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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사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서 재빠르게 악귀들 사이를 움직이면서 하나씩 그것들을 처리했다. 메이스를 휘둘러 다리뼈를 박살내 몸을 휘청거리게 만든 후에 바로 방패로 머리를 후려갈겼다. 방패를 단순히 방어구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로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방패술을 상당히 단련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혼자서 네댓 마리의 악귀들을 처치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악귀들의 숫자가 많았다. 아무리 상등기사라고 해도 혼자서 그들 전부를 죽일 수는 없었다. 잠에서 깬 베로니카가 얼른 주문을 외워서 멜리사에게 달려드는 악귀를 밀어냈다. 그 사이에 검을 뽑은 라이오넬이 순식간에 악귀 하나의 다리를 자르고 넘어지는 악귀의 정수리를 폼멜로 세게 내리찍었다.
엔디미온은 끼어들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이만한 실력자가 셋이면 열 마리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뒤에서 멜리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의 도움 덕분에 더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적들을 처치했다. 과연 상등기사다운 무용이었다.
“빛이여!”
멜리사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악귀를 보고서 메이스를 머리 위로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메이스의 뭉툭한 부분이 빛나면서 악귀가 뒤로 날아갔다. 검은색 털에서 빛가루가 번쩍거리는 듯하다가 갑자기 불꽃이 되어서 타올랐다. 악귀는 짐승들이 으레 그러듯 낑낑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난쟁이 성기사는 몸에 불이 붙은 악귀를 자기 손으로 끝장내지 않았다. 그건 악귀가 조금이라도 더 고통스럽게 죽길 바라서 한 일이었다. 그들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으니 그들의 죽음도 그래야 했다. 멜리사의 눈에서도 불티가 튀었다.
“악귀들을 왜 꼭 밤만 되면 나타날까요. 지난번에도 그랬고. 그냥 낮에 나타났어도 됐잖아?”
베로니카가 악귀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구시렁댔다. 엔디미온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의 흥미를 끄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면서 악귀들의 시체를 빤히 보고 있는 멜리사에게 걸어갔다.
“그 무기 말인데 특별한 힘을 가진 것 같더군.”
“아, 이 메이스 말씀입니까? 제 아버지께서 쓰시던 무기인데 지금은 제가 쓰고 있습니다. 저희 가문은 대대로 성기사 일을 했는데 보통 장자에게 이 메이스를 물려주었습니다. 저는 딸이지만 아버지께 다른 자식이 없어서 제가 물려받았고요.”
“잠깐 볼 수 있겠소?”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엔디미온에게 메이스를 넘겨주었다. 그는 그것을 잠깐 보다가 라이오넬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것 좀 봐.”
“안 보이는데 보긴 뭘 보나. 난 장님일세.”
“아, 그랬지.”
백 년 동안 뭐하고 다녔는데 장님이 됐을까. 엔디미온은 혼자서 메이스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신성력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는 멜리사에게 다시 메이스를 돌려주었다.
“혹시 이 무기에 이름이 있소?”
“아, 있습니다. 하마르딩게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그건 뚜껑따개라는 뜻이오.”
“네?”
멜리사가 엔디미온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디미온은 다시 말했다.
“고대 난쟁이어로 하마르딩게는 뚜껑따개라는 뜻이오.”
고대 난쟁이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멜리사가 하마르딩게의 뜻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백 년 전에도 난쟁이어는 이미 고대의 언어였다. 그 시절에도 무기에 고대 난쟁이어로 지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멜리사는 자기 무기의 진정한 이름을 알고 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건 마치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보검의 이름이 사실은 이쑤시개였다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뚜껑따개라니? 대체 왜 그런 이름을?
“그건 백 년 전의 유명한 난쟁이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요. 아직까지 남아있을 줄은 몰랐군.”
멜리사는 멍한 얼굴로 엔디미온을 보며 물었다.
“그, 대체 왜, 왜 이름이 뚜껑따개인가요? 이걸로 술병 뚜껑이라도 따는 건가요?”
“뚜껑을 따긴 따는데 술병 뚜껑을 따는 건 아니오.”
엔디미온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적들의 머리 뚜껑을 따버리지. 그래서 뚜껑따개요. 그 무기를 만든 장인이 좀 괴짜거든.”
멜리사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런 이유가 있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무기를 쳐다보았다. 백 년 전 장인이 만든 무기라고 하니 무언가 달라보였다.
엔디미온은 목소리를 낮추며 라이오넬과 이야기했다.
“저거 멜리아나가 쓰던 무기 아닌가?”
“뭐? 뚜껑따개?”
“그래, 하마르딩게, 뚜껑따개 말이야.”
멜리아나는 백 년 전에 악마들과 싸웠던 성기사의 이름이었다. 여자 난쟁이였는데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한 기사였다. 그리고 술을 아주 잘 마셨다. 대악마를 죽였던 영웅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강력했고 수많은 공적을 세운 성기사였다. 엔디미온도 몇 번 전투를 함께 할 때가 있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던 몇 안 되는 성기사이기도 했다.
“가문 대대로 성기사 일을 했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멜리사가 멜리아나의 후손인 모양인데.”
