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빛 좀 더 만들어 봐.”
유적 안은 아주 깜깜했다. 약간의 빛으로는 바로 발밑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외웠다. 그녀가 공중에서 둥둥 떠다니는 빛의 공을 다섯 개 정도 만들었다. 유적 안의 어둠은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다섯 개의 빛의 공이 엔디미온 일행 주변을 떠돌고 있었지만 아주 환해졌다는 느낌은 없었다. 베로니카는 유적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라이오넬이 말한 것처럼 어디선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약간 추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냥 선선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움직이면 열이 나니 오히려 서늘해서 날뛰기 딱 알맞았다. 그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서 베로니카에게 주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이 당겨져서 근육이 선명하게 보였다.
“혹시 저 감기 걸리지 말라고 주는 건가요? 생각보다 다정하신데요?”
“아니, 거치적거리니까 들고 있으라고.”
“······전 엔디미온 씨의 짐꾼을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요.”
베로니카가 부루퉁하게 말하자 엔디미온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한 발자국 걸어가며 말했다.
“만약 이곳에 온갖 악귀들이 숨어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문에 잘 따라가던 베로니카가 엔디미온의 등에 얼굴을 부딪혔다. 그의 등은 아주 딱딱해서 사람의 몸이 아니라 바위에 부딪힌 것 같았다.
“네가 나보다 더 잘 싸울 자신이 있다면 불만을 말해도 돼. 그게 아니라면 그냥 조용히 내 뒤나 따라오고.”
베로니카는 침묵했다. 만일 유적 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이 그녀였다면 분명 처음에 나타난 악귀의 기습에 사망했을 것이다. 어둠에 숨어서 소리도 내지 않고 갑작스럽게 기습하는 악귀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엔디미온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말대로 만약 이곳이 악귀들이 숨어있는 위험한 곳이라고 한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엔디미온뿐이었다.
엔디미온은 이곳의 길을 다 아는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베로니카는 빛에 의지하면서 그의 뒤를 쫓아가는 것도 벅찼다. 그녀는 슬쩍 뒤를 보았다. 라이오넬도 잘 쫓아오고 있었다. 장님이 어째 나보다 더 잘 걷네.
그런 생각을 알아챈 것인지 엔디미온이 말했다.
“라이오넬은 장님이니까 오히려 더 잘 걷는 거다. 애초에 빛이 있는 곳에서도 눈이 보이질 않으니까 여기서도 다를 것이 없지.”
“아,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맞네요. 그럼 엔디미온 씨는 장님도 아닌데 어쩜 그리 잘 걸어요?”
“난 밤에도 낮처럼 볼 수 있어.”
베로니카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빛은 왜 만들라고 했는데요?”
“네가 보고 걸어야 하니까.”
생각지 못한 대답에 베로니카가 약간이나마 감동을 받았다. 엔디미온은 뒤에서 오우 하고 소리를 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 조용히 좀 하고 따라와.”
“하지만 이런 곳에서 조용히 하고 있으면 더 무섭단 말이에요. 혹시 옷자락 좀 잡고 가도 돼요?”
엔디미온은 코웃음을 쳤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 밤에 엄마 손을 잡고 자야 되는 꼬마냐?”
“저는 애초에 무서운 이야기를 안 들으려고 노력하는 꼬마인데요?”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치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베로니카가 등에 부딪히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으로 만들어낸 빛들을 자기 주변으로 모았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은 빛이 없어도 되기에 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엔디미온의 등만 보고 걷던 그녀는 그가 갑자기 멈추는 것을 미리 발견하고 같이 멈출 수 있었다.
널따란 등으로 베로니카의 시야를 가리고 선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본래 그가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말과 행동을 모두 멈추는 경우는 없었다. 베로니카가 그를 오래 알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을 하지 않을 때는 대개 무언가를 때리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안 때릴 때는 말을 했다. 그럼 둘 다 안 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야, 요정.”
엔디미온이 말을 하자 베로니카가 안심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때릴 일이 없다는 것이고 그건 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저 갑자기 나타난 돌문 때문에 잠깐 걸음을 멈춘 것뿐이었다.
“혹시 열쇠 가지고 있나?”
“무슨 열쇠요?”
“이 문을 열 열쇠.”
“아, 잠시만요. 제가 한 번 볼게요.”
베로니카가 둥둥 떠다니는 빛들을 대동하고서 엔디미온과 자리를 바꾸었다. 돌문의 중앙에는 열쇠 구멍이 하나 있었다. 빛을 그 안으로 조심스럽게 통과시키며 내부 구조를 확인했다. 오래된 유적의 돌문이지만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언가 마법이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잠금 장치에 의해서 잠겨있는 것뿐이었다. 베로니카는 주머니를 뒤져서 작은 병을 꺼냈다. 손가락 하나 정도 되는 크기의 병이었다.
그 안에는 검은색 액체가 들어있었다. 병의 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열쇠 구멍 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열쇠 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베로니카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조심하세요.”
무엇을? 엔디미온이 물어보기도 전에 열쇠 구멍에서 불꽃이 튀었다. 굳게 닫혀 있던 돌문이 열쇠 구멍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박살이 난 돌문을 보고서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재주가 있군.”
“그럼요. 제가 좀 재주가 많답니다.”
“이제 뒤로 나와.”
베로니카는 얌전히 엔디미온의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선봉에 서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은 엔디미온의 역할이었다. 세 사람은 다시 전진했다. 이상하게 라이오넬이 아무 말도 없었다. 베로니카는 혹시나 그가 완전히 돌아서 칼부림을 할까 걱정했다. 본래 위험이란 아무 전조도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녀는 등 뒤의 라이오넬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엔디미온의 뒤를 따랐다.
