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베로니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엔디미온은 그녀를 보호하듯 뒤로 밀어낸 후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악귀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라이오넬이 다가온 악귀 두 마리를 한꺼번에 베는 것을 신호 삼아서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엔디미온은 단단한 주먹으로 악귀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오른쪽 주먹이 먼저 날아가면 그 뒤를 이어서 왼쪽 주먹이 다른 악귀의 머리를 공격했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엔디미온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악귀들을 공격을 날렵하게 피하면서 쉬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시체에 사술을 부려서 만들어진 악귀들은 그 수준이 아주 저급해서 힘들이지 않고 머리를 부술 수 있었다.
결코 인간답지 않은 도약력으로 뛰어드는 악귀 한 마리의 얼굴을 붙잡은 엔디미온은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악귀는 그 상태에서 엔디미온의 다리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발차기를 맞고 바닥을 굴렀다. 다른 악귀가 길쭉한 손톱을 휘두르면서 덤벼들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이 손목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뼈가 박살나서 기괴한 얼굴이 된 악귀의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악귀의 다리 하나를 손으로 붙잡고 발로는 악귀의 가슴을 눌렀다. 힘껏 잡아당기자 찐득한 액체와 함께 다리가 뽑혔다.
엔디미온은 악귀에게서 뽑은 다리를 무기처럼 사용했다. 현란하게 휘두르면서 겁도 없이 덤벼드는 악귀들을 박살냈다. 아무리 저급한 악귀라고 해도 그 육체는 인간의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튼튼했다. 성배기사가 휘두르는 악귀의 다리는 마치 성검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악귀들은 엔디미온에게 덤벼봤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격렬하게 덤벼들었다.
한참 악귀의 다리를 휘두르다보니 엔디미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뚝 부러져버렸다. 그는 망설임없이 부러진 다리를 악귀들을 향해 던지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머리를 부수고, 목을 부러뜨리고, 가슴뼈를 박살내고, 어깨를 뽑아버리고, 온갖 방법으로 악귀들을 학살하던 엔디미온은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직감에 따라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천둥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벼락이 칠 때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진짜 천둥번개를 부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번개가 떨어지자 악귀들 열댓 마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라이오넬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한참 검을 휘두르다가 갑자기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뭐야? 다 어디 갔어?”
엔디미온은 쓰러져 있는 악귀들의 옷으로 주먹에 묻은 오물들을 훔쳤다. 그리고 라이오넬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다 끝났어.”
“흐음, 이 천둥검의 라이오넬이 무서워서 다 도망간 모양이군.”
엔디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강력한 마법을 두 번이나 사용해서 안색이 나빠진 베로니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건 금화 두 개만큼의 활약이군.”
“진짜요?”
“그런데 쉽게 지치는군. 백 년 전 마법사들은······.”
“아니, 진짜! 그만해요!”
베로니카가 성을 내서 엔디미온도 입을 다물었다. 거 목청 한 번 크네.
“이게 전부 다 할리아로 가려던 사람들이었을까요?”
베로니카는 죽은 악귀들을 향해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 뒤에 말했다.
“대충 보기에도 수십 명은 되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악마를 토벌하지 않은 걸 보면 철십자 기사수도회도 인력이 많이 부족한가 봐요.”
“다른 도시도 인력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군. 이만한 해악을 끼치는 악마가 있으면 다른 도시의 기사수도회가 지원을 올 법도 한데.”
“다들 자기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모양이군요. 하긴 성기사들이 부족하다니까. 악마사냥꾼들은 대부분 안전한 일만 맡으려고 하고.”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었다가 악귀들의 시체를 한 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는데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서 묵묵히 시체들을 모았다. 떨어져 나간 다리, 바닥을 구르는 뭉개진 머리, 뽑혀나가서 짓뭉개진 눈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베로니카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불 좀 붙여 봐.”
“어, 혹시 이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서인가요?”
“아니. 악마 새끼가 또 수작질을 하면 귀찮으니까.”
베로니카는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조용히 주문을 외워서 시체들에 불을 붙였다. 시체들을 잘 탔다. 마른 땔감처럼. 악귀들은 대개 그랬다. 살아있을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죽으면 땔감 대신 쓸 수 있었다. 그들은 죽어야만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좋은 곳 가쇼.”
라이오넬이 두 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간단한 애도가 끝난 후에 세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베로니카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져서 이제는 서로 딱 붙어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 다르게 엔디미온의 눈은 안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라이오넬은 본래 장님이었다. 민감한 감각 덕분에 불어오는 바람과 냄새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베로니카는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두 사람과 떨어지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법사였지만 엔디미온이 말하는 백 년 전의 마법사들과는 달랐다. 혼자서 악귀 몇 마리는 상대할 수 있어도 수십 마리는 불가능했다. 악마는 물론 이길 수 없었다.
