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엔디미온은 백 년 동안 길렀던 인내심이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줄줄 이어지는 그림발드의 제자 자랑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저런 잡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와 같은 침대에서 잤다는 사실을 알면 이 남자가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 따위의 생각들.
“······내 말 듣고 있나?”
경청하는 척에도 방법이 있다. 턱은 약간 당기고 입은 꽉 다물어야 한다. 그러면서 시선은 화자를 향해야 하고 가끔씩은 의미도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면 상대는 이 사람이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때때로 아하 같은 추임새도 해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엔디미온은 잡생각을 할 때 들키지 않는 방법을 무려 백 년 전에 통달했다. 그 기술은 마법사 바이올렛이 알아먹지도 못할 학술적인 내용에 대해 떠들어댈 때나 라이오넬이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반복할 때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그림발드를 향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오. 여섯 살 때 율리아가 처음으로 말을 탔던 이야기까지 했잖소.”
“그건 일곱 살이야.”
“여섯 살 아니었소?”
“······.”
그림발드의 시선이 너무 따갑게 느껴져서 엔디미온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여기는 손님이 왔는데 차도 한 잔 안 내주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소.”
“그래, 그 말이 맞아. 중요한 건 일곱 살 때 처음 말을 탔던 율리아가 그 다음 해에 승마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이지.”
“······중요한 건 그림자 수도회요.”
그림발드가 입을 조금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하군. 율리아는 내 죽은 친구의 딸이라서 말이야. 아버지를 잃은 그녀를 위해서 어릴 적에 제자로 들였는데 아끼는 마음이 너무 과했나 보군.”
“아니, 괜찮소.”
자리에서 일어난 그림발드는 장식장에서 술 한 병과 잔 두 개를 꺼냈다. 둥그스름한 다각형의 모습을 한 유리잔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그가 술병의 뚜껑을 열고 유리잔에 조금씩 따랐다. 엔디미온에게 유리잔 하나를 넘기자 갈색 액체가 물결을 쳤다.
엔디미온은 잠깐 잔을 들고 있다가 바로 유리잔을 비웠다. 성배는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들을 정화하는 힘이 있었다. 차 같은 것은 괜찮지만 술은 오래 들고 있으면 성수로 변해버렸다. 사정을 모르는 그림발드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호탕하군. 그거 꽤 독한 술인데.”
목이 타들어갈 듯 따가운 것이 정말 독한 술이었다.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덤덤한 모습을 연기했다.
“이제는 그림자 수도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내가 너무 수다스러웠군. 엔디미온, 내가 먼저 하나 묻지. 이 단추는 어디서 났는가?”
그림발드가 손가락으로 금색 단추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엔디미온은 바로 대답했다.
“날 습격한 마녀를 죽이고 얻었소. 할리아에서 로게나로 가던 중에 공격을 받았지.”
“흠, 안 그래도 두 도시 사이에 악귀들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성기사들을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자네가 먼저 해결했군. 설마 악귀들을 부리던 자가 그림자 수도회의 마녀였을 줄이야.”
“그림자 수도회가 뭐하는 놈들이오?”
“뭐하는 놈들이긴. 아주 고약한 놈들이지.”
그림발드의 손이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술로 입술을 약간 적신 후에 다시 잔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아주 구역질나는 놈들이야. 악귀들을 역병처럼 몰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지. 때로는 직접 식인을 하는 놈들도 있어. 어떤 마녀는 갓난아기를 잡아먹으면 자신의 수명이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아기를 무려 다섯 명이나 먹어치우기도 했지.”
“그 마녀는 어찌 됐소?”
“죽었지. 내가 죽였다네. 은신처에서 정신없이 아기를 먹고 있는 마녀의 뒤통수에 칼을 꽂고 창으로 심장을 뽑아내서.”
유리잔에 그림발드의 눈동자가 비쳤다. 갈색의 눈동자는 거대한 나무의 기둥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엔디미온은 그 안에 담긴 조용한 증오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림발드는 다시 한 번 술로 입을 축였다. 그는 목을 타고 흐르는 뜨거움을 느끼며 말했다. 타오르는 것은 그의 목구멍만이 아니었다. 갈색의 눈에도 불이 붙은 듯 불티가 튀었다.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지. 그 말이 딱 맞아. 악마숭배자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악마보다 더 역겨우니 말이야. 나는 아기를 처먹고 있는 마녀를 보고서 이 개 같은 것들을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없애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신성한 의무를 행하는 자이자 성배기사의 적생자인 내 역할이니까.”
엔디미온은 그림발드의 증오를 이해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웠다. 대악마를 죽인 영웅들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아직 악마들로부터 세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율리아는 영웅에 대해 말했으나 엔디미온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들은 영웅에 매달려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저항의 의지는 날카로운 창날이었고 튼튼한 철벽이었다. 강력한 의지는 영웅이 없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혹시 그림자 수도회에서 숭배하는 악마의 이름을 알고 있소?”
그림발드는 유리잔 안의 술을 단숨에 비운 후에 말했다. 숨결에서 술냄새가 났다.
“그건 왜?”
