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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20화 (2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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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우습게 봤구나, 성배기사야! 얌전히 나와 거래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오르탈라는 고함을 치면서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엔디미온도 얼른 바닥에서 일어나 방어 자세를 잡았다. 오르탈라가 다리를 쩍 벌려서 발뒤꿈치로 머리를 내려찍으려고 했다. 두 손목을 교차해서 공격을 막아냈지만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충격이 느껴졌다.

거대한 덩치와 악마의 강력한 힘이 합쳐진 공격은 묵직하게 엔디미온의 몸을 때렸다. 덩치에 맞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는 오르탈라는 발차기를 날려서 엔디미온을 밀어낸 후에 다시 바닥을 박차고 뛰어서 깍지 낀 두 손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저런 공격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막으려면 막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엔디미온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르탈라의 주먹이 바닥을 때렸고 그 충격으로 땅이 흔들렸다. 박살난 바닥에서 돌조각들이 튀었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반격할 순서였다. 큰 동작에는 큰 허점이 생긴다는 사실을 성배기사는 오랜 전투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서 강철 같은 주먹을 오르탈라의 배에 꽂으려고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른 다리를 내려다보자 그림자 같은 것이 바닥에서 솟아서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씹. 엔디미온은 억지로 그림자를 끊어내면서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이미 오르탈라의 발차기가 얼굴을 때린 후였다.

“어떠냐, 성배기사야! 이제 네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겠느냐! 나는 그림자의 악마이자 무자비한 처형자 오르탈라다!”

발차기를 맞고 날아간 엔디미온은 낡은 벽에 부딪혔다. 이미 상태가 나빴던 벽은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엔디미온은 몸을 짓누르는 돌덩이들을 손으로 밀어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다시 일으켰다. 일반적인 성기사였다면 벌써 숨이 끊어졌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성기사가 아니라 성배기사였고 이런 공격에 목숨이 끊어질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오르탈라는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다시 일어나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이를 갈았다. 지긋지긋한 놈. 그는 손을 움직여서 그림자를 조종했다. 소리도 없이 엔디미온의 발 아래로 이동한 그림자가 땅에서 솟아올라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손으로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자 그림자가 엔디미온의 다리를 붙잡고 오르탈라 쪽으로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다리를 확 당기는 감각에 엔디미온은 몸을 휘청거렸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오르탈라는 악마다운 강력한 신체 능력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비틀거리는 엔디미온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악마의 단단한 주먹은 쉬지 않고 성배기사의 얼굴을 때렸다.

엔디미온은 방어를 할 생각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아까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한참 주먹을 날리던 오르탈라가 왼쪽 발을 단단히 바닥에 디디었다. 그리고 몸을 회전시키면서 오른쪽 다리로 힘껏 엔디미온을 걷어찼다. 몸을 때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간 일격이었다. 아무리 성배기사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발차기를 맞고 날아간 엔디미온의 몸은 벽 몇 개를 부수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오르탈라는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성배기사의 명성이 두려워서 겁을 냈지만 싸우다 보니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엔디미온은 백 년 전의 그 강력한 힘을 전부 낼 수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백 년 전보다 약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르탈라는 증오스러운 성배기사를 끝장내기 위해서 안개와 먼지구름을 손으로 걷어냈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주먹을 쥐었다. 벽이 무너져서 생긴 돌더미가 보였다. 저 안에 엔디미온이 있었다. 돌 따위는 가볍게 부술 수 있으니 주먹으로 돌과 함께 엔디미온의 머리통을 부술 생각이었다. 오르탈라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투두둑 하면서 돌더미의 가장 위에 있던 돌멩이가 굴러떨어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돌더미가 들썩거리면서 돌멩이들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르탈라의 안광이 더 새빨간 색으로 빛났다. 그는 지금 멍청하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들어올린 주먹을 돌더미를 향해서 힘껏 내질렀다.

“이게 끝이냐?”

돌더미를 날리면서 불쑥 뛰쳐나온 손이 오르탈라의 주먹을 붙잡았다. 손의 크기가 두 배나 나는데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르탈라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돌더미를 떨쳐내고 일어난 성배기사는 바다와 같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지. 치려면 제대로 쳐야지.”

엔디미온이 숨을 한 번 들이삼키는 듯하더니 어깨에 힘을 딱 주었다. 힘은 곧 손까지 전달됐고 그는 오르탈라의 주먹을 밀어냈다. 악마는 어어 하면서 몸을 휘청거렸다. 그 순간 빛이 번쩍이듯 직선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크어어억!”

주먹이 배를 때리는 순간 오르탈라는 참지 못하고 신물을 뱉어냈다. 그는 목구멍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꿈틀거리는 목구멍은 쉬지 않고 신물을 입까지 올려보냈다. 그는 바닥에 더러운 오물들을 쏟아낸 후에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다가 갑자기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오르탈라는 얼른 방어 자세를 잡으려고 했지만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한 번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바위를 디딤돌 삼아서 뛰어오른 엔디미온의 발차기가 얼굴에 직격했다. 고개가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부러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 오르탈라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다. 몸이 휘청거리는 듯하더니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크으으윽. 아직이다, 아직이야······.”

