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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30화 (30/199)

30

멜리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지만 엔디미온은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는 아까 전에 자신이 죽였던 악귀의 시체를 발로 차서 밀어버렸다. 마치 잠잘 곳을 마련하는 것처럼 주변에 있는 시체들을 손으로 잡고 던지거나 발로 차서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벌렁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본 베로니카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악귀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손이나 다리 따위를 모아서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시체들을 땔감 삼은 모닥불이 주변에 온기를 뿌렸다.

“여기서 자려고요?”

엔디미온은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그는 별 하나 없이 깜깜한 하늘을 보며 말했다.

“이미 늦은 밤이야. 잠자리 찾아다닐 시간 없어.”

“하지만 이런 곳에서 잤다가는 가위 눌릴 것 같단 말이에요.”

“여기가 뭐 어때서? 쫑알거릴 시간 있으면 얼른 자.”

베로니카는 구시렁대면서도 잘 준비를 했다. 다시 수줍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멜리사는 손을 들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자기 전에 불침번 순서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엔디미온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불침번은 서지 않아도 괜찮소. 이제 악귀들이 습격할 일은 없을 것이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소. 첫째로 라가르디오는 하루에 두 번 악귀들을 보내지 않았소. 그리고 오늘의 악귀들은 우리가 방금 처치했지. 둘째로 이곳은 라가르디오의 영역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다니질 않소. 자는 동안 우리를 습격할 한심한 작자들이 없다는 소리지.”

그럴듯한 말이지만 멜리사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세상에 완전한 확신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 지금까지 라가르디오가 하루에 한 번만 악귀들을 보냈다고 해서 오늘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엔디미온의 말대로 이곳은 라가르디오의 영역이 아닌가. 오히려 습격자들을 여러 번 보낼 확률은 오늘이 더 컸다.

그녀는 그럼 자기 혼자서라도 불침번을 서겠다고 말했다. 참 성기사스러운 고지식함이었다. 엔디미온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그러라고 했다. 자기가 하겠다는데 뭐. 그는 곧바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베로니카가 그냥 자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멜리사는 고집스럽게 불침번을 섰다.

멜리사를 제외한 모두가 잠에 들었다. 그녀는 혼자서 검은 하늘이 어스름하게 변할 때까지 깨있었다. 여명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이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찬란한 빛을 뿌렸다. 엔디미온은 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몸을 일으켰다.

“정말 밤을 샌 거요?”

멜리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날이 밝을 때까지 혼자서 불침번을 섰지만 졸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베로니카가 감탄했다. 그러자 멜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종자 시절에 잠을 자지 않는 훈련을 합니다. 성기사가 돼서 출정을 나가면 언제나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루 정도는 거뜬합니다.”

베로니카는 사람들이 성기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저 혹독한 훈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하고 출발하자. 빠르면 저녁은 산을 내려와서 먹겠군.”

마치 가볍게 등산이라도 가는 것 같은 말에 멜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엔디미온은 불가해한 존재였다. 악귀 수백 마리가 몰려오더라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힘과 용맹함은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엔디미온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엔디미온은 오늘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멜리사는 궁금증을 잠깐만 참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엔디미온 일행은 자리를 정리했다. 그들은 산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울창해서 말을 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걸었다.

“분위기가 영 꺼림칙하네요.”

베로니카가 주변을 둘러보며 어깨를 당겨 목을 움츠렸다. 그녀의 말대로 주변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낮인데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새벽처럼 어스름했다. 가을인데 낙엽은 하나도 없고 이상할 정도로 나무들이 울창했다. 마치 누군가 억지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게 한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면서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듯한 소리를 냈다. 베로니카는 엔디미온의 등 뒤에 바짝 붙었다.

멜리사는 일찌감치 손에 메이스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했다. 이곳은 라가르디오의 영역이었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하군.”

한참 동안 걸었는데 주변 풍경이 달라지지 않았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자꾸만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아까 전에 자신이 밟아서 부러트린 나뭇가지를 보고서 미간을 좁혔다.

“베로니카.”

“넵, 베로니카 여기 있습니다.”

“마법.”

“네?”

“마법으로 길 좀 찾아보라고.”

아니, 내가 무슨 지도인 줄 아나. 베로니카는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말들을 삼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확인 좀 해보고요.”

베로니카는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그것을 손 위에 올려두고 방향을 확인하는데 나침반의 바늘이 쉬지 않고 돌아갔다. 아무래도 이 공간 자체에 방향을 잃게 하는 마법이 걸려있는 듯 했다. 그럼 어쩐다. 그녀는 이번에는 왼쪽 허리에 달린 주머니를 손에 들었다. 저번에 지하무덤의 입구를 찾을 때 했던 것처럼 고운 가루를 한 움큼 잡아서 사방에 뿌렸다.

