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0화 (10/199)

10

“저기, 엔디미온 씨, 이 영감님을 진짜 데려갈 생각이에요? 저는 좀 그런데······.”

베로니카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딱 잘라 말해서 라이오넬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노인이었다. 그런 주제에 검술만은 강력하니 갑자기 헤까닥 돌아버려서 칼부림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통제가 되지 않는 위험한 사람을 굳이 데리고 다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엔디미온도 노망이 나버린 오랜 친구를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라이오넬은 강하지만 엔디미온은 그보다 더 강했다. 여행 중에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갑자기 죽었던 대악마가 다시 부활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의무로부터 도망친 자에게 다시 족쇄를 채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영웅들의 행동은 괘씸한 짓거리지만 그들을 벌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도망쳤을 때부터 이 일은 오롯이 엔디미온의 의무였다.

그런데도 라이오넬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한때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친우의 처지 때문이었다. 그대로 번스타인의 저택에 남겨두었다면 그는 여전히 그 한심한 작자의 밑에서 남을 겁주고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 그건 영웅의 말로에 맞지 않았다. 비록 의무로부터 도망쳤다고 해도 대악마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라이오넬은 영웅이었고 영웅답게 죽어야 했다.

“보아하니 가끔씩 정신이 돌아오기는 하는 모양인데.”

“원래 노망이 나면 가끔 정신이 돌아왔다가 아주 돌아버렸다가 막 그런대요.”

“라이오넬이 아주 돌아버릴까 걱정인가 보군.”

베로니카는 잠깐 고민했다. 솔직히 걱정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기가 꺼려졌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엔디미온이 화를 낼까 겁이 난 것이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약간은?”

“걱정할 거 없어. 완전히 정신을 놔버리면 내가 죽이면 되니까.”

“오우······.”

베로니카는 감탄하는 것인지 놀란 것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위에 걸칠 것 좀 없나?”

엔디미온은 아까의 싸움 때문에 상의가 다 찢어진 상태였다. 자그마한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잘 단련된 근육들을 따사롭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대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대리란 것을 알았다.

베로니카는 이제야 그가 상의를 입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어머 하고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몸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엔디미온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는 옷들 사이에서 망토 하나를 찾아냈다. 넉넉한 크기라서 덩치가 큰 엔디미온도 충분히 몸을 가릴 수 있었다. 그는 감색의 망토를 몸에 걸쳤다. 망토 사이로 맨살이 슬쩍슬쩍 드러났다.

“······좀 변태 같네요.”

“다른 옷은 없나?”

“이 집에는 여자 옷뿐이에요. 설마 여자 옷을 입으실 생각이에요?”

“아니.”

엔디미온은 망토 자락을 손으로 만지다가 말했다.

“그래서 유적은 어디에 있나?”

“유적이요?”

“유적에 가면 금화를 벌 수 있다면서. 그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나?”

“아니요! 아니요! 진짜라고요! 그런데 지금 가시게요? 설마? 진짜로?”

“왜? 지금 가면 안 되나?”

베로니카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가기 전에 준비라는 걸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준비? 그냥 유적에 가서 유물 몇 개 챙겨오는 것뿐이잖아. 학술적 가치가 넘치는 곳이라 학자들을 대동해야 하나? 아니면 전문적인 유물 발굴단을 꾸려서 가야 돼? 너도 사실 거기 도굴하러 가려고 했던 거잖아.”

“아니, 그 말이 맞긴 맞는데······. 사실 그 도굴이란 게 말이에요, 초기 투자비용이란 게 좀 드는 일이거든요? 유물이 어디 있는지 탐지할 수 있는 도구도 사야 되고, 이게 어떤 유물인지 알아내는 도구도 있어야 하고, 거기까지 가려면 타고 갈 말도 있어야 하고, 이것저것 해서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엔디미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까 번스타인에게 받은 금화 주머니를 열고 그 안에서 금화 한 움큼을 꺼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쏟으며 말했다.

“다행히도 내가 돈이 좀 많군. 이거 가지고 가서 도구도 사고 말도 사고 다 해. 남는 돈은······.”

“혹시 제가 가지면 되나요?”

“아니, 전부 가져 와. 동전 하나도 빼돌리지 말고. 올 때 내 옷도 하나 사오고.”

베로니카가 칫 소리를 냈다. 그녀는 탁자 위의 금화를 주머니 안에 담았다. 그리고 문을 열면서 말했다.

“갔다 올 동안 집 잘 지키고 있어요!”

혼자 집을 지키는 아이에게 당부하듯 눈을 부라리는 꼴이 참 우스웠다. 엔디미온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집을 지켰다. 라이오넬이 가끔 말을 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시답잖은 헛소리라서 무시했다. 다행히도 그가 정신을 놔버리는 일은 없었다. 엔디미온이 상대해주지 않자 침대 위에서 조용히 명상을 시작했다.

베로니카는 저녁때가 되서 돌아왔다. 그녀는 구입한 말들은 상인에게 맡겨두었고 출발할 때 거래 내역서를 보여주고 찾아가면 된다고 했다. 등에 맨 가방은 무엇이 들었는지 상당히 두툼했다. 엔디미온은 굳이 내용물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새로 산 옷을 그에게 주었다. 망토를 벗고 옷을 갈아입으며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베로니카는 잠깐 고민하다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출발은 내일 하기로 정해졌다. 베로니카는 남자 두 명이 자기 집에서 잔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애석하게도 노인인 라이오넬조차 힘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 더욱 화나는 일은 라이오넬이 멋대로 침대를 차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베로니카가 집에 돌아오기 전부터 침대에서 코를 골며 잘고 있었다. 하지만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일어나.”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그는 아직 자고 있는 라이오넬과 베로니카를 깨웠다. 라이오넬은 깨우자마자 벌떡 일어났고 베로니카는 미적거리다가 일어났다. 어젯밤에 바로 떠날 수 있게 준비를 마쳐두었기에 세 사람은 바로 집을 나섰다. 일단 상인에게 맡겨둔 말들을 찾기로 했다. 상인은 아침 일찍 찾아온 그들을 보고 웃었다.