오르탈라는 손을 버르적대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얼굴을 때리는 발차기에 얻어맞고 다시 뒤통수를 바닥에 붙였다. 자기 몸 위에 선 엔디미온을 보니 미약하게나마 후광 같은 것이 비추는 듯 했다. 그 빛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눈을 똑바로 떴을 때는 엔디미온이 바닥에서 주운 날카로운 돌조각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르탈라의 눈을 찔렀다. 눈이 박살나고 검은색 연기 같은 것이 몸에서 새어나갔다. 악마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것을 단단히 붙잡아서 힘으로 부러트렸다. 오른쪽 손목이 부러져서 너덜거렸다.

다시 한 번 돌조각이 오르탈라의 얼굴을 찍었다. 이제는 도망쳐야 했다. 살기 위해서라도. 오르탈라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이 검은색 연기로 변해서 사라졌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들었고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키며 망치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났다.

“이 괴물 같은 놈······.”

오르탈라는 엔디미온의 등 뒤에서 기습을 하려다가 주먹에 맞고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엔디미온이 웃었다.

“날 너무 우습게 봤는데.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리가 없잖아.”

“흐흐흐. 강하구나. 하지만 백 년 전의 명성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실력이다. 나는 그림자의 악마이자 무자비한 처형자 오르탈라. 오늘 여기서 너를 죽이고 성배의 힘을······.”

엔디미온은 길게 이어지는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끝이 날카로운 돌조각이 들려있었고 어깨의 힘을 이용해서 그것을 빠르게 내던졌다. 벼락처럼 날아간 돌조각이 오르탈라의 몸을 관통했다. 점차 몸이 옅어지면서 안개와 같아지고 있던 악마는 입에서 초록색 액체를 한 움큼 뱉어냈다.

“커헉······.”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를 손으로 움켜쥐고서 괴로워하는 오르탈라에게 엔디미온이 말했다.

“내가 바보냐고. 같은 수법에 또 당하게. 안개로 변해서 도망치려고 했지?”

오르탈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연신 컥컥 소리를 내면서 숨을 헐떡였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라도 심장을 다치면 무사할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여유롭게 검이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검을 잡고서 다시 돌아왔다. 검이 날카롭게 빛났다.

성배기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들어올린 검이 반달 모양을 그렸다. 툭 하고 떨어진 것은 오르탈라의 머리였다.

“널 죽인 이유는 하나다. 사람들을 잡아먹어서도 아니고 시체들을 함부로 부려서도 아니야.”

엔디미온은 차갑게 내뱉었다.

“그게 내 의무이기 때문이다.”

오르탈라가 죽고 나니 안개가 서서히 옅어졌다. 잠시 뒤에는 안개가 모두 사라졌고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몸을 덜덜 떨던 베로니카가 어 하고 소리를 냈다. 몸이 갑자기 따뜻해졌다. 그녀는 마지막 악귀의 목을 치는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엔디미온 씨, 괜찮아요?”

베로니카는 엔디미온이 다친 모습을 보고서 수통을 건넸다. 아직 성수가 한 모금 정도 남아있었다. 엔디미온은 수통의 뚜껑을 열어서 남은 성수를 모두 마신 후에 말했다.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엔디미온 씨는 말투가 너무 퉁명스러운 거 알아요? 좀 더 친절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요? 이런 걸 보면 영웅도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네요. 완벽하지 않고 흠결이 있으니까.”

“옛날에는 나도 친절했어.”

“진짜요? 혹시 백 년 전에? 에이, 거짓말 같은데.”

“라이오넬에게 물어보던지. 제정신 돌아오면 말이야.”

베로니카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다 검을 휘두르면서 열렬히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라이오넬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기회가 올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옛날에는 친절했다면 지금은 왜 그래요? 혹시 대악마랑 싸우다가 머리를 다쳐서 성격에 변화가 생겼나요?”

엔디미온이 웃었다. 이게 요즘 좀 같이 다녔다고 말 함부로 하네. 그는 말을 툭 내뱉었다.

“백 년 동안 호밀밭에서 호밀하고만 이야기하면서 지내면 누구라도 돌아버릴걸. 내가 장담하지. 성녀가 백 년 만에 마녀로 변해도 난 이해할 수 있어.”

“호밀밭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런 게 있어.”

엔디미온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조금 있으면 노을이 질 것 같았고 지금부터 말을 타고 달려도 중간에 해가 질 것 같았다. 밤에도 달릴 수는 있지만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여기서 하루를 보내고 할리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악귀들을 한데 모은 후에 베로니카에게 불을 붙이라고 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게 저녁 식사하고 바로 자.”

“엑, 여기서요?”

“난 말 데리고 올 테니까 불 붙여둬. 라이오넬도 잘 지켜보고.”

“빨리 돌아오세요. 영감님이 진짜 돌아버려서 절 공격할지도 모르니까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야.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데리러 떠났다. 말들은 성터 안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한가롭게 휴식하고 있었다. 그는 말 세 마리의 고삐를 한꺼번에 잡고 성터 안으로 돌아갔다. 베로니카는 시킨 대로 시체들에 불을 붙여두었다. 라이오넬도 진정이 됐는지 얌전히 있었다.

엔디미온은 가방을 뒤져서 식량을 찾아냈다. 아직 마을에서 가져온 식량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셋이서 나누어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별이 밝았다. 타오르는 시체들의 불꽃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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