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2화 (1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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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긴 왜 나가. 끝까지 가야지.”

엔디미온은 가지고 있던 수통의 뚜껑을 열어서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상처가 난 부위에 뿌렸다. 상처가 차츰 아물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숨어있는 악귀들은 없어보였다. 오른쪽에 있는 돌문의 틈 사이로 내부를 확인했지만 안에는 뼈무덤뿐이었다. 제법 양이 많아 보이는 것이 이곳에 상당한 숫자의 악귀들을 묻은 모양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전진했다. 어둠을 겁내지 않고 쑥 들어가는 그를 보고서 베로니카가 말했다.

“안 나간다고요? 왜요? 여기에 악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이 지하무덤의 돌문을 박살냈으니까. 지금까지 왜 악마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겠나? 백 년이면 충분히 힘을 모았을 건데 말이야. 그건 아까 우리가 부순 돌문 때문이지. 그게 없어졌으니 우리가 이대로 그냥 나가면 악마와 악귀들이 바깥으로 쏟아질 거다.”

그 말이 맞았다. 베로니카는 이대로 도망치면 애꿎은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여기 남는다고 해서 반드시 악마와 악귀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은 강하지만 그래도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악마와 악귀들을 상대하는 건 신전의 역할이에요. 우리가 얼른 도시로 돌아가서 신전에 보고하면 돼요. 그러면 성기사들이 사악한 존재들을 해치울 거라고요.”

성기사들의 실력은 모르지만 악마와 악귀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지하에 갇혀 있던 악마는 더 잔인하고 악독했다. 괜히 성기사들이 덤볐다가 사악한 사술에 의해 악마의 하수인이 될 가능성이 더 컸다.

“난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빌릴 때 악마와 악귀들을 단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고 쳐죽이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끝까지 가는 거야. 저 안쪽에 숨어있을지 모를 악마를 죽이는 것이 내 의무니까.”

“호수의 여왕이요? 아니, 그건 잘 모르겠고 나가야 한다니까요?”

엔디미온은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 볼 인연이 아니었다. 여기서 금화 백 개를 벌면 거기서 끝이고 벌지 못하면 번스타인에게 다시 데려가는 것으로 끝인 인연이었다. 굳이 자기 이야기를 떠벌릴 이유는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걸었고 베로니카는 발을 동동거렸다. 뒤에서 라이오넬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아가씨, 안 가고 뭐해?”

“영감님! 영감님! 엔디미온 씨 좀 말려보세요! 이러다가 악마랑 싸우게 생겼다고요!”

“엔디미온이 누군데?”

“······영감님 친구요.”

엔디미온은 뒤에서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시체들을 발견했다. 백 년 전에 묻힌 악귀들의 시체라면 벌써 살이 썩어서 없어졌을 것인데 아직 말랑말랑한 살이 붙어있었다. 다만 무언가에 물어뜯긴 듯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손가락으로 물린 자국의 크기를 재보았다. 한 뼘이 넘는 걸로 보건데 절대로 사람이나 그 비슷한 존재가 만든 상처가 아니었다. 입이 아주 크고 그걸 무기로 삼는 악귀의 짓이었다.

무언가에 물려죽은 시체들은 아까 전에 엔디미온을 습격했던 악귀들과 모습이 똑같았다. 이 지하에 먹을 것이라고는 없는데 악귀들이 번창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엔디미온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이곳은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한 악귀가 약한 악귀를 잡아먹고 배를 불린다. 잡아먹을 것이 없는 약한 놈들은 지하를 돌아다니는 쥐새끼들이나 잡아먹으며 연명했을 것이다.

이곳에 죽어있는 악귀들의 숫자는 세 마리. 한 입씩만 먹고 간 것을 보면 허기 때문에 악귀를 사냥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장난일까. 참 고약한 놈이로군.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이 따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움직였다.

