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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그 말을 끝으로 라이오넬에게 다가가서 기절한 그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번스타인을 향해 말했다.
“빨리 돈 가지고 와. 그리고 내 검도.”
“아, 알겠습니다! 빨리 가져오겠습니다!”
“혹시라도 그대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난 끝까지 쫓아가니까.”
“물론입니다! 절대 도망 안 갑니다!”
번스타인이 허겁지겁 응접실을 나갔다. 잠시 뒤에 그가 금화를 담은 주머니와 엔디미온의 검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그것들을 엔디미온에게 건네주었다. 주머니가 묵직한 것이 정말 금화 백 개가 들어있는 듯 했다.
엔디미온은 금화의 개수를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허리춤에 검을 찬 뒤에 금화 주머니를 베로니카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뭐해? 들어. 그리고 저기 떨어진 검도 가지고 와.”
베로니카는 입을 비죽거리면서 금화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라이오넬이 떨어트린 검도 같이 들었다. 금화 백 개가 든 주머니는 상당히 무거웠고 검도 한 손으로 들기에는 제법 무게가 나갔다. 그녀가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던 엔디미온은 그대로 응접실을 나갔다.
“앗! 같이 가요!”
베로니카가 허겁지겁 엔디미온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긴 복도를 걸어서 저택을 빠져나왔다. 길을 걷는 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응접실에서 도망친 남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엔디미온의 무시무시함을 널리 알린 것인지 단 한 명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등에 라이오넬을 업은 채로 걷다가 베로니카를 향해 말했다.
“너 여기 출신이지?”
“할리아 출신이냐고요? 맞아요.”
“그럼 네 집으로 가자.”
“······어. 숙녀가 혼자 사는 집에 오시겠다고요?”
엔디미온은 짤막하게 말했다.
“아니면 번스타인한테 다시 갈까?”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오는 게 너무 감격스러워서 한 말이었습니다! 얼른 가시지요!”
베로니카는 종종걸음을 하면서 걸어갔다. 그녀는 엔디미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산에서 그녀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엔디미온이었고 번스타인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준 것도 그였다. 딱 한 번만 더 인내하면 다 끝날 일이었다. 유적에 가서 금화 백 개 이상의 돈을 벌게만 해주면 그녀는 정말 자유의 몸이었다.
“여기가 제 집입니다! 누추하지만 얼른 들어오세요!”
과도한 활달함은 엔디미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베로니카는 혼자 살기 딱 알맞은 작은 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엔디미온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시큼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집 안은 지저분했다. 무엇을 담았는지 모를 병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병에 담긴 검은색 액체가 혼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침대는 입고 벗은 옷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정작 옷이 걸려있어야 할 옷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침대 위의 옷가지들을 바닥에 내리고 라이오넬을 눕혔다. 그리고 무심히 한 마디 내뱉었다.
“정말 누추하기는 하군.”
베로니카는 울컥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를 내오기 위해서 찬장을 열었다. 하도 쓰지 않아서 먼지투성이가 된 주전자를 꺼내들었다.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다가 그 안에 물을 담고 탁자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신기하게도 주전자는 불씨 하나 없는 곳에서 스스로 끓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뭐야, 그거?”
“주전자요.”
“요즘 주전자는 스스로 끓나?”
“하핫! 그럴 리가요. 이건 제가 발명한 스스로 끓는 주전자랍니다.”
엔디미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군. 백 년 전의 마법사들도 이런 건 안 만들었는데.”
“백 년 전 마법사들도 이런 건 만들지 못하나 보군요?”
“그 사람들은 대신에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 시설을 만들었지.”
백 년 전에는 마법사가 아니라 뭐가 살았던 거야? 베로니카는 삐삐 소리를 내며 끓는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한 잔을 엔디미온에게 내밀고 다른 잔을 집어서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엔디미온도 찻잔을 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이거 그냥 맹물이잖아.”
“미안해요. 집에 대접할 게 없어서.”
