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 *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물샌 자국이 있는 천장이었다. 얼룩덜룩한 천장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이만한 숙취는 오랜만이었다. 탁자 위에는 물을 담은 사발이 있었지만 거기까지 손을 뻗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통 때문에 한 번 몸을 휘청거렸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침대 위에서 사람 목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침대 쪽을 보았다. 율리아였다.
시선 때문인지 율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흰 얼굴과 잘 어울리는 우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어났나?”
엔디미온은 말없이 탁자로 걸어가서 사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성수가 그의 정신을 말짱하게 해주었다. 그는 탁자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가만히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율리아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손만 잡고 잤으니까.”
“어제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군. 우리 둘 다.”
“놀라울 정도로 잘 마시더군.”
엔디미온이 다시 침묵했다. 율리아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몸을 가렸다.
“멋있던데.”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하나씩 입었다. 그가 상의를 입는 것을 보면서 율리아도 몸을 일으켰다.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몸을 비추었다. 엔디미온은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렸다. 상의까지 다 입은 후에 손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는 그를 향해 율리아가 말했다.
“등의 그 그림 말이야.”
엔디미온이 몸을 멈칫거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멋있기는 하지. 그래서 탐을 내는 자들이 좀 있었소. 그랬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소.”
“어째서?”
“내 손에 다 죽었으니까.”
율리아는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하나씩 입기 시작했다. 엔디미온은 그녀가 옷을 입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잘 단련된 몸이었다. 몸 곳곳에 난 상처와 손에 있는 굳은살만 보아도 얼마나 열심히 악마와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대악마의 위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 시체를 정화하기 위해서 백 년의 시간을 썼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 악마와 싸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엔디미온, 당신을 보면 성배기사에 대한 전설이 떠올라.”
율리아는 옷을 다 입은 채로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더 희게 보였다.
“성배기사와 같은 이름, 악마를 죽이고 숙련된 성기사 하나를 간단히 제압할 정도의 힘, 그리고 등에 그려진 성배······.”
“성배기사는 백 년 전에 죽었소. 그 누구도 백 년을 넘게 살 수는 없소.”
엔디미온은 율리아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맞지. 어쩌면 난 너무 지쳤을지도 모르겠군. 이 길고 긴 싸움에 말이야. 그래서 영웅의 출현을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사람들에게는 영웅이 있어야 한다. 백 년 전의 왕이 했던 말이었다. 엔디미온은 그 말대로 영웅이 되었다.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빌리고 수많은 악마들을 학살하며 종국에는 대악마의 목까지 떨어트렸다.
그는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영웅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소. 진짜 중요한 것은 저항의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오. 바로 당신처럼.”
엔디미온은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먼저 가보겠소.”
문을 열고 나오니 무장을 한 성기사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정말 숙취를 모르는 것처럼 멀쩡한 얼굴이었다. 엔디미온은 감탄했다. 똑같이 술을 마셨는데 성배기사인 그조차도 숙취로부터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반 성기사들이 멀쩡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율리아가 했던 말대로 그들은 오직 전능자만을 두려워할 뿐인 듯 했다.
엔디미온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급사에게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이미 식사를 다 끝내고 출발만을 기다리고 있던 성기사들은 여전히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그 시선이 신경이 쓰여서 고개를 들고 그들을 마주 보았다.
한숨과 함께 나직이 말했다.
“눈 깔아.”
성기사들이 킬킬 웃었다. 엔디미온은 그들을 무시했다. 때마침 식사가 나와서 고개를 숙인 채로 식사에 집중했다. 빵 하나, 스튜 한 그릇, 소시지 하나. 맛은 괜찮았다. 식사를 다 끝냈을 쯤에 문이 열리고 수척한 얼굴의 베로니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엔디미온의 곁으로 걸어왔다. 탁자에 털썩 고개를 처박는 그녀를 보면서 엔디미온은 급사에게 물 한 잔을 주문했다. 금세 미지근한 물이 나왔다. 그는 잔을 잠깐 잡고 있다가 베로니카에게 주었다.
“······으, 이거 마시라고요? 꿀물인가요?”
“아니.”
“그냥 물이에요?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물도 마시면 토할 것 같아요.”
“성수니까 마셔.”
성수라고? 베로니카는 그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물이 아주 달았다. 설탕의 단맛과는 달랐다. 그냥 물인데도 이상하게 달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청량감이 있었다. 정말 보통 물이 아닌 듯 했다. 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니 숙취가 씻은 듯 사라졌다. 베로니카가 눈을 크게 떴다.
“엔디미온 씨!”
“왜.”
“이걸로 장사를 하면 어떨까요? 금화 백 개는 그냥 벌 것 같은데!”