지하무덤은 아주 컸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좁은 길이 확장됐다. 처음에는 작은 지하무덤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악귀들을 묻기 위해서 내부 공사를 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 엔디미온도 지하무덤을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단순히 죽은 악귀들과 악마들의 시체를 묻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지고 실험 같은 것도 했다. 그들의 신체를 해부하고 어떤 방식으로 죽여야 가장 효율적일지를 연구했다. 지상에서 하기 꺼려지는 작업이었다.

엔디미온은 그곳에서 자문 역할을 했다. 사악한 존재들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어디가 약점인지를 알려주었다. 그의 지식은 많은 사람들을 살렸고 사악한 존재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창칼이 되었다. 대악마를 봉인한 것은 결국 성배의 힘이었다고 해도 그때까지 사람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크르르르······.”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 조용하기는 했다. 엔디미온은 이제 슬슬 적을 만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길의 끝에는 커다란 개가 있었다. 검은색 털은 반질반질했고 바닥을 딛고 선 다리는 말의 것처럼 두꺼웠다. 크기는 개라기보다는 멧돼지만큼 컸다. 약간 벌린 입 사이로 혀가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건 뱀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날름거리는 혀가 쉭쉭 소리를 냈다. 꼬리는 없었다.

박쥐처럼 생긴 악귀들을 잡아먹은 범인이었다. 입 주변의 털에는 아직 초록색이 묻어 있었다. 얼굴에는 여섯 개의 눈이 달려있었는데 빨간색으로 빛났다. 혓바닥인지 뱀인지 모를 것이 쉭쉭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지하에 개도 키우는군.”

엔디미온은 무심하게 말한 뒤에 검을 뽑았다. 덩치가 커서 맨손으로는 싸우기 힘들 것 같았다. 그는 오랜만에 잡아본 검에 익숙해지려는 듯 몇 번이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엔디미온의 등에 가려서 드디어 악귀의 모습을 확인한 베로니카가 비명을 지를 때였다.

악귀가 컹컹 짖으면서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도 얼른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제일 먼저 노린 것은 길게 뻗은 혓바닥이었다. 혓바닥 끝에 달린 뱀의 머리가 입을 벌리고 씨이익 소리를 내더니 무언가를 뱉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맞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몸을 약간 틀어서 피한 다음에 검을 휘둘러서 잘랐다. 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서 꿈틀거리다가 발에 밟혀 짓뭉개졌다.

뱀이 날린 액체가 떨어진 곳은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녹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그쪽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악귀에게 집중했다. 혀를 잃은 괴물이 분노에 차서 짖었다. 시끄러운 입 안에 검을 꽂으려는데 괴물이 뒷발로 선 다음에 나머지 두 발로 엔디미온의 몸을 할퀴었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그의 단단한 육체에 상처를 낼 수 있는 존재는 흔치 않았다.

물론 흔치 않다고 해서 대단하다는 뜻은 아니다. 엔디미온은 자기 어깨를 딛고 있는 악귀의 다리 하나를 손으로 꽉 붙잡아서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엄청난 힘에 악귀도 깜짝 놀라며 끌려왔다. 날카로운 검이 악귀의 오른쪽 눈 두 개를 한 번에 찔렀다. 검을 뽑는 순간 초록색 액체가 얼굴에 확 튀었다. 입 안으로도 약간 들어갔다. 맛은 없었다. 약간 씁쓸한 맛이었다.

다리를 붙잡힌 악귀는 엔디미온이 가진 무시무시한 악력에 깜짝 놀랐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다리가 부러지려고 했다. 다리뼈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 것은 엔디미온도 들었다. 그의 귀는 민감했고 작은 소리조차 잡아낼 수 있었다. 역수로 든 검으로 악귀의 어깻죽지를 찌르려고 했다. 본래 장검은 짧은 거리에서 그런 식으로 사용하기 힘들지만 그의 힘이 워낙 세서 악귀의 두꺼운 가죽을 뚫고 그 안에 단단히 박혔다.

“컹! 컹! 컹컹컹!”

