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괜찮소, 율리아. 내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면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겠지. 하지만 당신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소. 난 그저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오. 당신도 알겠지만 말이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의 말대로 그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백 년 전의 성기사들과 지금의 성기사들 사이에 얼마나 큰 수준 차이가 있는지는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다르디낭과의 싸움 이후로 퇴보했다.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한 강력한 성기사들은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고 신비로운 힘을 다루는 마법사들은 안전한 곳에서 후일을 도모하는 대신에 악마와의 전투를 택했다.
대악마는 결국 죽었지만 세상은 엉망이 됐다. 성기사들은 약해졌고 마법사들은 수준이 떨어졌다. 어쩌면 아직도 악마들이 날뛰고 있는 지금이 백 년 전보다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사과할 것 없어. 당신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니까. 디르고, 너도 사과드려라. 우리 철십자 기사수도회를 대신해서 할리아를 지켜주신 분이다.”
디르고는 얼굴에 열이 올라서 빨간색으로 상기됐다. 그의 코에서 세찬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마친 성난 황소 같은 모습이었다. 화를 참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베로니카는 설마 또 번스타인의 저택에서처럼 무슨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신전인데.
“저는······. 사과 할 수 없습니다, 율리아 경. 우리는 언제나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정진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제 친구가 죽었습니다. 제가 묻었지요. 우리는 숭고한 의무를 다하는 고행자들이고 그 누구에게도 비웃음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자가 우리를 대신해서 할리아를 지켰다고 해도 말입니다.”
“디르고.”
디르고는 입술을 딱 다물었다. 입매가 고집스러웠다. 엔디미온은 가만히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엔디미온이라고 했나? 난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만약 내가 이긴다면 진심을 다해서 우리에게 사과해라. 그리고 다시는 성기사들의 희생을 비하하지 마라.”
“만약에 내가 이기면?”
디르고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나에게 수치를 주든 성기사를 그만두게 하든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하기는 뭘 마음대로 해. 엔디미온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말을 남자한테 들어봤자 전혀 안 기쁜데. 애초에 내가 이길 게 뻔한 싸움이니 넌 아무것도 걸지 마라. 대신에 한 가지만 기억해라. 열심히 살아라. 남을 위해 희생하니 뭐니 같은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냥 열심히 살라고. 그런다고 아무도 안 알아주니까.”
디르고는 다시 발끈해서 소리를 치려다가 엔디미온의 눈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아주 고요한 눈이었다. 험한 소리만 내뱉는 입과 다르게 눈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엔디미온, 이 친구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망발을 한 거다. 굳이 결투에 응해주지 않아도 돼.”
“아니, 괜찮소. 나도 오랜만에 후배님 실력도 좀 볼 생각이니 말이오. 연병장으로 가지.”
엔디미온이 움직이자 디르고도 따라서 나갔다. 방에 남은 율리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베로니카는 그녀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선 채로 졸고 있는 라이오넬을 흔들어서 깨운 뒤에 세 사람은 함께 연병장으로 갔다.
아까 전 연병장에서 무구를 손질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엔디미온과 디르고를 위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싸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나타나자 그들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엄숙해졌다. 성기사들은 사악한 존재들과 용맹하게 싸우되 사사로운 투기를 즐기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다. 성기사들끼리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율이었다.
율리아는 연병장 중앙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엔디미온과 디르고를 보고서 한숨을 내뱉었다. 키는 엔디미온이 더 컸지만 디르고도 작은 덩치가 아니라서 밀리는 느낌은 없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결투 방식이 궁금하군. 완전히 무장을 하고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건가?”
“아니, 신전 안에서는 남을 해할 수 없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도 규율에 어긋나지. 승부는 격투로 내자.”
칼부림을 하든 주먹다툼을 하든 엔디미온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벌린 후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엔디미온의 실력을 탐색하려는 듯 열심히 눈을 움직이고 있던 디르고가 갑자기 근처에 있던 다른 성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입고 있던 갑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는 간소한 차림으로 주먹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엔디미온이 웃었다.
“그냥 입고 있지.”
“공정하게 싸워야지. 그래야 뒷말이 안 나올 것 아닌가?”
“그래?”
엔디미온은 한 번 덤벼보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디르고는 정말 혈기가 넘치는 나이라서 그런지 도발에 쉽게 넘어갔다. 그가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뿜으며 바닥을 박찼다. 빠르게 거리를 좁힌 후에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은 빠르고 묵직했다. 엔디미온은 두 팔을 들어서 얼굴을 보호했다.
