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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23화 (2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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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는 이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치 챘다. 그녀는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고 바로 주문을 외웠다. 손아귀 안으로 빛이 모여들었다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하늘에서 땅으로 빛이 쏟아졌다. 마치 빛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사방이 반짝반짝했다. 엔디미온은 입을 오므려서 호 하고 감탄했다. 악귀들을 불태우는 정화의 빛도 아니고 단지 주변을 밝히는 마법일 뿐이지만 보기에는 멋있었다.

주변이 밝아지자 악귀들이 얼마나 몰려들었는지 훤히 보였다. 베로니카는 들개를 닮은 악귀들이 열 마리도 넘게 모여 있는 것을 보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악귀들은 몸이 날래고 체력이 뛰어나서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았다. 한 번 사냥감으로 점찍은 상대는 결코 살려두지 않고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는 것으로 유명한 악귀였다.

들개를 닮은 악귀는 깨무는 힘이 상당해서 사람의 목을 한 번 물어뜯는 것만으로 목을 부러트릴 수 있을 정도였다. 발톱은 길고 날카로웠으며 강철처럼 단단했다. 악귀를 사냥한 악마사냥꾼들이 발톱을 잘라서 창날로 쓰려다가 발톱을 부러트릴 수가 없어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크르르······.”

악귀들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엔디미온 일행 근처로 모여들었다. 세 명이서 악귀 열 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그다지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하품을 하면서 검을 뽑았고 엔디미온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을 뿐이었다. 베로니카만이 약간 굳은 얼굴로 주문을 외웠다.

전투는 베로니카가 빛의 화살을 날려서 악귀 하나의 눈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됐다. 악귀는 눈 하나를 잃고서 괴로워했지만 그걸로 죽지는 않았다. 컹컹 소리를 내면서 사납게 베로니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빛이 새어나오는 주먹을 휘둘러서 사방에 빛을 뿌린 후에 엔디미온의 뒤로 얼른 숨었다.

반짝이는 빛은 악귀들의 몸에 부딪히는 순간 쾅쾅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하지만 그 공격으로 죽은 악귀는 없었다. 그들은 털이 타고 살갗이 벗겨져서 진물이 흐르는 것을 참으며 엔디미온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빠르게 달린 악귀는 제일 먼저 죽었다. 천둥소리와 함께 악귀의 몸에서 떨어진 머리가 길게 혀를 빼물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악귀를 향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악귀다운 도약력으로 바로 목을 노리는 악귀의 입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있는 힘껏 힘을 주어서 확 찢었다.

초록색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입이 너덜너덜해진 악귀의 몸을 다른 악귀를 향해 던졌다. 달려오던 악귀가 그것에 맞고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라이오넬이 빠르게 악귀들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그가 상대해야 할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모닥불을 뒤적이던 부지깽이를 집어 들고 달려오는 악귀의 머리에 내리찍었다. 털과 살이 타는 냄새가 나면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악귀 한 마리가 엔디미온의 어깨를 물었지만 사슬갑옷에 이빨이 막혀서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억센 손아귀가 악귀의 머리를 붙잡았다. 힘을 주자 머리 안에서 뼈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악귀가 낑낑 소리를 내면 낼수록 손가락은 머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더 세차게 살과 뼈를 눌렀다.

결국에는 악귀가 혀를 길게 빼물고서 눈을 까뒤집었다. 엔디미온은 악귀의 몸을 붙잡고 다리에 내리쳐서 허리를 부러트렸다.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바닥에 던진 후에 고요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귀는 이제 두 마리만 남아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처음부터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서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 악귀는 다른 놈들과 다르게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누가 보아도 무언가 있는 놈이었다.

악귀 한 마리가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오자 주먹을 휘둘러서 멀리 날려버렸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공중에서 악귀를 가로로 베어서 반으로 갈랐다. 엔디미온은 사방으로 요란하게 튀는 오물들을 손으로 쳐낸 후에 황금색 눈을 가진 악귀를 향해 걸어갔다.

악귀는 얼른 몸을 돌려서 도망치려 했지만 성배기사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엔디미온은 곧바로 악귀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얼굴을 세게 한 대 후려갈겼다. 이빨이 부러지고 걸쭉한 침이 줄줄 샜다. 악귀는 낑낑 소리를 내면서 몸을 버둥거렸다. 한 대 더 때리니 얌전해졌다.

“날 똑바로 봐.”

악귀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까 했지만 목숨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얼른 엔디미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거 다 안다.”

떨리던 악귀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악귀의 몸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이어서 말했다.

“기회를 주지. 제 발로 날 찾아올 기회 말이야. 이 기회를 걷어차면 넌 두 다리가 부러져서 머리채를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오게 될 거다. 난 이왕이면 자기 발로 오는 걸 추천하겠어.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악귀의 황금색 눈이 빛을 발했다. 점점 더 짙어지는 황금색 빛과 웅웅 울리는 소리에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악귀의 몸 곳곳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갑작스럽게 몸이 부풀기 시작한 악귀는 몸 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더는 담아두지 못하고 사방으로 강렬한 힘을 뿌렸다. 엔디미온은 얼른 악귀를 바닥에 내던졌으나 사악한 힘이 담긴 빛과 부러져서 날카로운 흉기가 된 뼛조각들을 몸에 맞고 말았다.