“얼추 중앙에 도착한 것 같은데.”
엔디미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잘은 모르지만 이곳이 성터의 중심부인 것 같은데 악마는 물론이고 악귀조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안개가 이만큼 짙게 껴있는 것을 보면 아직 악마가 근처에 있다는 뜻인데 어디에 숨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배기사가 왔다는 것을 알고 안개만 남겨두고 도망친 것일까. 엔디미온은 손으로 안개를 휘저었다.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엔디미온 씨······.”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한 쪽 눈썹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왜?”
“좀 춥지 않아요? 나만 추운가? 아니, 이건 추운 것보다는 기분이 좀 이상한데······.”
엔디미온은 베로니카를 쳐다보았다.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하늘이 흐리고 안개가 짙게 껴서 햇살이 들어오지 않기에 할리아보다 기온이 떨어진 것은 맞았다. 하지만 추워서 몸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그건 방한성이 있었다. 겨우 이런 추위도 막아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라이오넬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멀쩡했다.
다시 한 번 손으로 안개를 휘저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했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다가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배기사인 그는 쉽게 지치지 않았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는데 몸의 이상을 느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오넬.”
“음, 이 안개 영 기분이 나쁘군.”
라이오넬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기분 나쁜 안개 말고는. 그 사이에 베로니카는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엔디미온은 어쩔 수 없이 허리춤의 수통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수통을 받아든 베로니카가 물을 한 모금 마시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이건 보통 안개가 아닌 모양이야.”
“내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두 영웅의 생각이 일치했다. 베로니카는 아직도 약간 몸을 떨면서 말했다.
“서, 서, 설마 이게 악마의 능력인 게 아닐까요? 아르할리나가 불꽃을 부렸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이번 악마는 우리를 안개로 서서히 죽일 생각인 모양이야.”
그딴 게 통할 리가 없지. 엔디미온은 코웃음을 치면서 검을 뽑았다. 악마가 여기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힘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다시 수통을 돌려주려는 베로니카의 손을 제지했다.
“그냥 들고 있어. 내 힘이 담긴 물이니까 몸이 떨릴 때마다 마시면 효과가 있을 거다. 넌 무리할 거 없어. 죽지만 마라.”
“엔디미온 씨······. 절 걱정해주다니 감동이에요.”
“아직 금화 구십칠 개가 남았잖아. 그 전에 죽으면 안 되지.”
그래, 날 걱정할 리가 없지.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 악마의 기척이 느껴지나?”
“글쎄······.”
“설마 이 안개가 악마 그 자체라는 소리는 안 하겠지.”
“그건 아닐세. 세상에 그런 악마는 없어. 아주 꽁꽁 숨은 모양이야. 하지만 결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겠지. 우리에게 이 안개는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일세.”
“그럼 일단 저 성가신 놈들부터 처리하면 되겠군.”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보았다. 그들이 검을 겨누고 있는 방향에는 악귀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체에 사술을 부려서 만든 저급한 것들이 아니라 태생부터 악귀인 놈들이었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저들이 끝이란 보장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율리아가 이곳에 성기사들을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악마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고 성가셨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악귀들을 상대하다가 모두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가 그들의 시체를 가지고 악귀를 만들었다면 오히려 할리아에 더 큰 위협이 됐으리라.
악귀들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림자처럼 새까만 몸을 가진 악귀들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이목구비가 없었고 그냥 온통 새까만 색일 뿐이었다. 엔디미온은 저런 걸 검으로 죽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백 년 전에는 없던 악귀였다. 시간이 흐른 만큼 새로운 악귀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악귀들은 처음에는 거리를 재는 듯하다가 금세 본성을 드러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입도 없는데 시끄러운 소리를 질렀다. 엔디미온은 자세를 낮추고 뛰었다. 그리고 검을 들고 크게 휘둘렀다. 악귀 한 마리의 목이 떨어졌다. 그러나 목이 없는데도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러서 가슴을 크게 베었다. 악귀가 소리를 질렀다.
“으어어어!”
입구멍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 소리를 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악귀들이 지르는 소리에 반응하듯이 라이오넬이 천둥소리와 함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천둥소리와 질리도록 들은 자기소개, 그리고 알아먹지 못할 고함소리까지.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씨발, 조용히 좀 싸울 수는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