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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24화 (2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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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기사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악한 존재로 하여금 몸을 얼어붙게 하고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게 하는 힘이었다. 마녀는 엔디미온의 등 뒤에서 슬며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후광처럼 성배기사의 몸을 감쌌고 빛무리가 누르스름한 색깔로 일렁거렸다.

마녀는 신성하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보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태양의 빛처럼 강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빛은 장애물을 무시하고서 눈 안으로 바로 뛰어들었다. 가시처럼 안구를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강렬한 빛 때문에 마녀는 입술을 비틀었다. 비명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빛은 마녀의 몸을 태우려는 것처럼 더 강렬하게 번쩍였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온통 백색만이 보였다. 입 안이 쩍쩍 마르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공기조차 달구어져서 숨을 들이킬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마녀는 꺽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엔디미온은 그제야 자신의 힘을 거두었다. 세상은 다시 밤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마녀들을 죽였다.”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엔디미온은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깍지 낀 두 손을 꼼지락대면서 말했다.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말이야.”

마녀는 바닥에서 몸을 버르적대면서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은 증오와 두려움 사이에 있었다.

“나는 단 한 명의 마녀도 살려두지 않았다. 만나는 족족 죽였지. 그런데 내가 지금 너의 그 역겨운 얼굴을 참아주는 것은 너에게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바닥에서 버둥거리던 마녀는 이제 얼굴만을 간신히 들었다. 아이처럼 희고 고운 살결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엔디미온은 저 젊음이 넘치는 얼굴 하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역겹고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참았다. 그가 했던 말처럼 마녀는 지금 이용 가치가 있었다.

“잘 선택해라, 악마의 하수인아. 나는 성배기사인 동시에 징벌자다. 너는 결국 죽겠지만 그 방식만은 택할 수 있지. 아주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비참하게 버르적대며 죽음을 기다리게 될 수도 있고 깔끔하게 목이 잘려 한 번에 죽을 수도 있다. 나는 너희 같은 족속들이 영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는 너 스스로가 잘 알겠지.”

선택의 시간이었다. 마녀는 악귀를 맨손으로 죽이는 엔디미온의 무용과 온갖 사악한 것들을 태워버릴 듯 강렬한 빛의 힘을 보고서 그녀가 절대로 이 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또한 같은 주인을 모시고 있는 악마숭배자들 중 그 누구도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도 알았다. 엔디미온의 말대로 악마숭배자들은 아주 영악해서 결코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몸을 숨기고 악마의 총애를 받는 데만 열심일 것이다. 하수인 한 명이 줄었으니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마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성배기사의 힘에 압도당해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오직 입뿐이었다. 입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엔디미온의 말대로 그녀가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오직 말하는 것만을 허락했기에 마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대악마가 죽은 후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악마들이 남아 있었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입을 여는 마녀를 보고서 고갯짓을 했다. 더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대악마가 죽었지만 영웅들 역시 모습을 감추었기에 악마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기사들이 열심히 악마들을 토벌했지만 뿌리를 뽑을 수는 없었지.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심으로 무장한 일개 인간일 뿐 대악마를 죽인 영웅들이 아니었으니까.”

엔디미온은 슬쩍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그는 모닥불을 쬐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들은 나만 두고 도망쳤으면서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뭇 악마들의 소원은 그들의 진정한 주인이자 아버지인 대악마 다르디낭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성배를 찾고 있었지. 그런데 마침 성배를 가진 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탐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내 주인님께서 너를 찾아내어 성배를 가져오라 했으니 난 명령에 따른 것이다.”

마녀는 마비가 온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던 손발이 이제야 움직였다. 그녀는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엔디미온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궁금한 것을 물었을 뿐이다.

“내가 여행을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넌 무슨 수로 날 벌써 찾아냈지?”

이 마녀는 우연히 엔디미온과 마주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를 찾아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악마 오르탈라는 성배기사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일개 마녀 따위가 엔디미온을 바로 찾아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마녀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했다.

“내 주인님의 힘이다.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일부 악마들은 아주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너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의 힘은 마치 바다와 같아서 아무리 써도 결코 줄지 않으니 성기사들 따위는 상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네 주인의 이름은? 어디에 있지?”

“주인님의 이름은······.”

마녀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엔디미온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려는 것 같으면 다시 뺨을 한 번 갈겨줄 생각이었다. 마녀의 눈이 불안하게 떨리더니 갑자기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게 켁켁 소리를 내더니 그 다음에는 꺽꺽 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목을 붙잡았다.

지켜보던 베로니카가 숨을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녀가 입에서 왈칵 핏물을 뱉어냈다. 몸 안의 피를 모두 뱉어내려는 것처럼 쉬지 않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두 눈이 붉게 변했고 마치 터지려는 것처럼 자꾸만 크기가 커졌다. 그 기괴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엔디미온이 검을 뽑았다.