디르고의 주먹이 쉴 새 없이 엔디미온의 팔을 때렸다. 그는 묵묵히 공격을 막으면서 두 팔 사이로 디르고의 움직임을 쳐다보았다. 발달된 근육과 제대로 된 자세에서 나오는 공격은 아주 강력했다. 단순히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발로 단단하게 바닥을 딛고 있고 허리를 힘껏 돌리면서 주먹에 모든 힘을 담아서 힘껏 쳤다. 상대가 엔디미온이 아니란 다른 사람이었다면 막기만 하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엔디미온도 슬슬 제법 맞아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르고가 숨을 가다듬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로 다시 한 발자국 전진하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엔디미온은 침착하게 방어했다. 그러자 디르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왼쪽 주먹을 갈고리처럼 휘둘러서 엔디미온의 배를 쳤다.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오직 얼굴만 신경 쓰고 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배에 공격을 맞으면 그 누구라도 버티지 못하고 자세가 무너졌다.
그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누구나 당연히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엔디미온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씩 웃었다. 좀 치네, 이 새끼. 디르고는 마치 맹수를 마주한 것처럼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분명히 배를 때렸는데 마치 단단한 갑옷을 친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움직여서 팔꿈치로 디르고의 얼굴을 갈겼다. 그리고 곧장 팔을 피면서 주먹으로 얼굴 정중앙을 때렸다. 그 다음은 대기하고 있던 왼쪽 주먹이 직선으로 날아갔다. 디르고는 코에서 피를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엔디미온이 얼른 다리를 뻗어서 디르고의 발등을 밟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 상태에서 엔디미온의 오른쪽 주먹과 왼쪽 주먹이 번갈아서 한 대씩 얼굴을 쳤다. 디르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먹에 맞았는데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운 사이에 엔디미온의 발차기가 그의 허벅지를 때렸다.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버티고 있는데 쑥 뻗어 나온 손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미 한 번의 타격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고 잡아당기는 손의 힘이 워낙 셌기에 디르고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엔디미온에게 팔과 멱살을 붙잡힌 채로 메치기를 당했다.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그는 하늘 위의 구름들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끝이냐?”
디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세상은 여전히 빙글 돌고 있었다.
“끝이냐고.”
일어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봤자 더 크게 다칠 뿐이란 것을 알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들으니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르고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술 한 병을 한꺼번에 마신 것처럼 어지러웠다. 엔디미온은 그가 다시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디르고가 억지로 두 눈을 부릅떴다. 두 개로 늘어났다가 한 개로 줄었다가 다시 세 개로 늘어나는 엔디미온의 모습을 똑바로 보려고 했다. 그는 한 발자국씩 힘겹게 움직였다. 주먹을 단단하게 쥐었다. 그리고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오히려 엔디미온의 주먹에 턱을 맞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율리아.”
엔디미온은 디르고가 쓰러지기 전에 그의 몸을 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눕히면서 말했다.
“이 친구 일어나면 잘 싸웠다고 전해주시오.”
“······이안. 디르고를 의무실로 옮겨라. 그리고 엔디미온? 내 방에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엔디미온과 디르고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성기사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이안이란 성기사가 나와서 기절한 디르고를 조심스럽게 등에 업었다. 다른 성기사들도 그제야 몸을 움직이며 디르고를 의무실로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연병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엔디미온 일행은 율리아의 뒤를 따라서 다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위태롭게 보이는 서류의 탑을 한 번 보았다가 말했다.
“내게 용건이 있으시오? 아니면 성기사를 너무 심하게 혼쭐을 내줘서 그런 거요?”
“······디르고도 이번 일로 함부로 설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겠지. 내가 당신을 부른 건 용건이 있어서야. 싸우는 모습을 보니 정말 백 년 전에 활약했던 영웅 엔디미온 같군.”
베로니카는 조용히 생각했다. 아니, 그 사람이 진짜 엔디미온인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악마들의 위협은 늘어만 가는데 성기사가 되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하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여명교단에서는 악마들의 목에 포상금을 걸고 악마사냥꾼들에게 일거리를 나누어 주고 있어. 각지의 기사수도회만으로는 악마들을 모두 처리할 수 없으니까.”
“혹시 우리한테 일거리를 맡기려는 생각이오?”
“맞았어. 검은 불꽃의 악마 아르할리나를 죽일 정도의 실력이라면 쉽게 죽지는 않겠지.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있는 그 영감님은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라고 알고 있는데.”
꾸벅꾸벅 졸다가 자기 이름을 불린 라이오넬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죽여야 할 적은 어디냐!”
“영감님, 진정하세요! 아직 아니라고요!”
베로니카가 라이오넬을 진정시키는 것을 보다가 엔디미온이 말했다.
“우린 아직 아르할리나를 죽인 포상금도 못 받은 것 같은데 또 일거리를 주겠다고,”
율리아가 웃었다. 몹시 지쳐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매력적이었다. 눈 아래에 매달린 거뭇거뭇한 피로는 흰색의 얼굴과 잘 어울려서 마치 화장처럼 보였다.
“만약에 이 일을 맡아준다면 돈을 두 배로 쳐주지. 두 건 다 말이야. 나라면 하겠는걸. 당신이라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엔디미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