“백 년 전에는 물을 담으면 찻물이 나오는 주전자가 있었는데 그런 건 안 만들었나?”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번부터 자꾸 백 년 전 이야기 하시던데 그건 일종의 설정 같은 건가요? 나는 백 년 전의 사람이다? 그런 종류의 설정?”
“난 진짜 백 년 전 사람이야. 아니, 정확히 말해서 백 년 전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해야겠군.”
베로니카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믿으라고요? 사람이 백 년을 넘게 산 건 일단 제쳐두고, 백 년을 살았는데 얼굴이 그래요? 주름 하나 없는데?”
“대악마 다르디낭을 처치한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나?”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지? 베로니카는 의아해 하면서도 대답했다.
“영웅들이요? 어릴 때 들은 적은 있는데요.”
대악마를 죽인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나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꼬마들은 나무막대기를 들고 대악마와 영웅들을 흉내 내며 병정놀이를 했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베로니카 역시 어릴 적 몇 번 그런 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럼 혼자서 대악마의 봉인을 지킨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봉인을 지켜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인데요. 제가 알기로 대악마는 지하의 가장 아래에 봉인됐고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그 위치는 아무도 모르고. 봉인을 지키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말해도 넌 몰라.”
“절 약간 바보 취급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냥 몰라도 된다는 소리야. 그것보다 물 좀 가져와.”
“아, 혹시 냉수가 취향이신가요?”
“가져오라고.”
베로니카가 벌떡 일어나서 빗물을 받아두는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새로운 잔을 하나 꺼내서 물을 떴다. 그것을 엔디미온에게 가져가자 그가 두 손으로 잔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베로니카는 이상하게 잔 안에 담긴 물이 훨씬 더 투명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에 떠있던 이물질들도 모두 사라졌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엔디미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오넬에게 갔다. 그리고 그의 입을 살짝 벌리고 그 안에 잔에 담긴 물을 흘려보냈다.
베로니카는 기절한 라이오넬을 정신 차리게 하려고 냉수를 먹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창백했던 라이오넬의 얼굴에 생기가 돌더니 미약하던 숨소리가 다시 커졌다. 잠시 뒤에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장님이었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단련된 감각을 통해서 여기가 번스타인의 저택이 아니란 것을 눈치 챘다. 엔디미온은 가만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라이오넬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감각을 집중했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천둥검의······.”
“나도 알아.”
엔디미온이 그의 뒤통수를 때려서 말을 멈추게 했다. 그는 얼얼한 뒤통수를 손으로 매만지다가 엔디미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싸울 때부터 느꼈지만 장님이면서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참 신기했다. 엔디미온은 그것이 엄청난 수련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라이오넬에게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너 말이야, 나 알지?”
“음? 너는 누구냐?”
엔디미온은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엔디미온. 성배기사 엔디미온.”
“엔디미온? 엔디미온이라고?”
라이오넬의 눈이 멀쩡했다면 아마 그는 눈을 크게 떴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옴질거리다가 말했다.
“엔디미온인가!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성수로도 노망 난 것은 안 고쳐지는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암담해졌다. 성배는 영험한 힘을 가진 신물이고 성수는 그 힘을 나누어주는 성배의 선물이었다. 대부분의 상처는 성수를 마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정신적인 문제는 성수로도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라이오넬에게 용무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으면 곤란했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어찌하면 될지 생각하고 있는데 성수 덕분에 상처가 다 나은 라이오넬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처럼 손을 허공에서 흔들다가 정확히 엔디미온이 있는 방향을 찾아냈다.
“엔디미온이라고 했나. 혹시 물 한 잔 마실 수 있겠나?”
엔디미온은 군말 없이 자기가 마시던 찻잔을 내밀었다. 라이오넬은 낯선 공간에 적응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민감한 감각을 활용해서 찻잔을 정확히 잡았다. 엔디미온은 나직이 말했다.
“그거 뜨겁다.”
“고맙네.”