“그 구역질나는 놈들의 뿌리를 뽑아야 하니까. 악마의 하수인이 되려는 멍청한 놈들은 세상에 널려 있으니 아무리 많은 악마숭배자들을 죽여도 그들의 해악은 줄지 않소. 정말 그들을 없애려면 악마를 죽여야 하오. 다리가 아니라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소리지.”
엔디미온이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본 그림발드가 빈 유리잔에 술을 채웠다. 그가 엔디미온의 잔에도 다시 술을 채웠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바로 잔을 잡지 않았다. 유리잔을 잡으면 술이 성수로 변하기 전에 마셔야 했다. 그는 잔을 단숨에 비울 자신이 없었다.
그림발드가 손목을 흔들어 유리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악마사냥꾼치고 그럴듯한 소리를 하는군. 그들은 언제나 돈이 우선이던데.”
“난 악마사냥꾼이 아니라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오. 그 차이는 크지.”
엔디미온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림발드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림자 수도회에서 섬기는 악마는 커다란 날개를 가졌고 입에서 불을 뿜는다네. 황금색 눈은 진실과 거짓을 명백히 구분하며 때로는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고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 버린다고 하더군.”
“현학적이군.”
엔디미온은 차분히 덧붙였다.
“개소리란 뜻이오.”
그림발드가 입을 벌리며 웃었다. 그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악마는 거인의 몸에 염소의 머리를 가졌으며 꼬리 대신에 뱀을 달고 있다네. 날개는 박쥐의 것이며 꼬리의 뱀은 언제나 사악한 마기를 내뿜어서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인다는데 참 끔찍한 일이지.”
엔디미온은 악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그가 아는 악마일지도 몰랐다.
“엔디미온, 어째서 그림자 수도회 같은 것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지 아는가?”
그림발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그 뒤에 있는 악마 때문이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악마를 죽이지 않으면 그 하수인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아. 용기 있는 몇 개의 교구가 연합하여 토벌대를 꾸려서 악마를 없애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 나는 토벌대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생존자들에게 그 악마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네. 그건 수백 명의 성기사들이 달려들어도 처치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강력한 존재야.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겠나, 엔디미온?”
목소리는 단호했다. 엔디미온은 눈을 내리깔고서 유리잔만을 보고 있었다.
“이건 자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만약 자네가 그 악마를 꼭 죽여야겠다면 토벌대에 지원하게. 다시 토벌대가 꾸려지는 것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내가 추천서를 써주지.”
“백 년 전에는.”
엔디미온이 유리잔을 들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목구멍이 찌르르 했다. 술 때문에 목소리를 떨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했다.
“성기사 한 명이 악마 하나를 상대했소.”
그림발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도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무려 백 년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때의 기준을 들이미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대악마의 존재는 세상은 아주 크게 후퇴시켰다. 하지만 성기사들의 힘은 약해졌어도 그들의 신앙심만은 백 년 전과 똑같았다. 그림발드는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그가 엔디미온에게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엔디미온이 다시 말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그림발드. 나는 성기사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그 누가 비웃을 수 있겠소? 성기사들은 모두 스스로 가시밭길을 가는 고행자이며 영웅들의 진정한 적생자요. 나는 언제나 그대들에게 감사하고 있소.”
성배기사로서 말이오. 엔디미온은 뒷말을 삼켰다.
“사악한 것들을 죽이는 것은 내 의무이니 그림자 수도회를 무너트리는 것은 마땅히 내가 하겠소. 당신은 그저 내게 그 악마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될 뿐이오.”
집무실 안은 어둑했다. 창문은 있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광량이 적어서 낮인데도 빛이 없었다. 그 때문에 곳곳에 양초를 켜두었다. 따스한 주홍색 빛을 발하는 양초들 때문에 눈이 건조했다. 그림발드는 반사적으로 눈을 비볐고 순간적으로 세상이 뭉개진 것처럼 뿌연 색깔로 보였다.
흐려진 양초의 빛들은 마치 엔디미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태양의 빛무리처럼 얼굴을 둥글게 감싸는 빛들은 마치 후광처럼 보였다. 그림발드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맨눈으로 태양의 빛을 본 것처럼.
“악마는 어디에 있소?”
대답해야 했다. 그림발드는 본능에 따랐다.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동쪽으로 나흘 정도 가면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 거기가 악마의 보금자리야.”
“알겠소.”
그림발드는 얼른 눈을 비볐다. 세상이 다시 선명해졌다. 엔디미온의 얼굴 뒤로 비추는 후광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착시였을 뿐이었다.
“엔디미온, 정말 그 악마를 죽이러 갈 생각인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 난 자네 같은 용기 있는 청년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언젠가 다시 토벌대가 꾸려질 것이니 그때 함께······.”
“라가르디오.”
엔디미온이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 악마의 이름이오. 불 뿜는 거인 라가르디오.”
그림발드는 깜짝 놀랐다. 그가 말한 적도 없는 악마의 이름을 엔디미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소. 라가르디오라면 내가 좀 아는데 대단한 악마는 아니오. 그 친구가 백 년 전에 성배기사에게 얻어맞고 울면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