“아, 멜리아나. 알지. 술을 잘 마시던 여자였어.”
라이오넬이 혼자 옛 생각에 잠겨서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은 멜리사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백 년 전 함께 싸웠던 전우의 후손과 만나서 다시 한 번 악마를 죽이러 간다니. 그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둘이서 뭘 속닥거리고 있어요? 얼른 잘 준비나 하자고요.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할 거잖아요?”
베로니카의 말에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주변에 널브러진 악귀들의 시체를 대충 치워버리고 다시 잠을 잘 준비를 했다. 시체에서 나는 악취가 고약했지만 잠자리를 바꾸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다행히도 다시 악귀들이 습격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림발드는 나흘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멜리사는 방향만 잘 잡으면 사흘로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급할 것도 없지만 느지막이 가야 할 이유도 없기에 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오늘도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을 말을 타고 달렸고 식사 시간이 되면 배를 채웠으며 밤이 되면 잘 준비를 했다.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밤만 되니 이번에도 라가르디오의 하수인들이 나타났다. 어제보다 숫자가 많았고 악귀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어제 상대했던 악귀들이 열 마리, 그리고 두 발로 걸으면서 길쭉한 촉수 따위를 휘두르는 악귀가 아홉 마리, 그리고 악귀들의 대장처럼 보이는 거미 같은 악귀가 한 마리였다.
악귀들의 숫자는 어제보다 두 배였고 종류도 당했지만 그래도 엔디미온 일행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멜리사는 악귀들을 상대할 때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무참히 악귀들을 처단했다. 때때로는 자기 몸이 다치든 말든 악귀들을 죽이는 데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늘 밤에도 악귀들이 나타날까요? 어제 한 마리 정도는 살려서 돌려보낼 걸 그랬어요. 그래서 습격할 거면 일찍 오라고 말 좀 전해달라고 하게.”
베로니카가 툴툴 댔다. 그들은 사흘째 저녁을 맞이했고 방금 막 식사를 끝냈다. 분명 오늘 밤에도 악귀들이 나타날 것인데 미리 저녁식사를 해두지 않으면 구역질나는 악귀들의 시체를 보면서 식사를 해야 했다. 그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뒷정리를 끝내고 악귀들의 습격에 대비했다. 엔디미온의 코가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무기를 꺼냈고 악귀들과 싸울 준비를 했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면서 나타난 악귀들의 숫자는 서른 마리였다. 하지만 긴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베로니카도 이제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의 힘을 믿고서 악귀들 따위에 긴장하지 않았다. 멜리사는 오히려 흥분한 것처럼 입술을 꽉 다물고서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개를 닮은 악귀들이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싸움이 시작됐다. 두 명의 영웅은 오늘도 그들의 강력함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활약 덕분에 멜리사가 죽여야 할 악귀들의 숫자는 확 줄어들었다.
멜리사는 진정한 이름을 알게 된 메이스를 들고서 열심히 악귀들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뚜껑따개라니. 머리통을 깨고 부술 때마다 참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기합을 지르며 성기사가 아니라 마치 광전사처럼 날뛰었다. 메이스에서 빛이 번쩍였고 거기에 두들겨 맞은 악귀는 신성한 불꽃에 집어삼켜졌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오직 악귀들만 보였다.
“다 죽어라, 이 개 같은 놈들! 광휘와 광명과 광화의 이름으로, 죽어라! 죽어!”
그녀는 메이스를 휘두르려다가 어느새 주변이 다 정리된 것을 보고서 손을 늘어트렸다. 엔디미온이 악귀들의 대장을 죽이는 것으로 싸움은 끝이 났다. 멜리사는 멍하니 있다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는 엔디미온에게 가서 물었다.
“저, 혹시 뭐하시는 분입니까?”
그 질문이 우스워서 엔디미온이 작게 웃었다.
“뭐하는 사람 같소?”
“악마사냥꾼들 중에도 강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랬다면 제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겁니다. 성기사였다면 제가 몰라봤을 리가 없고요.”
“그 말이 맞소. 난 그냥 악마들 쳐죽이는 사람일 뿐이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입니다만······.”
엔디미온은 그녀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빙긋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백 년 전 성배기사의 환생이 아닙니까?”
성배기사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는 없고 살아있다고 해도 청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니 멜리사의 말은 가능성 있는 질문이었다. 엔디미온은 자기 전우의 까마득한 후손을 보며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특등기사 중에서도 당신처럼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성하의 여섯 기사들만큼이나 강합니다.”
성하라면 여명교단의 교황을 말한 것일 터였다. 엔디미온은 교황의 기사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자기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강한 성기사가 여섯이나 있었다면 세상에 악마와 악귀 같은 것은 한 마리도 남지 않았을 것이니까. 그들이 얼마나 강하든 끽 해야 백 년 전 성기사들 수준일 것이다.
“그래서?”
“말이 안 된다는 소리입니다. 제가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만큼 당신의 강함은 말이 안 돼요.”
아무래도 성배기사의 환생 어쩌고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차차 알게 될 거요. 아마 내일이면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