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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21화 (2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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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었다. 달과 별들이 모습을 감추고 하늘에서 햇살이 어렴풋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그는 백 년 동안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농사란 것은 부지런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물을 뿌리며 호밀밭을 가꾸었던 그의 몸은 아침이 되면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여명과 아침의 중간 지점, 수많은 악귀가 죽어있는 음침한 성터, 자꾸만 옛 기억이 떠오르게 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성배기사는 동이 트고 있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의무를 상기했다.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는 오늘도 살아가야 했다. 의무를 위해서.

“아침이야. 일어나.”

엔디미온은 아직 잠에 빠져있는 두 사람을 깨웠다. 라이오넬은 바로 일어났고 베로니카는 몸을 뒤척이다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눈 아래에는 아직 잠이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아침에 약한 모양이었지만 엔디미온이 그녀를 신경 써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반쯤 졸고 있는 베로니카의 입에 말린 고기를 물려주고 자기도 한 조각을 먹었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입만 우물거렸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엔디미온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악귀들의 시체들은 땔감이라는 역할을 몹시 충실하게 수행했다. 간밤에 타오르고 남은 재와 불씨 약간만이 그들이 한때 이 세상에 있었다는 증거였다. 엔디미온은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모래를 뿌려서 남은 불씨를 모두 꺼버렸다.

이제 다시 할리아로 돌아갈 때였다. 엔디미온은 오르탈라의 머리를 챙겨서 말에 올라탔다. 다른 두 사람도 얼른 말 위에 올라타서 그의 뒤를 따랐다. 말이 힘차게 바닥을 찼다. 돌바닥과 말굽이 부딪혀서 따각닥따각닥하는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간격이 길었다가 금세 짧아졌다. 어느새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해가 따사롭게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세상이 황금빛이었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네.”

할리아의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것은 경비병 알디였다. 그는 엔디미온에게도 알은체를 했다. 이방인이 강철 주먹의 번스타인을 혼내주었다는 이야기가 할리아 내에서 연신 화제라고 했다. 누가 떠들고 다닌 거야. 엔디미온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면서 성문을 통과했다. 알디가 보자기 안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것까지 가르쳐주면 또 악마를 죽였다는 소문 때문에 귀찮아질 것 같았다.

한 번 왔던 길이라고 신전까지 가는 길이 낯설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말에서 내려 신전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 고삐를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성기사들의 출정 때문에 조용해진 신전 안을 걸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견습 신관과 또 마주쳤다.

“앗! 디르고 경을 때려눕힌 아저씨다!”

아저씨?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나 보고 한 말이냐?”

베로니카가 뒤에서 푸흐흡 하고 웃었다. 견습 신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엔디미온.”

“엔디미온님, 무슨 일로 신전에 찾아오셨어요?”

“포상금 때문에.”

“엇! 혹시 악마를 잡으셨어요? 그럼 그 보자기 안에 든 건 악마의 머리인가요? 보여주시면 안 돼요? 제발요!”

아이다운 호기심에 엔디미온은 웃으며 말했다.

“안 돼. 이걸 보면 오늘 밤은 엄마랑 같이 자야 할 거다. 아주 무섭게 생겼거든.”

“······그럼 안 되겠네요. 전 엄마가 없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신전에서 자랐어요.”

엔디미온은 잠깐 침묵했다가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미안하다, 꼬마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괜찮아요. 포상금 때문에 오신 거라면 율리아 경에게 가보세요.”

엔디미온은 당연히 율리아도 성기사들과 함께 출정을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신전 안에 있다는 말에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그는 견습 신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서 율리아의 집무실로 갔다.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하루 사이에 더 늘어난 것 같은 서류들이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서류들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베로니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율리아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서류와 눈씨름을 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자리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엔디미온인가.”

율리아가 고개를 들면서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녀는 한층 더 창백해진 얼굴로 웃었다.

“난 철십자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여명교단 할리아 교구의 교구장이야. 내가 자리를 비우면 신전의 업무를 처리할 사람이 없어. 내가 나서야 할 만큼 강한 악마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신전을 지키고 있지.”

“고생이 많군.”

엔디미온은 바닥에 보자기로 싼 오르탈라의 머리를 내려두었다.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누르고 있던 율리아가 물었다.

“그게 뭐지?”

“당신이 했어야 할 고생.”

율리아는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대단하군. 정말 하루 만에 악마를 죽이고 돌아온 건가? 그것도 겨우 셋이서? 여명교단의 이름난 성기사들도 깜짝 놀라겠어.”

“감탄은 됐소. 그것보다 난 내가 죽인 악마들의 값부터 받았으면 하는데.”

“아, 그래. 잠시만.”

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반짝이는 열쇠 하나를 꺼내들고서 책상 왼쪽에 있는 금고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금화들이 질서정연하게 줄 세워져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백 개는 넘어 보이는 양이었다. 베로니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중얼거렸다. 금화 백 개, 금화 백 개······.

“본래 악마 한 마리에 금화 열 개씩이야. 그런데 두 마리를 죽였고 값을 두 배로 쳐주기로 했으니 마흔 개가 되겠군.”

금화 마흔 개면 한동안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율리아는 가죽주머니에 금화 마흔 개를 담아서 엔디미온에게 주었다. 그녀는 번스타인과 다르게 깔끔하게 거래를 끝마쳤다. 엔디미온은 괜히 수작질을 했다가 금화 백 개만 잃은 번스타인을 떠올렸다. 불쌍한 놈. 상대를 잘 봐가면서 수작을 부렸어야지.

“주머니가 두둑해졌군. 성기사들이 돌아오면 성터에 사람을 보내야 할 거요. 악귀들이 아주 많이 죽어 있거든. 그리고 악마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땅이 오염된다는 것 정도는 당신도 알겠지.”

