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무래도 이 노인은 악마사냥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기사들은 오직 기사수도회의 명령이 있을 때만 움직이지만 악마사냥꾼들은 대가만 지불한다면 기꺼이 악마들을 죽였다. 복잡한 규율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있는 성기사들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는 악마사냥꾼들이 더 도움이 될 때가 때때로 있었다.
엔디미온은 성기사와 악마사냥꾼, 둘 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명이서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악마는 악마사냥꾼들이 처치하고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하는 강력한 악마는 조직력이 강한 성기사들이 전담하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야 했다. 그래야 악마의 위협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백 년 전에도 그랬다. 엔디미온은 악마와 싸우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장렬하게 전사한 이름 모를 청년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갑옷을 좀 보려고 왔소.”
“갑옷이야 많지. 그런데 당신 몸에 맞는 게 있으려나 모르겠군.”
노인은 대장간 안쪽으로 들어가서 갑옷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뒤에 그는 사슬갑옷 한 벌을 가지고 나타났다. 기름을 먹이고 관리를 잘 했는지 화로 안의 불꽃을 반사하여 번쩍번쩍 빛이 났다. 엔디미온은 사슬갑옷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입어볼 수 있겠소?”
“그거야 물론이지.”
엔디미온은 망토를 벗고 옷 위에 바로 사슬갑옷을 입었다. 전신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상반신만을 가리는 갑옷이었다. 갑옷은 몸에 딱 맞았다. 만족스러웠다. 이만한 갑옷이면 악마의 공격을 두 번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걸로 하겠소.”
“결정이 빠른 사람이군.”
갑옷이 마음에 들었으니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바로 주머니를 열어서 값을 지불했다. 실력 있는 장인이 만든 갑옷이라서 그런지 값이 비쌌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번스타인에게 얻은 금화와 율리아에게 받은 금화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이런 갑옷은 몇 벌을 더 사도 돈은 넘칠 듯 많았다.
노인이 또 필요한 물건이 있냐고 물었다. 엔디미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검을 한 번 봐달라고 했다. 수많은 사악한 존재들을 베면서 검에는 살점과 핏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냥 두면 날이 무뎌졌다. 노인은 조수인지 아들인지 모를 청년을 불러서 기름 먹인 천으로 오물들을 닦아내고 숫돌로 날을 날카롭게 세우라고 시켰다. 청년은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다.
이번에는 라이오넬이 한 걸음 나섰다. 노인은 자기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인데도 젊은이 못지않은 체격을 지닌 라이오넬을 보고서 주춤했다. 그리고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색 천을 보고서 침을 한 번 삼켰다.
“이거 유명인을 만났군. 천둥검의 라이오넬 아닌가.”
무슨 만나는 사람마다 다 알아보네. 엔디미온은 한때 영웅이었던 라이오넬이 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할리아까지 흘러들어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내밀었다.
“내 검도 한 번 봐주면 고맙겠네.”
노인은 조심스럽게 라이오넬의 검을 받았다. 낡은 검집에서 천천히 검을 꺼낸 노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검은 날카롭게 빛을 번쩍였다. 누가 보아도 명검이었다. 노인은 한참 검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이건 그냥 써도 되겠는데. 이가 나간 곳도 없고 날이 무뎌진 것 같지도 않고. 검집이 많이 낡기는 했는데 그거라도 좀 바꿔드릴까?”
“아니, 괜찮네.”
라이오넬은 다시 검을 돌려받았다. 엔디미온은 청년이 숫돌로 검의 날을 갈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노인은 그런 그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슬쩍 말을 붙였다.
“그래, 악마사냥꾼이라고 했는데 악마는 좀 잡으셨어? 요즘 옛 성터에 악마가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데 그거 해결하러 갈 생각은 없수?”
“그 악마는 죽었소. 어제 말이오.”
노인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죽었다고? 허, 성기사들이 그리로 출정을 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내가 죽였으니까.”
“당신이 죽였다고?”
엔디미온은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소.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한다고.”
그 말이 끝나자 청년이 검을 들고 돌아왔다. 엔디미온은 그에게서 검을 돌려받고 상태를 한 번 확인해 보았다. 검이 아주 날카롭게 빛났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 검을 찼다. 그는 청년에게 금화 하나를 튕겨주었다. 날을 한 번 갈아준 일의 대가로는 많은 돈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돈도 많은데 그냥 돈지랄 좀 해보고 싶었다.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용무도 끝났으니 이제 대장간을 떠나려는데 노인이 말했다.
“허, 정말 실력 있는 악마사냥꾼이셨군. 율리아 경도 그 악마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그걸 해결하다니.”
“별 건 아니었소.”
정말로 별 거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그깟 악마는 몇 마리가 달려들든 모두 죽일 자신이 있었다.
“악마를 죽였으니 이제 할리아를 떠나시겠수? 어디로 가시오?”
엔디미온의 긍극적인 목적은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은 서쪽으로 가야 했다. 아직 다음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엔디미온은 간단히 말했다.
“서쪽으로.”
“서쪽이라면 로게나에 가는 모양이군. 가는 길 조심하슈. 요즘 그리로 가는 길에 뭐 이상한 놈들이 자꾸 나타난다는데.”