멜리사가 그걸 보고 말했다.

“정화의 가루로군요! 그걸 뿌리면 마법이 효력을 잃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베로니카는 또 한 움큼 가루를 뿌리며 말했다.

“이건 그냥 밀가루인데요.”

“네?”

“밀가루라고요. 요리할 때 쓰는 밀가루.”

멜리사는 당황했다. 밀가루를 대체 왜? 그녀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은 베로니카가 말했다.

“제 경험에 따르면 대개 이런 마법은 효과를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말뚝 같은 걸 바닥에 박아두거든요? 그런데 그걸 그냥 아무 곳에나 두겠어요? 아마 투명화 마법이라도 걸어두었을 거고 투명한 물건을 찾으려면 이런 가루 같은 걸 뿌리는 게 제일이거든요.”

베로니카는 열심히 주변에 밀가루를 뿌렸다. 눈이 내린 것처럼 주변이 희게 변했을 때 밀가루가 공중에서 부자연스럽게 떠있는 곳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곳에 말뚝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진짜 정화의 가루를 꺼내서 그 위에 뿌렸다. 순간적으로 불티가 튀더니 무언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사방으로 나뭇조각이 튀었다.

멜리사는 입술을 오므려 오 하고 감탄했다. 베로니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정화의 가루는 아주 비싸거든요. 겨우 저런 거 하나 찾자고 사방에 뿌리는 건 낭비랍니다.”

“아, 전 몰랐습니다. 덕분에 오늘 한 가지 배우는군요.”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냥 가난한 마법사의 꼼수라고 생각해주세요.”

베로니카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멜리사를 보며 웃었다. 엔디미온은 박살난 말뚝을 한 번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가 달라진 거야.

“이거 마법 해제된 거 맞아? 달라진 게 없는데.”

“아니, 저 좀 믿으세요. 이건 금화 세 개 만큼의 활약이었다고요.”

“금화 하나.”

“좀 더 쓰시지.”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의 말을 무시하고 먼저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주변이 아주 고요했다. 가끔 바람 부는 소리가 날 뿐이었고 그 외의 소리라고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정말로 기분 나쁜 공간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같은 곳을 맴돌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확실히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가끔씩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가르디오는 아니었다. 그의 하수인이었다.

성기사인 멜리사에게 아직 들키지 않은 것을 보니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엔디미온은 모른 척을 하고 있어야 할지 아니면 얼른 찾아내서 그 머리통을 박살내 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저쪽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께서는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라고 하셨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투명한 막을 걷어내듯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키가 큰 남자였다. 그리고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었다. 남자는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아서 거대한 근육들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밑에 입은 반바지도 근육 때문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야성적인 느낌의 남자였다. 베로니카는 남자의 머리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늑대의 것이었다. 야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냥 야성 그 자체였다. 그녀는 혹시 꼬리도 있나 해서 눈알을 굴렸다. 억센 느낌의 꼬리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으엑.”

솔직히 기분 나쁘게 생겼다. 베로니카는 구역질나는 것을 봤을 때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주인님께서는 너와의 싸움을 고대하고 있으시다. 다시 말해서 너 말고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 죽여도 된다는 소리지.”

늑대인간을 보던 엔디미온이 입꼬리를 당겼다.

“너 이름이 뭐냐?”

“내 이름? 이든이다.”

“그래, 이든.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그럼 물론이지. 모를 리가 있나. 주인님께서 다 말씀해주셨거든. 난 주인님께서 가장 아끼는 부하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없지.”

“널 가장 아낀다고? 내가 볼 땐 네가 가장 쓸모없는 놈인 것 같은데.”

이든이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네가 뭘 알아!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여기 왔다는 것 자체가 버림패라는 뜻이야, 이 멍청한 개자식아.”

“개가 아니고 늑대다!”

그래서 뭐. 엔디미온은 자꾸만 까불거리는 이든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얼마나 나를 얕잡아봤으면 이딴 놈이 설쳐. 그는 얼른 악귀들을 처리하고 라가르디오를 만나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검을 뽑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이든이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다.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늑대인간이라서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반쯤 뽑은 검 대신에 한 발자국 물러나서 주먹으로 이든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든은 엔디미온에게 기다란 발톱을 휘두르기 전에 무언가에 공격이 막혔다.

챙챙 소리가 나면서 공중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든은 손톱을 자를 듯한 강력한 충격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는 엔디미온을 가리고 선 불청객을 보고서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넌 또 뭐야! 왜 끼어들고 난리야!”

“내가 누구냐고? 아주 좋은 질문이다.”

라이오넬은 숨을 크게 삼켰다가 내뱉으며 벼락처럼 외쳤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또 지랄이네. 엔디미온은 뒤로 물러나며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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