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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6화 (1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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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의 사악한 존재들을 단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죽이겠다고 맹세했소.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인데 돈까지 주니 더할 나위가 없군.”

율리아가 웃었다.

“마치 성기사처럼 말하는군. 혹시 성기사 출신인가? 규율을 어기고 추방당한 성기사들이 악마사냥꾼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

엔디미온은 그 말이 농담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웃으며 대답했다.

“비슷한 걸 했었소. 악마사냥꾼은 아니고. 어쨌든 많이 죽였지. 아주 많이 말이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신처럼 용기 있었다면 악마들은 감히 우리를 해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악마와 맞서 싸우길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야. 우리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더 열심히 싸우고 한 마리라도 더 많은 악마들을 죽이려고 노력하고 있지. 엔디미온, 여명교단과 철십자 기사수도회를 대신해서 당신의 협력에 감사의 말을 전하지.”

“나한테 감사할 건 없소. 이건 내 의무고 당신이 내게 일을 주지 않았더라도 악마를 처치했을 거요.”

율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엔디미온의 얼굴을 보았다. 환한 금색 머리카락, 바다처럼 푸른 두 눈, 시원하게 뻗은 콧날과 강인한 턱. 남자다운 생김새였고 기사다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잠깐이지만 이 남자가 정말 백 년 전의 그 영웅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대악마 다르디낭과의 싸움이 끝난 후에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가 호수의 여왕에게 갔을 거라고 했다. 정말 거기로 갔다면 그의 모습을 찾지 못한 것도 말이 됐다.

그녀는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어서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

“당신들은 꼭 백 년 전의 영웅들 같군. 엔디미온과 라이오넬, 이름부터가 그래.”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가 픽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엔디미온은 대악마와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모습을 감추었고 라이오넬은 검술의 끝을 보겠다며 수련을 떠난 뒤로 여명교단과 연락이 끊겼으니까. 백 년 전의 인물들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지. 실없는 소리였다. 그냥 당신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베로니카는 율리아에게 이 사람들이 진짜 백 년 전의 영웅들이란 것을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성기사들에게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우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많은 악마들을 학살하고 마지막으로 대악마의 목을 떨어트린 성배기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면 여명교단은 큰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이 자기 정체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어보였기에 그녀도 조용히 있었다. 괜히 까불었다가 빚만 늘어나면 곤란한 것은 그녀였다.

“여기 이 아가씨의 이름이 바이올렛이었다면 더 완벽했겠지. 혹시 이름이?”

율리아가 이름을 묻자 베로니카는 깜짝 놀라서 몸을 한 번 떨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로니카인데요?”

“흠, 역시 세 사람의 이름이 전부 영웅의 것과 같은 우연은 없었군. 하긴 당연한 일인가.”

“저기······. 바이올렛이라면 백 년 전의 영웅들 중 한 명인 마법사 바이올렛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맞다. 이름처럼 보라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수많은 악마들을 학살했던 전설적인 대마법사.”

베로니카도 바이올렛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마법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책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는 유명한 마법사였다. 손짓 한 번으로 바위를 부수고 하늘에서 불꽃의 비를 내리게 한다는 대마법사였다. 그녀가 죽인 악마들의 시체로 성 하나를 꽉 채울 수 있다고 했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어디 있어? 내 돈 떼먹고 도망친 망할 년 어디 있어!”

바이올렛이란 이름이 라이오넬의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바이올렛 어디 있냐고 물으면서 날뛰는 라이오넬을 진정시키는 것은 베로니카의 몫이었다. 물론 노인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그를 베로니카 혼자서 진정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찡그린 얼굴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엔디미온 씨! 영감님 좀 진정시켜 봐요!”

“걱정하지 마. 이럴 때 딱 맞는 약이 있으니까.”

엔디미온이 슬쩍 주먹을 들었다.

“이건 주먹이란 약인데 한 대 맞으면 조용해질 거다.”

“그걸로 영감님을 죽일 셈이에요? 영원히 조용하게 만들 생각이잖아요!”

베로니카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치자 엔디미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율리아가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은 라이오넬이 버둥거리다가 서류의 탑을 쓰러트리면서 함께 무너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라이오넬의 몸을 힘으로 눌렀다. 그리고 억지로 바깥으로 끌고 나가면서 말했다.

“······나가서 마저 이야기하지.”

바깥으로 나오자 라이오넬도 진정이 됐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베로니카는 이 노망난 영감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노망이 난 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천둥검의 라이오넬이 노망이 났을 줄은 몰랐군. 같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나?”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가끔?”

율리아는 엔디미온 일행에 대한 신뢰도가 약간이지만 감소했다. 엔디미온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전수칙만 잘 지키면 안전한 친구요. 실력도 확실하고. 맡긴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서 어디로 갔다 오면 되겠소?”

“아, 그래. 그거 말인데 혹시 이곳 지리에 대해서 알고 있나?”

엔디미온은 대답하는 대신에 베로니카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그녀는 주인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이 친구가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크흠, 베로니카라고 했나? 혹시 여기서 동쪽으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옛 성터를 알고 있나?”

