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쌀쌀맞은 말이지만 틀린 것은 없었다. 성기사들 중에는 악마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들이 많았다. 멜리사가 성기사가 된 것 역시 그 때문이었고 엔디미온을 따라가려는 것도 라가르디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엔디미온의 말대로 흔해빠진 이야기였다. 굳이 시간을 내서 들어야 할 이유가 없을 만큼.
엔디미온은 그대로 방으로 돌아갔다. 멜리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아무 말이 없었다. 베로니카는 이 분위기가 몹시 답답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멜리사 씨, 너무 신경 쓸 것 없어요. 엔디미온 씨도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까요. 자, 식사 다하셨으면 방으로 갈까요?”
멜리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흔해빠진 이야기인걸요.”
엔디미온이 여관에 잡은 방은 두 개였다. 라이오넬은 베로니카의 도움으로 엔디미온의 방으로 갔고 베로니카도 멜리사와 함께 자기 방으로 갔다. 그들은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기 위해서 미리 짐을 싸고 일찍 잠에 들었다.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잠에서 일어난 엔디미온은 일행들을 깨워서 바로 마구간으로 갔다. 멜리사도 여관 뒤쪽에 있는 마구간에 탈것을 맡겨 두었다고 했다. 그들은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있는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돌려받았다.
세 마리의 말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나온 것은 노새였다.
“이건 노새인데요?”
베로니카가 마구간지기를 보자 그는 멜리사를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멜리사에게 모였다. 그녀는 약간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제 노새입니다. 전 말 대신에 노새를 타거든요.”
그 말에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쟁이들이 말 대신에 당나귀나 노새를 탄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인 것 같은데 당나귀를 닮아서 이상하게 못생긴 노새를 쳐다보자 입을 벌리고 이를 부딪쳐 딱딱 소리를 냈다. 성격 나쁜 노새였다.
“혹시 제가 길잡이를 해도 되겠습니까?”
누구보다 빠르게 로게나에서 나온 엔디미온 일행은 이제 라가르디오의 동굴을 향해 가고 있었다. 멜리사는 자신이 길잡이를 하겠다고 자청했고 엔디미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발드는 그저 동쪽으로 가면 산이 있고 그 안에 동굴이 있다는 것만 가르쳐주었다. 그 때문에 사실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멜리사가 다행히도 길을 아는 듯 했다.
하늘에서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따사롭게 빛을 비추는 태양 덕분에 몸이 따뜻해졌다. 그들은 말 못지않게 잘 달리는 노새의 뒤를 따라서 달렸다. 점심은 보존식량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저녁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가을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졌다. 엔디미온은 더 달릴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식사 준비를 했다. 멜리사가 부지런히 움직여서 땔감을 한가득 가져왔다. 키는 작았지만 난쟁이답게 힘이 장사였다. 베로니카가 땔감에 불을 붙였다. 엔디미온은 가방에서 식자재들을 꺼냈다. 그가 칼로 대충 양파를 썰고 있는 모습을 보던 멜리사가 말했다.
“혹시 제가 식사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엔디미온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양파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넘겨받은 멜리사는 가방 안에서 찾은 버터를 잘라서 솥 안에 넣었다. 그리고 양파들을 더 썰어서 버터와 함께 솥 안에서 달달 볶았다. 양파들이 갈색으로 변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물을 붓고 소금을 약간 넣었다. 숟가락으로 맛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국자로 양파스프를 떠서 각 그릇에 담아주었다.
뜨끈한 김이 오르는 그릇을 받은 엔디미온은 한 입 먹어보고서 그 맛에 감탄했다. 약간 양파의 단맛이 감돌면서 고소한 맛이 났다. 간단한 요리지만 맛있었다. 그들은 햄을 약간 잘라서 스프와 함께 먹었다. 금세 식사를 끝마치고서 베로니카가 뒷정리를 했다. 멜리사는 뒷정리도 자기가 하겠다고 말했지만 베로니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멜리사 씨. 요리를 따로 배운 건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원래 출정을 나갔을 때 식사를 준비하는 건 종자들의 몫이라서요. 종자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요리 실력이 늡니다.”
뒷정리까지 끝마치고 나서 엔디미온 일행은 잠을 잘 준비를 했다. 대강 자리를 깔고 불침번 순서를 정했다. 첫 번째 순서인 엔디미온을 제외하고서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모닥불 안에 땔감 하나를 더 던지고서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불티가 탁탁 튀었다.
“잠이 안 오는 모양이오.”
엔디미온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멜리사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잠이 오질 않는군요.”
엔디미온은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바닥에 꽂았다. 베로니카는 벌써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고 라이오넬 역시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노숙을 할 때 잘 자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몸이 힘든 만큼 휴식을 잘 취해야 내일 또 움직일 수 있었다.
“잠자리를 가리는 모양이오.”
“아, 그건 아닙니다. 저는 본래 바닥에 머리만 대면 자는데 오늘따라 잠이 안 오는군요.”
