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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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게나의 별명은 그림자 도시였다. 로게나는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사람들의 재산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매해 새롭게 성벽을 보강했고 그 결과로 세상의 어떤 성보다 더 거대하고 튼튼한 성벽을 가지게 되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성벽은 듬직하게 사람들을 보호했다. 악마들은 단 한 마리도 로게나의 성벽을 넘을 수 없었고 대지 위에 우뚝 선 로게나는 수많은 악마들을 박살내고 등 뒤에 있는 다른 도시들을 지키는 첨병이 되었다.
보강에 보강을 거듭해서 해마다 하늘에 가까워지는 성벽 때문에 로게나 사람들은 햇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낮에도 어스름한 길을 걸어야 했고 집 안에서는 촛불을 켜고 생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불만을 가졌던 자들은 로게나를 떠났고 그들은 모두 악마들에게 죽었다. 로게나 사람들에게 햇빛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성벽의 그림자 아래에서 생활했기에 로게나의 별명은 그림자 도시가 되었다.
“와, 정말 어둑하네요.”
엔디미온 일행은 지금 로게나에 있었다. 그들을 노리던 마녀를 죽이고 나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엔디미온의 목적지는 막연하게 서쪽이었고 딱히 로게나에 들릴 이유는 없었지만 베로니카가 그림자 수도회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며 도시에 잠깐 머물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림자 도시에서 그림자 수도회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니 좀 말장난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진지했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악마사냥꾼 일을 하고 있지만 불타는 사명감 같은 것은 없었다. 목숨을 지키려면 언제나 위험에 대비해야 했다. 바로 로게나처럼.
“마치 성벽이 자라는 것 같군. 백 년 전보다 더 커졌어.”
엔디미온은 로게나의 성벽에 감탄했다. 백 년 전의 성벽만으로도 충분히 사악한 존재들을 막아낼 수 있었는데 굳이 더 보강한 것을 보니 일종의 집착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럴 것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그는 중얼거리면서 길을 걸었다.
“전 그림자 수도회에 대한 정보를 좀 모아볼 생각인데 엔디미온 씨는 어쩌시겠어요?”
먼저 여관에 방을 잡고 난 후에 베로니카가 한 말이었다.
“난 신전에 갈 거다. 악마숭배자들에 대한 것이라면 성기사들이 잘 알겠지.”
“오,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그럼 나중에 여관에서 다시 만나요.”
“베로니카, 라이오넬 데리고 가.”
“엑.”
베로니카는 싫다는 티를 냈지만 엔디미온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두 무리로 갈라진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러 떠났다. 엔디미온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서 곧장 신전으로 갔다. 이곳의 신전은 할리아의 것보다 더 컸다. 그만큼 도시 안에서 성기사들의 힘이 강력하다는 증거였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제일 먼저 주춧돌을 올리고 성벽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은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악마와 악귀들을 죽이면서 작은 성벽을 만들었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성벽은 점점 더 크고 단단해졌고 성기사들이 지켜야 할 사람들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때로는 성이 함락될 뻔한 적도 있었으나 그들은 숭고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져가며 사람들을 지켰다.
작은 성벽은 결국 로게나라는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다. 성기사들이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죽었을 것이고 이곳은 악마들로부터 모두를 지키는 첨병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에 성기사들이 이 도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전의 입구에는 망치와 정, 그리고 검을 들고 있는 손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성기사들의 신성한 무력을 상징했고 망치와 정은 그들이 성기사인 동시에 석공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방문 목적은?”
입구를 지키는 병사는 말이 짧았다. 엔디미온은 말이 길어지게 하는 마법의 약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사용하지는 않기로 했다. 효과는 확실한데 잘못하면 영영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는 쥐었던 주먹을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뭐하러 온 것 같소?”
병사는 엔디미온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큰 키와 커다란 덩치로 보건데 의뢰를 맡기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한 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악마사냥꾼인가? 일거리를 찾으러 온 모양이군.”
“그거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은 뭐야?”
엔디미온은 허리를 숙여서 병사와 눈을 맞추었다. 짙은 푸른색의 눈이 고요하게 병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악마만 죽이는 게 아니니까. 이것저것 다 죽인다는 소리요. 이만 들어가도 되겠소?”
“······어어? 어어, 그래.”
엔디미온이 병사의 어깨를 밀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기세에 눌린 병사는 침만 꿀꺽 삼켰다.
할리아보다 신전이 더 큰 만큼 내부도 복잡했다.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모두 자기 일로 바빠 보여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로게나의 신전은 단순히 악마와 관련된 업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행정에 관한 전반적인 일까지 함께 처리했다.
성기사들이 세운 도시인만큼 그들의 대장이 영주의 역할을 대신했다. 말 그대로 신정일치의 도시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전부가 신관이나 성기사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의 행정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고용인들이었다.
엔디미온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나쳐서 회랑을 걸었다. 여기가 진짜 신전이었다. 그는 길게 이어진 회랑을 걷다가 길의 끝에서 신관 한 명과 마주쳤다. 중년의 신관은 머리의 중앙이 벗겨졌고 좌우로만 풍성하게 머리털이 자라있었다. 그는 반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혹시 악마 토벌에 관련한 일 때문에 오신 겁니까?”