“고맙다, 엔디미온. 덕분에 할리아가 한층 더 안전해졌어.”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내 의무였을 뿐이오.”

율리아가 웃었다. 그녀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성기사가 될 생각은 없나? 당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분명 여명교단의 본청에서 일할 수 있을 거다. 악마를 죽이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면 그들을 죽이고 부와 명성을 함께 얻는 쪽이 낫지 않겠나?”

“일없소. 여명교단과 나는 같은 쪽을 보고 있지만 그게 꼭 함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오.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고 여명교단에게는 그들의 길이 있는 거요.”

성기사가 되라는 말은 그냥 해본 소리였는지 율리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엔디미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살결이 아주 희었다.

“당신에게 큰 도움을 받았어.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말하지. 보아하니 할리아에 더 머물 것 같지는 않은데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어.”

엔디미온은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별말씀을. 나 역시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다면 기쁘겠소.”

인사는 거기서 끝이었다. 율리아는 자리로 돌아갔고 엔디미온도 뒤로 돌아서 문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사무적으로 서로를 대했다. 마치 조금의 인연도 없었던 것처럼. 베로니카가 조그만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그들은 처음의 병사에게 말고삐를 넘겨받은 후에 길을 걸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세요?”

“이 근처에 혹시 대장간 있나?”

길거리를 걸으면서 엔디미온은 아까 받은 금화 주머니에서 몇 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금화를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했다. 금화 서너 개가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면서 사방으로 빛을 반사했다. 번쩍번쩍거리면서 공중에서 춤추는 금화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엔디미온의 금화를 탐내지 못했다. 그들은 강철 주먹의 번스타인이 누구에게 혼쭐이 났는지 알고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 금발, 바다와 같은 푸른 눈, 그리고 이방인. 그런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그들은 엔디미온을 본 적이 없지만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보았다.

“대장간이요? 왜요? 무기가 상했나요?”

“그런 것도 있고. 갑옷도 하나 구할까 해서.”

“갑옷요? 엔디미온 씨는 그런 거 없어도 괜찮지 않아요? 보니까 악마한테 맞아도 멀쩡하던데.”

엔디미온은 마을을 나올 때 촌장에게 무기를 받기는 했지만 방어구는 받지 않았다. 그는 검 한 자루만 들고서 두 마리의 악마와 싸웠다. 그는 자잘한 상처 외에는 입지 않았고 그마저도 성수로 모두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게 갑옷을 입지 않아도 될 이유는 아니었다.

할리아에서 만난 악마들은 모두 약한 축에 들었다. 세상에는 대악마만큼 강하지는 않아도 엔디미온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악마들이 많았다. 더욱이 백 년 전보다 힘이 약해진 그였기에 갑옷은 있어야 했다. 그게 악마의 공격 한 방에 넝마가 된다고 해도 어쨌거나 공격 한 번은 막아주지 않겠는가.

“잔말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대장간이 있냐고.”

“아, 이만한 도시에 대장간이 없겠어요? 가요, 제가 안내할게요.”

“혹시나 해서 묻는데 농기구나 만드는 그런 대장간은 아니겠지?”

“그런 걸 전문으로 하는 대장간도 있지만 제가 안내하는 곳은 진짜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 곳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베로니카.”

“왜요?”

엔디미온은 손가락으로 금화를 튕겼다. 빙그르르 회전하면서 날아간 금화 하나를 엉겁결에 잡아챈 베로니카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엥? 이거 저 주는 건가요?”

“그래. 길안내 해주는 값이야.”

“······길안내 해주는데 금화를 준다고요? 갑자기 좀 수상하네요.”

“뭐라는 거야. 받기 싫으면 내놔.”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베로니카가 히히 웃으며 금화를 주머니 안에 숨겼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라이오넬을 향해 물었다.

“너도 가서 무기 점검해라.”

“으음, 한 번 칼날을 갈 때가 되긴 했지.”

라이오넬의 검집은 아주 낡아보였다. 설마 백 년 전에 쓰던 검을 아직까지 쓰고 있는 걸까. 그의 검은 이름난 난쟁이 장인들이 몇 개월 동안 타오르는 햇빛으로 달구고 신성한 달빛으로 두들겨 만들어낸 역작이었다. 명검 중의 명검이었으니 백 년 동안 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엔디미온은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베로니카의 뒤통수를 보며 말했다.

“가는데 얼마나 걸려?”

“한 오 분? 거의 다 왔어요.”

그 말대로 대장간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엔디미온 일행은 한 건물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기와 쇠를 때리는 소리,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에 이곳이 대장간이란 것을 알았다. 성큼 안으로 들어간 엔디미온은 땀을 뻘뻘 흘리며 칼날을 벼리고 있는 청년과 그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일에 열중했다. 엔디미온은 그 모습이 진짜 장인 같아서 말도 걸지 않고 그냥 두었다. 대장장이들이 엔디미온을 발견한 것은 청년이 망치질을 잘못해서 노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후였다. 딱 소리가 나게 청년의 뒤통수를 때린 노인은 대장간 안에 있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헉 소리를 냈다. 누가 들어온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씨부럴, 거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좀 내지.”

“말 걸었다가는 나도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청년이 웃다가 괜히 한 대 더 얻어맞았다. 노인은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훔친 뒤에 입을 오므려 쓰레기통에 침을 뱉었다.

“덩치 한 번 더럽게 크군. 용병일 하는 사람이쇼? 젊은 사람이 이왕이면 다른 일 하지 그래. 사람 죽인 돈으로 먹는 빵은 영 맛이 없거든.”

엔디미온은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충 지껄였다.

“아니,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 하는 사람이오.”

그 말에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엔디미온이 한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었군.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말해보쇼. 싸게 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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