“기회를 줬는데.”

그는 무심하게 몸에 박힌 뼛조각들을 뽑아낸 후에 왼쪽 발을 뒤로 뻗었다. 오른쪽 다리를 약간 굽히고 왼쪽 발로 바닥을 박차고서 벼락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성배기사의 민감한 감각은 주변에 있는 사악한 존재들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악한 것들은 절대로 성배기사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대악마 다르디낭조차 그랬으니까.

“컹! 컹컹!”

악귀들이 크게 짖으면서 엔디미온에게 달려들었다. 숫자는 많았다. 하지만 단 한 마리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은 이빨이 몽땅 부러져서 죽었고 어떤 것은 목이 부러져서 죽었다. 주둥이가 찢어진 것도 있었고 다리가 뽑힌 것도 있었다. 엔디미온은 빠르게 달리면서 그것보다 더 빠르게 악귀들을 쳐죽였다.

악귀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더러운 오물들로 몸을 더럽힌 엔디미온은 이제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 마녀와 마주했다. 그녀는 키가 작았고 어린 소녀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녀들은 대개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새로운 육신을 받았다. 악마의 힘으로 만들어진 몸은 결코 늙지 않았고 언제나 강력한 힘으로 충만했다. 마녀들은 악마의 총애를 잃고 새로운 몸을 빼앗기는 것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했기에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제물로 바쳤다.

마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몸을 잘게 떨었다.

“······성배기사 엔디미온.”

엔디미온은 아무 말 없이 한 발자국 움직였다. 마녀는 그 모습을 보고서 경기를 일으키듯 손을 휘둘렀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마법들이 연달아서 발동했다. 악마의 힘을 담은 검은색 빛이 엔디미온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날아갔다. 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녀는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짜내어 쉬지 않고 마법을 날렸다. 같은 수준이라면 마법사보다 마녀의 마법이 더 강력했다. 그것은 마녀의 강력함에 악마의 힘이 더해지기 때문이었다.

사악한 힘을 담은 마법은 때로는 불꽃이었고 때로는 화살이었으며 때로는 칼날이었다. 백 명도 넘는 병사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이 단 한 명을 위해서 작렬했다. 근처에 있던 바위가 박살나서 모래가 됐고 나무가 몇 그루나 부러져서 쓰러졌다. 힘을 다 짜낸 마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서서히 먼지구름이 걷혔다.

“······뭐?”

그 순간 마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내가 말했지.”

바닥을 밟고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기회 줄 때 제 발로 걸어오라고.”

엔디미온은 먼지구름을 헤치고 멀쩡히 걸어나왔다. 그는 얼어붙어서 불쌍할 정도로 떨고 있는 마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껏 뺨을 후려갈겼다.

“아악!”

마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광대뼈가 박살나고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이가 몇 개 부려져서 피 섞인 침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그가 말했던 대로 마녀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마녀가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질렀다.

“이 개 같은 성배기사야! 내 주인님이 너를 죽일 것이다! 사지를 찢어서 개먹이로 줄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

이게 아직 덜 맞았나. 엔디미온은 한 대 더 때리려다가 참았다. 그러면 마녀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직 물어볼 것이 있으니 죽으면 곤란했다. 그는 일행이 있는 곳까지 마녀를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모닥불 근처에 대충 던졌다.

베로니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어, 혹시 사람을 납치해 오신 건가요?”

“무슨 소리야. 이건 마녀야. 사람이 아니라.”

자세히 보니 몸에서 음울한 기운이 들끓는 것이 정말 마녀였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우리를 왜 습격했지?”

엔디미온은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쑤셨다. 타닥타닥 소리가 나면서 불티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 마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녀가 성배기사를 공격하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너에게 힘을 준 악마의 이름이 뭐냐. 어디에 있지?”

마녀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피와 함께 침을 뱉으며 말했다.

“이 개 같은 놈아. 내 입이 찢어져도 주인님에 대해 말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진짜로 입이 찢어지면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거든. 내가 잘 알아. 너 같은 마녀들의 입을 많이 찢어봤으니까. 다들 옹알이만 하더라고.”

엔디미온이 무심하게 말한 뒤에 모닥불에서 막 꺼낸 부지깽이를 마녀의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 뜨거운 열기가 넘실댔다. 마녀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내가 하나 가르쳐줄까.”

부지깽이가 다시 모닥불 안에 처박혔다. 엔디미온은 손을 몇 번 털었다. 손에 묻은 재가 열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마녀는 마와 녀로 이루어져 있지.”

무슨 헛소리야. 베로니카가 눈알을 굴리며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마고.”

엔디미온의 손이 마녀의 허리에서부터 머리끝으로 움직였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녀야.”

이번에는 허리에서 발끝으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엔디미온을 보고 있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 그대로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그게 무슨······.”

지금까지 침착하게 말했던 것이 모두 연기였던 것처럼 엔디미온은 갑작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토막 나서 뒈지기 싫으면 깝죽거리지 말고 대답이나 잘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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