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4화 (14/199)

14

“흐흐흐······.”

아르할리나는 목을 찔렸지만 바로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붙은 초록색 불꽃의 기세가 점차 약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악마의 목에 꽂았던 검을 다시 뽑았다. 목을 베어서 완전히 숨통을 끊어버리려는데 아르할리나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과연 강하구나, 성배의 기사야······. 하지만 네가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엔디미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이오넬과 베로니카의 활약으로 악귀들이 거의 다 정리된 상태였다. 라이오넬이 검으로 악귀의 목을 거침없이 잘랐다. 베로니카가 손을 휘두르자 불꽃이 일어나서 악귀의 몸을 집어삼켰다. 잠시 후면 모두 정리될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아르할리나를 쳐다보았다. 악마는 입에서 연신 피를 뱉어내면서도 웃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악마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네가 가진 성배를 노리겠지······. 네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 모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싸우고 또 싸우다가 힘이 다해서 지칠 것이고 악마들은 그때를 노릴 것이다. 그리고 너의 살점을 삼키고 피를 마시며 축제를 벌일 것이다.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이 아쉽구나. 흐흐흐······.”

엔디미온은 다시 검을 들었다. 머리 위로 힘껏 들어 올린 검은 날카롭게 빛났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것뿐이냐?”

“흐흐흐······. 지옥에서 다시 보자, 성배의 기사야.”

검이 악마의 목을 갈랐다. 커다란 머리가 뚝 떨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아르할리나의 눈에 있던 초록색 불꽃도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엔디미온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주변에 살아있는 악귀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모두 목이 잘리거나 불에 타서 죽어있었다.

베로니카가 라이오넬과 함께 다가왔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악마도 죽였으니 이제 그만 나가자.”

“저기 혹시······. 절 진짜 번스타인에게 다시 데려갈 생각이신가요?”

“여기가 유적이라며? 그래서 금화 백 개를 벌 수 있다며? 그런데 여긴 유적도 아니었고 금화 백 개를 벌지도 못했지.”

“윽······.”

베로니카는 할 말이 없었다. 엔디미온의 말이 맞았다. 그가 그녀를 다시 번스타인에게 데려가도 얌전히 따라가야 했다. 힘이 빠진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엔디미온은 그 모습을 보고서 말했다.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마법 실력이 생각보다 제법이던데.”

베로니카가 고개를 홱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백 년 전에 대악마 다르디낭을 죽였던 성배기사다. 내 의무는 세상 모든 악귀와 악마들을 죽이는 것이지. 만약 네가 내가 의무를 다하는 것을 돕는다면 도움이 된 만큼 돈으로 환산해서 금화 백 개에서 빼주도록 하지. 그런 식으로 금화 백 개만큼의 도움을 준다면 그때부터는 자유야. 싫다면 어쩔 수 없이 번스타인에게 데려가야겠고.”

베로니카는 고민했다. 요정성애자 번스타인에게 돌아가거나 악마사냥꾼이 되라는 소리였다. 고민은 길었다. 번스타인에게 돌아가는 것도 끔찍하지만 악마사냥꾼이 되는 것은 끔찍하다 못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성기사들이 몇 명씩 달라붙어야 겨우 죽일 수 있는 악마들을 사냥하는 일에 힘을 보태라니.

아까 아르할리나는 자신보다 강한 악마가 세상에 많다고 했다. 만약 엔디미온을 따라가게 된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는 선택과 숭고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위험을 향해 몸을 던지는 선택, 두 가지 중에서 고민하던 베로니카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래요. 당신을 도울게요.”

베로니카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첫째로 번스타인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의 강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 년 전에 대악마 다르디낭과 싸웠던 영웅들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들이 악마 따위에게 질 것 같지 않았다.

“어······. 그런데 오늘 일한 건 얼마 정도로 쳐주시나요?”

“금화 하나.”

이런 식이면 악마 백 마리는 죽여야 자유의 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뱉었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군. 얼른 나가야겠어.”

라이오넬이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썼다. 장님인 그는 다른 감각이 더 민감하게 작동했다. 악귀와 악마를 혐오하는 그에게 아르할리나의 냄새는 악취처럼 느껴졌다.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베로니카가 아르할리나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안 가져가세요? 신전에 가져가면 포상금을 주는데.”

“포상금을 준다고?”

엔디미온은 다시 아르할리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 베로니카에게 맡겨두었던 망토로 머리를 감쌌다. 두 손으로 들어 올려서 어깨로 받쳤다. 그 상태로 성큼성큼 걸어서 실험실을 나갔다. 당장 돈이 궁한 것은 아니지만 포상금을 준다는데 안 가져갈 이유는 없었다. 세 사람은 다시 지하무덤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말은 도망가지 않고 한가롭게 잡초들을 뜯어먹고 있었다. 바람이 선선했다. 엔디미온의 말이 아르할리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에 투레질을 했지만 목을 쓰다듬어주니 금세 얌전해졌다. 그들은 다시 할리아로 돌아갔다.

엔디미온이 어깨로 아르할리나의 머리를 받치고 있으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물러났다. 덕분에 신전까지 빠르게 갈 수 있었다.

“아, 저기가 신전입니다!”

베로니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신전이 있었다. 흰색으로 칠해진 건물은 정갈했다. 신전의 입구는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창을 잡고 선 모습만 보아도 잘 훈련된 자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신전 근처에 말을 매어두고 입구로 걸어갔다. 병사들이 말을 걸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포상금을 받으러 왔소.”