멜리사가 머쓱하게 웃었다. 엔디미온은 멜리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림발드에게 이야기는 하고 온 거요?”
“아, 그건······.”
나쁜 일을 하다가 걸린 꼬마처럼 멜리사는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말했다.
“아니요. 그냥 나왔습니다. 각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라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돌아가면 성기사 자리를 박탈당하겠군.”
“······그래도 괜찮습니다. 라가르디오만 죽일 수 있다면.”
마냥 순하게만 보였던 적갈색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엔디미온은 눈동자 안에서 일렁거리는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멜리사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라가르디오를 죽이기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을 바쳐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역설적인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나섰소? 정말로 내가 라가르디오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멜리사가 침묵했다. 엔디미온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나였다면 토벌대가 다시 꾸려지는 것을 기다렸을 것이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라가르디오를 죽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토벌대는 이미 한 번 라가르디오에게 졌습니다.”
“그럼 당신은 토벌대도 죽이지 못한 라가르디오를 우리가 죽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오?”
멜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리를 몸 쪽으로 끌어당겨서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 상태에서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저는 날 때부터 어머니가 없었고 가족이라고는 아버지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어머니가 없는 만큼 아버지가 절 더 사랑해주셨으니까. 아버지는 성기사였고 수많은 사악한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하셨습니다. 딱 한 번 지셨지요. 그리고 그 한 번 때문에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악마가 바로 라가르디오입니다. 아버지는 토벌대에 참가하셨거든요.”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어쩌면 전 살아있는 것에 지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라가르디오와 싸우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끝내버리려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럼 곤란한데.”
엔디미온은 다시 부지깽이를 뽑아서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재가 열기를 타고 춤을 추었다.
“뭐가 곤란하다는 소리입니까?”
“라가르디오에게 죽으러 간다면서. 그런데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죽이러 가는 길이오. 그러니까 곤란하지. 당신이 우리보다 먼저 가야겠소. 그래야 라가르디오에게 죽을 것 아니오?”
“네? 아니, 그, 저, 그게 무슨?”
멜리사는 고개를 들고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라, 라가르디오는 엄청 강력한 악마입니다.”
“백 년 전에는 그런 악마 따위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소.”
“배, 백 년 전이요?”
“하나 가르쳐주겠소, 멜리사. 내 이름은 엔디미온인데 이건 성배기사의 이름이오. 그리고 성배기사는 수많은 악마들을 학살하고 결국에는 대악마까지 죽였지. 진다는 것이 무엇이오? 난 모르겠군.”
자신감 넘치는 말에 멜리사는 당황해서 입으로 이상한 소리만 냈다. 엔디미온은 부지깽이를 모닥불 안에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상한 태도로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털었고 좌우 어깨를 번갈아가면서 빙빙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멜리사가 눈을 크게 떴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마치 곰인형 같았다.
“아, 그리고 라가르디오에게 가는 길에 성가신 일들이 좀 생길 것이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내가 해결하겠소.”
엔디미온은 이 근처에 라가르디오의 하수인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감각은 민감해서 어떠한 어둠도 눈을 가릴 수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악귀들의 모습이 모닥불의 불빛에 의해 드러났다.
백 년 전에 흔히 보던 개를 닮은 악귀들이었다. 들개보다는 크고 늑대보다는 작았다. 악귀 무리의 중심에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놈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무리의 대장인 듯 했다. 두 개의 머리가 낮게 으르렁대면서 침을 뚝뚝 흘렸다.
숫자는 대략 악귀 열 마리 정도였다.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오히려 불침번 서는 동안 시간 보내기에 딱 알맞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 어떤 악귀부터 머리를 터트릴까 고민하고 있었다. 악귀들은 컹컹 짖으면서 엔디미온을 위협했다. 그 소리에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이 벌떡 일어났고 악귀들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엔디미온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단한 주먹으로 제일 먼저 달려드는 악귀의 머리를 후려갈기려고 할 때였다. 붕붕 하고 무언가 날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악귀의 머리가 공중에서 박살났다. 부러진 이빨과 뭉개진 살점들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그답지 않게 멍청한 얼굴로 들었던 주먹을 다시 내렸다.
“이 주둥이를 찢어버릴 악귀 놈들아! 신성한 전능자의 이름으로 대가리를 박살내주마! 거기 딱 기다려!”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간 것은 멜리사였다. 그녀는 한 손에는 방패를 들었고 얼른 뛰어나가서 바닥에 떨어진 메이스를 다시 집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악귀의 머리를 메이스로 깨부순 후에 다른 쪽에서 뛰어드는 악귀의 공격을 방패로 막았다. 작은 체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으로 악귀를 힘껏 밀자 그것이 발라당 뒤로 넘어졌다. 악귀가 몸을 일으키기 전에 방패의 끝부분으로 눈을 찌르고 연달아 메이스를 휘둘러서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수줍음 많던 소녀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무자비하게 악귀들을 박살내는 한 명의 성기사뿐이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잘 싸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