지하 유적은 그냥 끝도 없이 이어진 길뿐이었다. 다시 악귀가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무언가 돈이 될 만한 것이 나오지도 않았다. 베로니카는 초조해졌다. 이대로 금화 백 개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찾지 못하면 다시 번스타인에게 가야 했다. 돌아가면 그가 어떤 짓거리를 할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엔디미온 씨, 그런데 길은 알고 가는 건가요?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에요?”
엔디미온은 등 뒤에서 날아온 외침을 무시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뼈들을 보았다. 돌문을 넘어서 지나왔을 때부터 간간이 보이던 것들이었다. 베로니카는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그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이곳은 유적 같은 곳이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었다.
방금 지나온 돌문이 바로 이곳의 역할에 대해서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좌우로 돌문들이 많았다. 그는 그 문을 열어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더럽고 추악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공기가 탁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야, 요정.”베로니카는 그게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았다. 얼른 대답했다.
“왜요? 그리고 제 이름은 요정이 아니라 베로니카인데요.”
“그래, 베로니카. 이제부터 라이오넬한테 딱 붙어있어.”
“영감님이랑요? 왜요? 혹시 영감님이 길 잃어버릴까 걱정돼서 그래요?”
엔디미온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대신에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어둠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공기를 찢으며 빠르게 날아오던 것이 손에 붙잡혔다. 그대로 목을 비틀어서 죽였다. 그 순간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듯 어둠 위로 빨간색 눈동자들이 나타났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둠 뒤에 숨은 저것들이 사람처럼 두 개의 눈을 가졌다고 한다면 총 열 마리가 있었다.
냄새 나는 악귀 놈들. 엔디미온이 한 발자국 움직이자 악귀들이 날갯짓을 하며 날아왔다. 그것들은 박쥐처럼 생겼지만 개만큼이나 크고 입이 아주 길쭉했다. 바늘처럼 길쭉한 주둥이로 사람의 뇌를 빨아먹는 악귀였다.
열 마리의 악귀들이 엔디미온을 향해 날아왔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손을 뻗어서 악귀 한 마리를 잡아챘다. 목을 붙잡은 채로 악귀를 무기처럼 사용했다. 날아오는 악귀를 향해서 한 번 휘두른 다음에 그 악귀가 바닥에 떨어지자 얼른 발로 대가리를 박살냈다. 자기 동족을 몽둥이처럼 사용하고 있는 엔디미온을 본 악귀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악귀 한 마리가 길쭉한 주둥이로 머리를 노렸다. 저 주둥이는 마치 송곳과 같아서 단단한 투구도 뚫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아무리 엔디미온이라도 머리가 뚫리면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악귀를 던져서 날아오는 악귀를 떨어트린 다음에 주둥이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잡고서 주둥이를 힘껏 잡아당겨서 뽑아버렸다. 악귀답게 몸 안에는 초록색 액체가 들어있었다. 그것이 확 튀었다.
엔디미온은 손에 든 악귀의 주둥이를 송곳 대용으로 사용했다. 오른손에 든 길쭉한 주둥이를 휘둘러서 날아오는 악귀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다른 악귀에게 손을 날려서 손가락으로 두 눈을 뚫어버렸다. 눈이 있어야 할 곳 뒤쪽으로 들어간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단단하게 걸고서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 얼굴을 꽉 잡았다. 벽에 던져서 머리를 부순 뒤에 손을 한 번 털었다.
그가 아무리 빠르고 확실하게 악귀들을 상대한다고 해도 열 마리라는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다섯 마리를 해치웠지만 그건 다시 말해서 아직 다섯 마리가 남았다는 소리였다. 다섯 마리 중에서 세 마리는 그의 등 뒤로 날아가서 베로니카를 노렸고 나머지 두 마리는 머리 대신에 어깨와 가슴에 주둥이를 꽂았다. 그들은 피를 빨려는 것처럼 주둥이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마실 수 없었다. 무쇠와 같은 주먹이 머리를 으깼다.
자신에게 달려든 악귀들을 모두 해치운 엔디미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베로니카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발 근처에는 세 마리의 악귀들이 깔끔하게 조각이 나서 떨어져 있었다. 라이오넬이 한 일이었다. 그는 검을 흔들어서 오물들을 털어냈다. 또 크게자기 이름을 외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베로니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악귀들이 대체 왜 여기에?”
“아무래도 금화 백 개를 벌지는 못하겠군.”
엔디미온은 두 눈을 크게 뜬 베로니카를 향해 말했다.
“여긴 유적 같은 곳이 아니야. 무덤이지. 백 년 전 악마와 악귀들을 사냥하고 그 시체들을 묻었던 무덤. 그 사악한 것들의 몸에는 더러운 기운이 가득해서 아무 곳에나 내버려두면 땅이 썩거든. 그래서 지하에 이런 장소를 마련하고 한데 모았지. 여기도 그런 곳 중 하나일 뿐이야. 유적이 아니라.”
“무, 무덤이라고요? 그런데 왜 살아있는 악귀들이 있는 건가요?”
설명하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아무래도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악마가 있었던 모양이군. 다른 악귀들이나 악마들의 시체를 먹으며 힘을 회복하고 이곳에서 세력을 불리고 있었겠지.”
“그럼 큰일 난 거잖아요! 백 년 동안 악마가 힘을 모은 것도 모자라 악귀들까지 있는데! 얼른 나가요! 얼른!”
아니, 네가 유적이라고 해서 온 거잖아. 엔디미온은 베로니카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