엔디미온의 커다란 덩치는 잘 훈련된 병사들에게도 압박감을 주기 충분했다. 그들은 두 손으로 악마의 머리를 들고 있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악마를 죽이고 그 증거를 가져오면 포상금을 주는 것은 신전의 업무였다. 그들이 엔디미온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병사들이 좌우로 비켜서자 세 사람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안은 조용했다. 작은 연병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갑옷을 손질하는 중인 성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전 안에 들어온 엔디미온 일행을 흘끔 보다가 다시 장비 손질에 열중했다. 견습 신관 하나가 나와서 엔디미온 일행을 안내했다. 아직 어린 견습 신관은 나이에 걸맞게 호기심이 많았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면서 엔디미온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어쩜 그리 키가 큰지, 악마는 정말 꼬마들을 머리부터 한 번에 잡아먹는지, 자기도 커서 성기사가 될 수 있을지, 쉬지도 않고 떠드는 견습 신관에게 엔디미온은 딱 한 마디만 했다.

“악마들은 너처럼 말이 많은 꼬마를 제일 먼저 잡아먹어.”

견습 신관이 흡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베로니카가 웃었다.

“여기가 율리아 경의 방이에요. 율리아 경은 신전을 관리하는 업무를 도맡아 하시는데 검술 실력도 엄청 대단하세요. 다른 성기사 분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상대가 안 된대요. 저도 크면 꼭 율리아 경처럼 훌륭한 성기사가······.”

“꼬마야.”

엔디미온의 목소리에 견습 신관이 깜짝 놀랐다.

“내가 아까 한 말을 벌써 잊었나 보구나.”

“흡!”

견습 신관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베로니카가 웃었고 엔디미온은 방문을 두들겼다. 잠시 뒤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방 안에 한 명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온갖 서류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탑을 이루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서류들의 탑을 넘어트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히 움직였다.

책상에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서류를 잠깐 쳐다보다가 힘없이 책상에 내려두었다. 얼굴이 희었는데 눈 아래는 거뭇거뭇했다. 며칠 잠을 못잔 모양이었다. 그리고 책상 곁에는 시립해 있는 기사 한 명이 있었다. 남자였고 젊었다. 서류를 확인하던 여자가 물었다.

“보아하니 포상금을 받으러 온 것 같군.”

“맞소. 우연찮게 악마 하나를 죽일 일이 생겨서. 이만한 놈이면 얼마까지 쳐주시오?”

엔디미온이 서류가 없는 곳에 조심스럽게 아르할리나의 머리를 내려두었다. 성기사 두 명이 악마의 머리를 보고 있는 동안에 엔디미온이 말했다.

“아르할리나의 머리요. 지하무덤이 어쩌고 검은 불꽃이 어쩌고 하는 악마라던데.”

“아르할리나라고? 검은 불꽃의 악마?”

“그래, 그런 이름이었소.”

여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럴 리가. 아르할리나는 백 년 전에 죽었어. 지하무덤에 묻혔지. 우리 쪽에 아르할리나의 처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살아있더라고. 이 영악한 놈은 죽은 척을 하고서 지하무덤 안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소. 무려 백 년 동안이나.”

여자는 이제 엔디미온을 보고 있었다. 검은색 눈에 빛이 감돌았다.

“나는 철십자 기사수도회의 율리아라고 한다. 당신은?”

“엔디미온. 선량한 여행객이오.”

율리아는 엔디미온이란 이름을 듣고 잠깐 놀랐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대악마를 물리친 영웅들의 이름을 따오는 일은 흔했다. 아이들이 영웅들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래, 엔디미온. 그 말을 증명할 수 있겠나?”

“일단 이 악마가 진짜 아르할리나라는 것은 당신들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될 것이오. 그리고 지하무덤에 한 번 가보시오. 그 안에 방금 죽은 악귀들의 시체가 많이 있을 것이니.”

“만약 그대가 정말 아르할리나를 물리쳐준 것이라면 철십자 기사수도회를 대신해서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군. 덕분에 할리아에 닥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응당 우리가 했어야 하는 일인데 외부인의 손을 빌리고 말았군. 부끄럽지만 요즘은 인력이 많이 부족해서 우리가 모든 악마들을 퇴치할 수가 없네.”

“아까 보니 연병장에 놀고 있는 성기사들이 많던데.”

율리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흐린 미소가 그녀의 우울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그들은 곧 다른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 한다. 악마들의 위협은 늘어나는데 성기사가 되려는 자들은 줄어드니 큰일이지.”

“백 년 전에는 성기사 혼자서 악마를 상대했는데 요즘 성기사들은 약하군. 몇 명이서 달려들어야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다니 말이오.”

엔디미온은 별 생각도 없이 한 말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성기사들이 약해진 것이 맞았다. 대악마가 날뛰던 백 년 전에는 정말 강한 성기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들은 수많은 악귀와 악마들을 처치하면서 영웅들 못지않게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한 말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율리아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젊은 기사가 성을 냈다.

“우리는 숭고한 의무를 수행하는 고행자들이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신의 철퇴가 내릴 것이다!”

“디르고!”

율리아가 큰 목소리를 내자 디르고는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엔디미온을 향해 적의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디르고의 말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가 정말 기분이 나빴다면 디르고는 벌써 바닥에 얼굴이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새끼가 배짱 좀 있네.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면서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