마녀가 울부짖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꺼으으엑, 주, 인, 꺼어으으윽! 억!”

가죽 주머니에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몸이 자꾸만 커지다가 살갗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부러진 뼈가 튀어나왔다. 누가 보아도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엔디미온은 침착했다. 그는 검을 들었고 그대로 휘둘렀다. 툭 소리가 나면서 마녀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구멍이 난 것처럼 몸에서 푸시식 소리가 나면서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이오넬 뒤에 숨어있던 베로니카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마녀의 시체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악마가 한 짓인가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막음을 한 거겠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기 전에 죽인 거야.”

“······악마들은 참 역겹군요.”

엔디미온도 동감이었다. 그는 수많은 악마들을 죽이면서 그들의 악랄함과 더러움을 몸소 체험했다. 그가 의무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것은 초인적인 인내심 덕분이기도 했지만 쳐죽여야 할 적들에 대한 증오심의 역할도 컸다.

“입맛만 떨어지게 만드는군.”

그들은 아직 식사를 하기 전이었다. 엔디미온은 마녀의 망토를 벗겨서 시체를 가렸다. 솥 안에 든 것을 확인하니 너무 많이 끓어서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졸아버렸다. 엔디미온 일행은 그것이라도 먹기로 했다. 엔디미온이 국자로 나무 접시에 건더기만 남은 잡탕을 배분했다. 많이 짰지만 그런대로 맛있었다. 베로니카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마 건더기가 대부분 고기라서 그런 것이라고 짐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그릇을 대충 정리한 후에 잠을 잘 준비를 했다. 엔디미온은 흉한 꼴로 죽은 마녀의 시체를 처리하려다가 망토에 매달린 황금 단추를 발견했다. 고리에 걸어서 망토가 벌어지지 않게 해주는 단추였는데 거기에는 양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있었다.

단순한 장식이라고 보기에는 문양의 모습이 특이했다. 동전만한 크기의 단추에 새겼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밀한 문양은 불을 뿜는 뿔 달린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괴물의 눈 부분에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상등품의 루비였다. 망토에 쓸 단추라기에는 너무나 화려했다.

엔디미온은 망토에서 단추를 떼서 베로니카에게 가져갔다. 그녀에게 번쩍거리는 단추를 내밀자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것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엄청 비싸 보이는데요.”

그건 나도 알아. 엔디미온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베로니카의 손에 단추를 넘겨주며 말했다.

“그냥 장식용 단추는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아는 것 있나?”

베로니카는 한참 모닥불에 단추를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거 염소 같지 않아요?”

“뭐? 그 불 뿜는 괴물? 소 아니야?”

“아니에요, 염소 같아요.”

엔디미온은 소나 염소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다. 한 글자 차이고 둘 다 뿔이 달렸으니까. 하지만 베로니카에게 두 동물의 차이는 중요한 문제인 듯 했다. 그녀는 이마에 자국이 남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심하게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악마숭배자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비밀결사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서 불 뿜는 악마를 상징으로 삼는 비밀결사는 하나뿐이에요.”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건 그림자 수도회의 문양이에요. 신을 부정하고 악마를 진정한 신으로 모시는 미치광이들의 집단입니다. 아무래도 이 마녀는 그 집단의 일원인가 봐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 년 전에도 이런 조직이 몇 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싸움에 지쳐서 돌아버린 자들, 거짓 신을 신봉하고 사람이면서 사람을 죽이던 추악한 자들의 보금자리. 그는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자들을 혐오했다. 마녀와 마찬가지로 악마숭배자들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보이는 대로 죽였다.

“금화 구십육 개.”

“뭐라고요?”

“구십칠 개에서 하나 까주겠다고. 도움이 되는 정보였으니까 말이야. 혹시 그 그림자 수도회란 놈들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그건 몰라요. 비밀결사니까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으면 그건 비밀결사가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군.”

적들의 정체는 알아냈다. 이제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을 붙잡아서 그 뒤에 있는 악마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베로니카는 로게나로 가면 그림자 수도회에 대한 정보를 모아볼 생각이었다. 이건 엔디미온의 일인 동시에 자기 목숨에 관련된 일이었다. 적에 대한 정보는 아무리 많아도 나쁠 것이 없었다. 더욱이 마녀는 백 년 동안 힘을 기른 악마들이 몇몇 있다고 했다. 그들이 힘을 합쳐서 엔디미온을 습격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악마들의 숫자를 줄여야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더 많은 악마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길 바랐다. 그들이 손을 잡고 자신을 죽이러 오길 바랐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들 모두를 쳐죽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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