악귀가 다급하게 짖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었는지 입을 쩍 벌리고 엔디미온의 머리를 삼키려고 했다.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달려오는 악귀의 머리를 보고서 엔디미온은 검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주둥이를 꽉 붙잡았다. 짐승의 턱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짐승만 해도 그런데 사악한 힘을 가진 악귀라면 그 힘이 얼마나 강할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악귀는 쉽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지 못해서 침이 턱을 타고 줄줄 샜다. 엔디미온은 악귀의 입을 잡고 있느라 그 날카로운 이빨에 손바닥을 찔렸지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는 자꾸만 닫히려고 용을 쓰는 악귀의 입을 억지로 벌리는데 집중했다. 입을 벌릴 수 있는 각도는 정해져 있지만 엔디미온의 무시무시한 힘은 그것을 무시하고 악귀의 입을 뒤로 젖혔다. 턱관절에서 자꾸만 쩍쩍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숨을 한 번 삼키면서 더 힘껏 힘을 주었고 결국 악귀의 입은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상태가 됐다.

하지만 그대로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악귀의 어깻죽지에서 검을 뽑은 다음에 빠르게 목을 베었다. 두꺼운 목은 한 번에 잘리지 않아서 덜렁거렸다.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올려 완전히 베었다.

엔디미온은 초록색 액체를 몸에 잔뜩 뒤집어썼다. 그는 혀를 한 번 찬 뒤에 자기 뒤쪽을 보았다. 베로니카가 오오 소리를 내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모습이라서 좀 웃겼다.

“가자.”

“같이 가요! 영감님! 얼른 가요!”

베로니카가 라이오넬을 챙겨서 엔디미온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제법 걸었지만 다시 악귀들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이곳이 악귀들의 소굴로 변했다면 응당 그들의 습격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코끝을 움찔거리며 사악한 존재들의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분명히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 챘다. 그런데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를 두려워하는지는 뻔했다. 성배기사였다.

그들은 십 분 정도를 더 걷다가 널찍한 장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지금까지 지나쳐 온 곳과 분위기가 달랐다. 무덤이라기보다는 실험실 같았다. 다 삭아서 손만 대면 바스러질 것 같은 종이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고 책장이나 책상, 실험대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사람들의 뼈였다. 그냥 뼈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뼈로 만든 장식품이었다. 결코 붙어있을 리가 없는 뼈들끼리 모여서 기괴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엔디미온은 이곳이 지하무덤의 실험실이란 것을 알았다. 저 시체들은 이곳에서 연구하던 학자들의 것이리라. 저들은 왜 여기서 죽었으며 그 뼈들은 저런 기괴한 형상이 되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악마의 짓이었다.

“······흐흐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왔구나.”

어둠은 짙었다. 실험실에는 베로니카의 마법으로도 밝힐 수 없는 어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아주 컸다. 하반신은 말과 같았으나 다리가 여섯 개였다. 허리는 두 팔로 다 껴안을 수 없을 만큼 두꺼웠고 강철처럼 단단했다. 팔은 나무처럼 두툼했으며 손은 사람의 목을 쉽게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억셌다. 눈에서는 초록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악마의 입은 여섯 갈래로 갈라졌다. 그 안에서 뱀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성배의 힘을 가진 기사야, 너의 힘이 옛날 같지 않구나. 그 넘치던 힘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 지금 내가 보는 너는 아주 작고 여리구나. 마치 병아리처럼. 흐흐흐······.”

악마가 입을 벌리고 말을 할 때마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가만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성배는 너 따위에게 과분한 물건이다. 그러니 내게 바쳐라. 그런다면 그 목숨만은 살려주마. 나는 지하무덤의 주인이자 검은 불꽃의 악마······.”

“너 같이 성배를 탐내는 놈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나?”

“······그 이름도 유명한 아르할리나, 뭐? 뭐라고?”

엔디미온은 천천히 악마 아르할리나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정답. 전부 다 내 손에 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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