녀와 싸울 때도 쓰지 않은 성배의 힘이 그의 몸을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강했다. 저쪽에서 비장의 한 수를 꺼냈으니 이쪽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추는 듯 했다. 라이오넬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검을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났다. 라이오넬과 엔디미온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공격은 그것을 무시했다. 보이지 않는 검이 거리를 무시하고 엔디미온의 가슴을 베었다. 강철 같은 근육도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는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달렸고 라이오넬을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라이오넬의 검이 천둥이라면 그의 주먹은 벼락이었다.

“크흡······.”

라이오넬은 주먹을 맞고도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술을 비집고 핏물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얇은 핏줄기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 왈칵 핏덩어리를 뱉어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똑바로 잡았다. 투지는 인정할 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투지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엔디미온의 주먹은 라이오넬을 완전히 기절시켰다. 그는 가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찬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안에서 술병을 꺼내 한 모금을 마신 후에 상처가 난 곳에 모두 뿌렸다. 엄청 쓰라렸다.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마, 말도 안 돼.”

번스타인이 입을 쩍 벌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둥검 라이오넬은 할리아에서 적수가 없는 강자였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싸울 때는 멀쩡했다. 그를 고용하기 위해서 수많은 돈을 쏟아부었는데 누군지도 모를 떠돌이에게 지다니? 번스타인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뚜벅뚜벅 걸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멱살을 붙잡았다. 번스타인은 숨이 막혀서 컥컥 소리를 냈다.

“아까 뭐라고 했지? 강철 주먹은 거래를 안 한다고?”

“아니요, 합니다! 해요! 거래합시다, 제발! 컥컥!”

“이젠 한다고? 그러면 값을 좀 올리지. 금화 백 개 가지고 와. 그러면 난 조용히 물러날 거고 저 여자도 마음대로 해.”

“저, 정말이십니까?”

베로니카는 경악했다. 아니, 대체 왜 번스타인을 그냥 놔주는데? 추격자들한테 그랬던 것처럼 죽이든지 병신으로 만들든지 둘 중 하나는 하란 말이야!

“자, 잠깐만요, 엔디미온 씨! 저 인간은 아주 나쁜 놈이에요! 살려두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왜 이 자식을 죽여야 하는데?”

베로니카는 머리를 굴려서 마땅한 대답을 찾아냈다.

“당신을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죽일 만한 이유가 충분한 것 같은데요!”

“그래, 맞아. 이 자식은 날 죽이려고 했지. 그런데 금화 백 개 정도면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걸 말이라고 해? 미친 놈 아냐, 저거? 베로니카는 화를 억누르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저 인간은 할리아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이라고요! 살려두면 다른 사람들을 또 괴롭힐 게 뻔해요! 그리고 저도 그 사람한테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요! 그깟 금화 백 개가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가요?”

“때때로는.”

베로니카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리자 엔디미온이 말했다.

“만약 네가 나한테 금화 백 개를 준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아니면 너 스스로가 금화 백 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베로니카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지금 당장 금화 백 개는 없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기회가 있어요! 저 마법사라고 했잖아요? 지금 어떤 유적에 대한 조사를 준비 중인데 거길 조사하면 분명 금화 백 개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장담해요!”

엔디미온이 번스타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비굴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저거! 그런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냥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거짓말하는 겁니다!”

“아니야, 이 요정성애자야! 진짜로 있다고!”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하자 엔디미온이 주먹으로 벽을 때려서 조용히 시켰다. 방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절충안을 내지. 번스타인, 너는 살려준다. 대신 금화 백 개는 내가 가져간다. 그리고 베로니카, 너는 내가 데려간다. 만약 유적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면 다시 번스타인에게 데리고 가겠다. 이걸로 거래 끝.”

번스타인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요정 하나 얻으려다가 손해란 손해는 다 보았다. 그냥 금화 열 개로 끝낼 걸. 괜한 헛짓거리 때문에 큰 손해만 발생했다.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반대로 베로니카는 환하게 웃었다.

“아, 엔디미온 씨!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대박 건수라니까요? 부자가 될 준비는 되셨습니까!”

엔디미온은 베로니카를 무시하고 번스타인에게 말했다.

“그리고 추가로 저 영감은 내가 좀 데려가지.”

“저기 라이오넬 씨는 왜 데려가시는지······.”

대답은 간결했다.

“내가 좀 쓰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