베로니카는 눈알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동쪽에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옛 성터. 금세 정보를 찾아냈다. 그곳은 백 년 전에는 악마들과 싸우기 위해 지어진 작은 요새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다 무너져서 성의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달리아 요새가 있었던 곳 말이지요? 알고 있어요.”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은 아가씨인가 보군. 어쨌든 그곳에 악마와 악귀들이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이 있다. 그곳에서 할리아로 오는 길손들을 잡아먹고 있다더군. 사람들을 잡아먹는 것도 큰일이지만 악마 때문에 할리아로 오는 상인들이 줄어드는 것도 큰일이야. 도시에 상인들이 들리지 않으면 결국 도시가 말라죽고 마니까.”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서 할리아에 찾아오는 상인들이 이상하게 줄어든 것 같다고 느꼈는데 그게 악마 때문이었다니. 엔디미온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말했다.

“그 악마만 죽이면 되는 거요?”

“그래. 이왕 하는 거 악귀들까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싹 다 죽이면 더 고맙겠고.”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내 의무요.”

율리아는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이 남자와 같았다면 악마들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임무에 한 번 나갈 때마다 성기사들의 숫자는 줄어드는데 성기사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없으니 철십자 기사수도회를 이끄는 입장에서 위장이 쥐어 짜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로 영웅의 탄생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길고 긴 싸움을 끝내주길 바랐다.

어쩌면 저 남자가 새로운 영웅이 될지도 모르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모르는 엔디미온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기한은 언제까지요? 출발은 언제 하면 되겠소?”

“기한은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겠나?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날도 저물 것 같은데 내일 출발하는 것이 어떤가? 우리 성기사들도 다른 임무 때문에 내일 출발하니까 말이야.”

“알겠소. 내일 출발하지. 그리고 기한 말인데.”

“왜? 일주일은 너무 촉박한가?”

“아니, 하루면 충분하오.”

율리아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이 남자의 자신감이 너무 대단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웃음은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남자였다.

“특별한 일 없으면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어떤가? 우리 성기사들은 임무 전날에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술을 잔뜩 마시거든. 왜냐하면 이제 다시는 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임무 전날에 술을 먹는다고? 그러다 다음 날 임무에 지장이 있으면 어쩌려고.”

“숙취도 이기지 못한 자가 어찌 악마를 이기겠나. 성기사들은 오직 위대하신 전능자만을 두려워할 뿐이야.”

엔디미온은 씩 웃었다.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그런 거라면 사양하지 않겠소.”

엔디미온 일행은 성기사들과 함께 여관으로 갔다.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여관은 성기사들이 임무를 떠나기 전에 진탕 먹고 마시는 것이 익숙한지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음식과 술을 내왔다. 엔디미온 일행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스튜와 빵, 훈연한 햄이 나오고 그 다음에 잘 익은 닭구이와 시큼한 요구르트 소스가 나왔다. 엔디미온은 손으로 닭을 찢어서 소스에 찍어 먹었다. 지나가는 여관 급사에게 술을 시켰다.

여관에는 주인이 직접 담은 아주 독한 술뿐이라고 했다. 엔디미온은 뭐가 됐든 얼른 들고 오라고 했다. 급사가 얼른 술 한 병을 들고 왔다. 뚜껑을 열고 잔에 따르니 달콤한 냄새가 났다. 한 잔 들이키자 목구멍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잔을 따랐을 때는 깔끔한 맛의 물로 변해있었다. 그가 가진 성배의 힘이 술을 멋대로 성수로 바꾸어 버린 탓이었다.

씨발, 술도 마음대로 못 마셔? 엔디미온은 다시 급사를 불러서 술 한 병을 시켰다. 그리고 새로 나온 술을 뚜껑을 열고 병째로 벌컥벌컥 마셨다. 목구멍에 불이 붙은 것 같았고 너무 급하게 마신 탓인지 기침이 나왔다. 하지만 성수로 변하기 전에 마실 수 있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입가에 흘린 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씩 웃었다. 그리고 다시 닭구이를 찢어서 한 입 크게 먹었다.

여관의 술은 아주 독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그걸 병째로 한 번에 다 마시는 모습을 본 성기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들 이미 취기가 올라있었고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쳤다. 엔디미온은 다시 술 한 병을 더 마셨다. 자꾸 술병을 비우다 보니 어느새 성기사들이 그의 근처로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엔디미온과 함께 술을 먹고 마시면서 웃고 떠들었다. 술이 들어가니 연병장에서 디고르를 무참히 박살냈던 모습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율리아가 특별히 주문한 돼지 통구이가 탁자 위에 올랐을 때, 엔디미온과 성기사들은 크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여관 안을 휘젓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취기 때문에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가 비운 술병이 열 개를 넘어갔다. 그래도 즐거웠다. 오늘이 마치 백 년 전의 그때 같았다. 전우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끝내고서 진탕 먹고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그때.

엔디미온은 세상이 도는 것인지 자기 머리가 돌아버린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세상이 돌았다. 빙글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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