라이오넬이 천천히 물을 마셨다. 물맛이 달았다. 성배기사인 엔디미온은 그 어떤 물도 성수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한 번 입을 댔던 물이니 성수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오넬은 몇 번 더 물을 마신 뒤에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두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의 침묵이었다. 베로니카는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며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혹시나 두 사람이 또 집 안에서 싸움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집 안에는 중요한 실험 도구들이 많이 있었고 돈으로는 구할 수 없는 물건들도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싸움이 난다고 하면 말릴 자신이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엔디미온이란 자가 있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노망이 난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주 점잖고 정중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네의 이름도 엔디미온이군. 그리운 이름이야.”
엔디미온은 라이오넬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이 노인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아직 살아있지, 라이오넬?”
백 년을 넘게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고 아무리 길게 살아도 일흔을 넘지 못했다. 엔디미온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랬다. 라이오넬 역시 당연히 죽었어야 했다. 그는 성배기사와 함께 대악마를 물리친 영웅들 중 한 명이었지만 백 년의 시간을 견딜 수 없는 한낱 사람이었다.
“정말로 엔디미온인가······. 성배의 힘이란 대단하군. 내가 비록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어. 청년 때 모습 그대로야.”
“난 의무로부터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너희들과는 달리.”
“미안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때의 난 혈기가 넘쳤으니까. 그런 아무도 없는 곳에 처박혀서 호밀 농사나 짓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웠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안하네, 엔디미온. 그리고 우리가 함께 져야 할 의무를 대신해 주어서 고맙네.”
라이오넬이 고개를 숙였다. 엔디미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땅히 의무를 져야 할 자들이 모두 도망치고 혼자 남았을 때 그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오 년은 묵묵히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십 년은 격정적인 분노에 휩싸였다. 자신이 왜 여기서 빌어먹을 호밀밭을 가꾸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타는 분노는 십 년 동안 차츰차츰 사라졌다. 그는 남은 칠십오 년 동안 혼자서 의무를 다하며 고요한 호수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감정은 닳고 닳아서 인간의 것과 달라졌다.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격정에 휩싸이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만약 의무로부터 도망쳤던 영웅들을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덤덤히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용서와 복수, 둘 다 어려운 일이었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흔치 않은 일이다.
“······사과는 됐어. 그것보다 백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살아있었다니 놀랍군.”
“참 신기한 일이지. 나는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 살아있으니 말이야. 아무래도 성배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내게 남은 모양일세. 나 역시 한때 성배의 힘을 빌려서 대악마와 싸웠으니 말이야.”
성배의 힘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엔디미온이었지만 그는 다른 영웅들에게 힘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대악마 다르디낭은 강력했고 성배기사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오넬의 말대로 성배의 힘이 몸에 남았다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미약한 성배의 힘이 수명을 늘려주었으나 노화까지는 어찌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노망도.
“두 분이서 쿵짝이 잘 맞으시네요. 무슨 역할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베로니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믿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백 년 전의 영웅이라고? 그럴 리가. 그들의 대화를 덥석 믿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했다.
엔디미온은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베로니카를 무시하며 말했다.
“정말 성배의 힘 때문이라면 다른 놈들도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겠군.”
대악마와 싸운 자들은 엔디미온과 라이오넬 말고도 몇 명 더 있었다. 엔디미온은 당연히 그들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라이오넬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몰랐다.
“라이오넬, 그럼 혹시 다른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글쎄. 나도 그들 전부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건 아니라서. 전부 다 살아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나이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옛날에 누구 한 명을 만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누구였더라······.”
“어디서 만났는데?”
“여기서 좀 떨어진 도시였네. 도시 이름이 나, 나, 나······.”
라이오넬이 얼른 기억을 해내지 못하자 베로니카가 끼어들었다.
“나르둠? 나달리오? 나르딘?”
“나······.”
“나실라? 나굴로? 나르타?”
베로니카의 도움 덕분에 기억을 떠올린 듯한 라이오넬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는 배에 힘을 딱 주고서 소리쳤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