“성배의 힘은 그딴 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니야. 라이오넬은?”
베로니카는 시무룩해졌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화장실 가셨어요. 금방 오실 걸요?”
“라이오넬 오면 바로 출발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오넬이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냄새로 사람을 찾는 것처럼 코를 몇 번 킁킁거리더니 곧장 엔디미온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숙취 때문에 괴로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탁자 위에 동전 몇 개를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행들과 함께 여관 바깥으로 나갔다.
말은 어제 신전에 매어두었다가 여관으로 갈 때 다시 마구간에 맡겨두었다. 그들은 말을 찾아서 할리아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안내를 받아서 옛 성터까지 달렸다. 반나절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쉬지 않고 달리니 그것보다는 빨리 도착할 듯 했다.
옛 성터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할리아는 머리 위로 해가 쨍쨍했고 지금은 정오이니 사방이 환해야 하는데 짙게 낀 회색 구름 때문에 새벽처럼 어스름했다. 베로니카는 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스산한 느낌이 드는 것이 정말 악마의 소굴에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겁을 집어먹지 않도록 주의했다. 악마는 상대가 겁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 강해진다고 하니까.
애초에 겁을 먹을 것도 없었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을 이길 수 있는 악마는 없으니까.
“저기가 비달리아 요새가 있던 곳이에요. 지금은 다 무너져서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지만요.”
엔디미온은 베로니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한때 요새였던 곳은 이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쥐새끼들이 숨어살기에 딱 알맞았다.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렸다. 일부러 좀 옛 성터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말을 매었다. 괜히 악귀들 따위가 말을 탐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십 분 정도 걸었고 드디어 성터에 도착했다. 감각이 민감한 라이오넬이 일찍부터 검을 뽑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몸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이곳이 심상치 않은 곳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이번에도 엔디미온이었다. 마법사인 베로니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녀가 바로 뒤에 서고 라이오넬이 제일 뒤에 섰다. 영웅들이 든든하게 자신을 지켜준다는 기분이 꽤 나쁘지 않았다.
성터 안을 한참 걸어도 무언가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바람이 좀 쌀쌀했고 기분이 좀 나빴을 뿐이었다. 라이오넬조차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성터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진다고 생각했다. 이곳만 날이 흐리고 안개가 꼈다는 것은 악마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는 뜻이었다. 그는 조용히 길을 걷다가 안개 너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주먹을 꽉 쥐는 순간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악귀들이 절 죽이려고 해요!”
머리가 산발이 되고 곳곳에서 피를 흘리는 여자가 안개를 뚫고 뛰쳐나왔다. 그녀는 곧장 엔디미온에게 달려왔다. 정말 다급한 얼굴이라서 베로니카가 얼른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악귀들이 쫓아오고 있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엔디미온은 울면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안는 듯하다가 그대로 벽에 머리를 처박게 했다. 단단한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걸쭉한 액체들이 주르륵 쏟아졌다. 베로니카는 자기 입을 손으로 막으며 헉 소리를 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더 남아있었다.
벽에 부딪혀서 머리가 깨진 여자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그대로 엔디미온을 향해서 다시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은 반쪽만 남은 머리를 붙잡고 다시 한 번 벽에 처박게 했다. 충격으로 스르르 무너지려는 몸을 붙잡아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발로 머리를 완전히 으깨버렸다.
시체는 몸을 잘게 떨다가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 순간 안개 너머에서 수많은 악귀들의 소리가 났다. 그들은 모두 기괴하게 흔들면서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왔다. 특이한 점은 그들 모두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악귀들은 인간과 모습이 달랐다. 그들은 대부분 구역질나고 역겨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악마는 좀 개 같은 걸.”
엔디미온은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싸울 준비를 했다. 저런 저급한 것들을 상대로 검을 뽑을 것까지는 없었다. 애초에 저건 악귀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본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었으나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인형이 돼버린 불쌍한 자들이었다.
베로니카는 상황을 알아채고서 얼른 주문을 외웠다. 악귀들은 그녀의 주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 번의 마법이 그들 몇 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몇 마리가 덤벼도 결코 베로니카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엔디미온의 단단한 주먹이 그들의 골통을 부쉈고 라이오넬의 검이 목을 잘랐다. 두 사람은 열 명도 넘는 악귀들을 상대하면서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악귀들을 막아주는 사이에 주문을 다 외운 베로니카가 하늘에서 번개를 떨어트렸다. 악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다가 검게 타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베로니카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만하면 금화 두 개만큼의 활약이 아니냐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안개 너머로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어, 좀 많은 것 같은데요.”
엔디미온은 무심하게 답했다.
“백 년 전에는 한 번 싸우면 저 정도 숫자가 기본이었어.”
“그놈의 백 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