방향을 서쪽으로 잡았을 뿐, 딱히 로게나로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엔디미온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한 놈들이라면 어떤 놈들을 말하는 거요?”
“글쎄, 들리는 소문으로는 뭐 악귀 새끼들이 자꾸 나타난다고 하던데 그 뒤에 마녀가 있다나 뭐라나.”
엔디미온은 작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마녀를 아주 싫어했다. 사람이면서 악마의 힘에 홀려 그들을 숭배하며 추종자를 자처하는 자들은 해악으로만 따지면 악귀와 악마보다 더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선량한 사람을 연기했고 밤에는 사람들을 죽여서 모시는 악마를 위한 제물로 바쳤다. 마을 하나가 마녀 한 명 때문에 망해버리는 일은 자주 있었다.
같은 사람이면서 사람을 죽이고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을 엔디미온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단 한 명의 마녀도 살려주지 않았고 언제나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였다. 그건 의무와 상관없는 순수한 증오였다.
“알겠소. 몸조심하도록 하지.”
엔디미온 일행은 대장간을 나왔다. 베로니카가 엔디미온에게 물었다.
“정말 로게나로 가나요?”
“난 서쪽으로 갈 뿐이야.”
“어, 출발은 언제 하나요? 집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베로니카는 정든 집을 떠나서 낯선 곳을 유랑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껍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금화 구십칠 개를 마련할 능력이 없었다. 엔디미온은 얼른 집을 정리하고 오라고 했다. 자신은 전에 갔던 여관에 있겠다고 말했다.
얼른 집으로 뛰어가는 베로니카를 보다가 엔디미온은 라이오넬과 함께 여관을 갔다. 말은 마구간에 맡겨두었다. 그는 그곳에서 늦은 아침을 해결한 후에 베로니카를 기다렸다. 잠시 뒤에 그녀가 돌아왔다. 엔디미온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났고 베로니카는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뒤를 따랐다. 마구간에 맡긴 말을 찾아서 등 위에 올라탔다. 성문으로 가니 이번에는 알디 대신에 다른 경비병이 있었다.
그들은 할리아를 떠나서 말을 타고 달렸다. 말들은 힘이 넘쳤고 빠르게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은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올랐을 때 겨우 말을 멈추었다.
잠깐의 휴식이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베로니카가 가방 안을 뒤적거리다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말린 자두가 들어있었다. 몇 개를 꺼내서 다 함께 나누어 먹었다. 시큼하지만 달콤한 것이 자꾸만 손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라이오넬은 말린 자두를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아가씨는 참 좋은 사람이야.”
“갑자기요?”
“맛있는 것을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번스타인 씨가 그랬거든.”
베로니카는 지금 라이오넬이 얼마만큼 제정신일지 가늠해 보았다. 칼부림을 할 가능성은 낮아보여서 대충 대꾸해 주었다.
“맞아요. 하지만 맛있는 걸 준다고 해서 함부로 따라가면 안 돼요.”
“명심하도록 하지.”
아니, 무슨 세 살짜리 애도 아니고. 엔디미온은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노망이 나면 아기가 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제 출발하자.”
엔디미온 일행은 다시 말을 타고 달렸다. 그들은 로게나로 가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서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가는 길에 도시가 나오면 거기서 쉬는 것이고 아니면 그냥 쭉 가는 것이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베로니카는 엉덩이가 아팠다. 그녀는 마법사였지 기사가 아니었다. 장시간 말을 타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엔디미온에게 혹시 성수를 나누어 줄 수 있냐고 물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 괜히 혼날 것이 뻔했다.
이제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노을이 지고 잠시 뒤면 빠르게 주변이 깜깜해질 터였다. 그 전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워야 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식사 준비를 했다. 말의 옆구리에는 작은 솥이 달려 있어서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었다.
모닥불 위에 솥을 올리고 물이 끓는 것을 한참 바라보던 엔디미온은 가방을 뒤져서 요리 재료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솥 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껍질도 제대로 까지 않은 양파가 통째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베로니카가 윽 소리를 냈다.
그들은 솥 안의 잡탕이 끓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하늘의 빛은 빠르게 사라져서 이제 깜깜했다. 달은 구름 뒤에 숨었고 별은 하나도 없었다. 지상의 빛이라고는 솥을 끓이고 있는 모닥불뿐이었다.
엔디미온은 손에 포크를 하나 쥐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집을 정리할 때 가지고 나온 것이었는데 끝이 제법 날카로웠다. 모닥불의 주홍색 불빛을 받아서 황금처럼 번쩍이는 포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불쑥 말했다.
“꼭 그런 애들이 있어. 남 식사할 때 찾아오는 애들.”
베로니카는 모닥불의 온기 때문에 꾸벅꾸벅 졸다가 갑작스러운 엔디미온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을 느릿하게 끔벅이다가 말했다.
“뭐라고요?”
“남의 집 식사 시간에 찾아와서 식사 얻어먹고 가는 애들 말이야. 아주 악질이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엔디미온은 벌떡 일어났다. 베로니카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집어던졌다.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어둠 속으로 날아간 포크는 무언가에 탁 하고 꽂혔다. 그 다음에는 숨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베로니카는 어리둥절하다가 사방에서 촛불처럼 켜지는 새빨간 눈들을 보고서 숨을 삼켰다.
숫자가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줄 건 없어, 이 개 같은 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