신관은 눈치가 빨랐다. 이곳까지 들어올 사람이라면 악마사냥꾼뿐이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일 때문이오. 내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이지.”
“궁금증이요? 그런 건 도서관에서 가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신관은 어색하게 웃으며 버릇처럼 머리를 매만졌다. 더 반질거리는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궁금증이요. 혹시 대교구장을 만나볼 수 있겠소?”
로게나는 여명교단에 있어서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 곳이고 그 때문에 주변의 다섯 도시를 관할하는 대교구의 자리를 받았다. 보통 기사수도회의 대장이 교구장을 겸하기 때문에 엔디미온이 말하는 대교구장은 곧 이곳의 영주를 뜻했다.
신관은 여전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각하는 지금 업무로 많이 바쁘십니다. 불쑥 찾아오셔서 만나게 해달라고 하시면 좀 곤란하군요.”
“그럼 이걸 가져가서 이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시오. 만약 당신이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눈에서는 형형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마치 잡아먹을 듯한 시선에 신관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한 번 더 매만진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걸 전달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이것이오.”
엔디미온이 내민 것은 마녀에게서 빼앗은 단추였다. 신관은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았다가 금세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걸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혹시······?”
“자수를 하러 온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소. 그건 내가 마녀를 쳐죽이고 얻은 것이오. 이곳이라면 혹시 아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가지고 온 것이오.”
“저를 따라오시지요.”
신관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엔디미온은 그 뒤를 따라갔다. 신전의 중심부에는 기도를 드리는 신관들과 무구를 점검하고 있는 성기사들이 많았다. 두 사람은 그들을 지나쳐서 두꺼운 갈색 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누가 보아도 대교구장의 집무실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신관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잠시 뒤에서 나와서 엔디미온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각하.”
신관은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한 후에 얼른 문을 닫고 나갔다. 엔디미온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율리아의 집무실과 다르게 깔끔했다. 좌우의 벽에는 책장이 있었고 그 안에는 책들이 빽빽하게 들어있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있었다. 더러운 발로 밟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거침없이 밟으며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에는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중년 남자가 있었다. 그는 기름을 발라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모두 넘겼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새치가 몇 가닥 보였다. 전체적으로 신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잔뜩 있었다. 검을 잡던 사람의 손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종이 몇 장과 도장이 있었다. 그는 종이에 도장을 찍은 후에 책상 위를 정리했다. 혼자서 신전의 업무를 도맡아 하는 율리아와 다르게 이 남자는 부하들이 올린 보고서를 검토하고 결재 도장만 찍는 듯 했다. 할리아와 로게나의 수준 차이가 있다고 해도 같은 교구장인데 처지가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자네가 가져온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서 말했다. 목소리는 중후했다. 여자 꽤나 꼬셨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엔디미온은 멋대로 의자 위에 앉으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알고 있소. 그게 그림자 수도회의 문양이란 것.”
남자는 이제야 고개를 들어서 엔디미온을 보았다. 그는 손에 묻은 인주를 손수건으로 닦아낸 후에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 난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로게나 대교구장인 그림발드다.”
“선량한 여행객이자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하는 엔디미온이오.”
그림발드가 잠깐 침묵한 것은 엔디미온의 웃기지도 않는 자기소개 때문이었다.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그림발드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엔디미온이라. 위대한 영웅의 이름이군. 우리 성기사들은 신성한 의무를 다하며 영웅의 뜻을 묵묵히 잇는 성배기사의 적생자이니 그 이름을 가진 자를 마땅히 환영해야겠지. 반갑다, 선량한 여행객이자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하는 엔디미온.”
엔디미온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인간 그림발드로서 자네를 믿지만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로게나 대교구장으로서 자네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주게. 그건 자네가 가져온 이 단추가 정말로 그림자 수도회의 물건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엔디미온, 자네는 영웅의 이름을 가졌지만 애석하게도 내게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야 해.”
그림발드의 의심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대교구장이라면 응당 보여야 할 올바른 의심이었다. 엔디미온은 선선히 대답했다.
“첫 번째 증거는 악마숭배자들은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올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고 두 번째 증거는 내가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하면서 쳐죽인 악마들의 시체요. 그것에 대해서는 철십자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할리아 교구장인 자가 증명할 것이니 바란다면 확인해 보시오.”
그림발드가 말했다.
“할리아 교구장? 율리아 경을 말하는 건가?”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림발드가 다시 말했다.
“율리아와 아는 사이인가? 그녀는 내 제자야. 사람들은 그녀가 젊은 나이에 교구장 자리에 오른 것이 나의 후광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잘못된 소문이야. 율리아는 내 밑에서 아주 혹독한 수련을 받았고 신실한 믿음으로 신께 봉사하면서······.”
아니, 그건 안 물어본 것 같은데. 엔디미온은 신나서 딸을 자랑하는 아버지처럼 줄줄 말을 이어가는 그림발드를 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