“다들 튼튼한 말이오.”

베로니카는 라이오넬이 과연 말을 탈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는 능숙하게 말을 탔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는 해도 몸에 익은 기술은 까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말을 몰았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 알디에게 인사한 뒤에 들 위를 달렸다.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라이오넬이 말했다.

“그런데 다들 누구쇼? 지금 어디 가는 거요?”

베로니카는 순간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니, 그걸 왜 지금 물어.

“영감님, 저는 베로니카라고 하고요, 영감님 왼쪽에 있는 사람은 엔디미온 씨라고 해요. 아시겠어요?”

“번스타인 씨가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번스타인은 이제 잊으세요.”

“왜? 그 사람 죽었어? 거 정정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벌써 갔대?”

그 사람 안 죽었어요. 베로니카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설명해주기가 귀찮았다. 다행히도 라이오넬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장님인데도 멀쩡하게 말을 탔다. 베로니카는 저게 가능한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다른 감각들이 발달했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진짜 장님이 아닐지도 모른다.

“얼마나 남았지?”

엔디미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유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그의 곁으로 말을 붙이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정오 정도에 도착할 것 같아요.”

“이런 곳에 유적이 있다고? 정말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찾아냈을 것 같은데.”

“에이, 유적에 대해서 잘 모르시네. 유적이란 게 나 여기 있소 하고 아무데나 있겠어요? 그런 건 보통 숨겨져 있다고요.”

“그런데 그 숨겨진 유적을 너는 찾았다?”

“다 제 실력이 뛰어나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하는 건 양심 없는 짓이고. 운이 좀 따랐다고 할까요.”

세 사람은 한참 더 말을 몰았다. 해가 점점 떠올라서 이제 머리 바로 위에서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리 말을 달려도 주변에 보이는 것은 들뿐이었다. 엔디미온이 베로니카를 쳐다보자 그녀가 웃었다.

“너무 노려보지 마세요. 다 왔으니까요. 여기입니다.”

베로니카가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말에서 내리자 엔디미온도 따라서 내렸다. 라이오넬만이 멀뚱히 말 위에서 가만히 있다가 엔디미온의 손에 붙잡혀서 내려왔다.

“유적이 여기 숨겨져 있다고?”

“잠깐만요.”

베로니카는 가방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고운 가루가 들어있었는데 그것을 한 움큼 쥐고 바닥에 뿌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면서 가루를 다시 한 번 뿌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이동하고 가루를 뿌리는 일을 반복했다.

주머니 안의 가루가 거의 동났을 때였다. 가루를 뿌린 바닥의 모습이 마치 신기루가 흩어지듯 일렁였다. 안개가 걷히듯 일렁거림이 차츰 사라졌다. 그리고 본래 있던 바닥의 모습 대신에 커다란 돌문이 나타났다. 베로니카는 그것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입구를 찾았어요!”

엔디미온은 말없이 돌문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있는 문이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유적은 지하에 있는 듯 했다. 그는 돌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겼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돌문은 먼지를 일으키며 거친 소리를 냈다. 돌문이 열리고 나타난 검은색 통로는 마치 쩍 벌린 뱀의 입 같았다. 빛 한 줌 없는 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흐음, 어디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라이오넬이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베로니카는 그가 괜히 입구 근처에서 돌아다니다가 발을 헛디뎌서 안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검으로 주변을 먼저 확인한 다음에 움직였기에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지는 않았다. 엔디미온은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진짜 유적 맞아? 느낌이 영 그런데.”

“아, 유적이란 게 원래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되다 보니까 좀 스산한 느낌이 나고 그래요. 그 왜 집 같은 것도 오래 비워두면 귀신 사는 것처럼 을씨년스럽게 되잖아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겁도 없이 내려가는 그를 보면서 베로니카가 목을 움츠렸다. 자신 있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녀도 불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안 따라갈 수는 없어서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라이오넬이 또 멍하니 있기에 소리를 쳐서 그를 불렀다. 허겁지겁 따라오는 그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유적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짙게 자리 잡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마법을 이용해서 주변을 밝히려고 했다. 그녀가 주문을 외워 빛을 만들어냈을 때였다.

갑자기 어둠이 짙게 깔린 구석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박쥐인가 했으나 아니었다. 박쥐보다 훨씬 더 컸고 몇 배는 더 흉측하게 생긴 악귀였다. 엔디미온은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는 악귀의 머리를 붙잡은 뒤에 벽에 후려쳤다. 악귀는 머리를 붙잡힌 상태에서도 손을 휘두르면서 엔디미온을 공격하려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벽에 악귀를 후려친 후에 바닥에 내던지고 그대로 발로 머리를 으깨버렸다. 악귀는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다가 숨이 끊어졌다.

엔디미온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원래 유적이란 게 다 이런 거라고?”

“······크흠,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네요.”

손님은 개뿔. 엔디미온은 코웃음을 쳤다. 여기가 진짜 유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위험한 곳이란 사실만은 확실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