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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 일행은 말들을 근처 나무에 묶어두었다. 숨어있는 악귀들이 말들을 습격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동굴 안에 말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너무 거치적거리는 일이었다.
제일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동굴은 입구부터 컸다. 사람에게는 아주 컸지만 불 뿜는 거인이라 불리던 라가르디오의 덩치를 생각하면 적당한 크기였다. 동굴 안은 기분 나쁜 어둠으로 가득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자기 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둑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어둠도 성배기사의 두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 엔디미온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등 뒤에서 빛이 켜지는 것을 감지했다. 베로니카의 마법이었다. 엔디미온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오넬이야 걱정할 것이 없고 베로니카 역시 마법사니 자기 주변 정도는 빛으로 밝힐 수 있었다. 그러면 멜리사는 어쩌고 있을까. 슬쩍 본 그녀의 두 눈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도깨비불 같았다.
시선을 느낀 멜리사가 말했다.
“아, 이건 신성력을 두 눈에 집중시킨 겁니다. 이러면 어두운 곳에서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습니다.”
엔디미온도 알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신성력으로 육체를 강화시킬 수 있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신성력을 다루는 것 자체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신성력이 아니라 자신의 튼튼한 몸을 믿고서 싸웠다. 백 년 전에도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성기사는 드물었다.
성기사 멜리아나는 신성한 힘을 몸에 두르고 언제나 가장 용감하게 돌격하여 적들의 진형을 무너트렸다. 멜리아나는 공적으로 따지면 대악마를 물리친 영웅들의 바로 아래였고 멜리사는 그녀의 혈통이었으니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멜리아나만큼 강력한 힘은 아니었으나 성기사들의 힘이 약해진 요즘 시대에 신성력을 쓸 줄 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멜리사가 어린 나이에 벌써 상등기사의 자리에 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심해서 따라오시오. 동굴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내가 언제나 당신을 지켜줄 수는 없소.”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저는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의 성기사이며 전능자의 이름으로 불타는 철퇴를 휘두르는 징벌자입니다.”
엔디미온은 그냥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멜리사의 말대로 그녀는 엔디미온의 보호를 받아야 할 실력이 아니었다.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었고 엔디미온이 라가르디오를 상대하는 동안 성가신 악귀들을 대신 처리해줄 수 있었다.
“조용하네요.”
베로니카는 주변에 떠다니는 빛들을 움직여서 천장을 비추었다. 뿌연 색깔의 종유석들의 날카로운 끝부분이 빛을 받아서 반짝였다. 종유석 끝에 맺혀있는 물방울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뚝 아래로 떨어졌다. 어둠이 소리조차 잡아먹은 것처럼 불길한 고요함이 이어졌다.
적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일부러 긴장감을 늘리려고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이곳은 라가르디오의 영역이었고 침입자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긴장감은 몸을 지치게 만들었고 그것은 전투의 악영향을 미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지나칠 정도의 고요함, 머리 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그것들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토벌대를 꾸려온 성기사들을 상대로 이 전술은 유효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가르디오의 하수인들이 상대해야 할 침입자들은 성기사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악마의 하수인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라가르디오가 있는 곳까지 가겠다는 듯 성큼성큼 걸었다.
인내심 싸움에서 진 것은 악마의 하수인들이었다. 엔디미온은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는 그들의 기척을 느꼈다. 숫자는 이든이 악귀들을 끌고 왔을 때보다 적었다. 대신에 그때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악귀들이 많았다.
“······침입자들이 겁도 없이 이곳까지 들어왔구나.”
여자 목소리였다. 엔디미온은 두 눈으로 마녀의 모습을 똑바로 보았다.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머리에는 마녀답게 챙이 넓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너무나 정석적인 차림새라 웃음이 나왔다. 손에는 구불구불한 나무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보라색 수정이 박혀 있었다. 수정에서 음습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녀의 머리카락은 백색이었다. 악마의 힘을 받아서 머리가 세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악마의 힘 덕분에 젊음을 되찾았어도 희게 변한 머리카락만은 되돌리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엔디미온의 두 눈은 마녀의 어깨를 넘어서 그 뒤에 있는 악귀들을 쳐다보았다. 살덩어리를 이리저리 뭉쳐서 인간을 흉내 낸 듯한 모습이었다. 약간 붉은빛을 띠는 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유발했다. 그들은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과는 달랐다. 어떤 악귀는 머리가 두 개였으나 팔이 하나였다. 어떤 것은 다리가 네 개고 팔이 하나도 없었다. 악귀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사지의 개수가 제멋대로였다.
한 가지 공통점은 전부 다 구역질나게 생겼다는 점이었다.
“너희들의 싸움은 잘 보았다. 이든, 그 멍청한 놈은 주인님의 명령을 어기고 함부로 설치다가 목숨을 잃었지. 같은 악마숭배자로서 부끄러울 따름이야. 우리는 주인님의 충직한 종복이자 추종자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짐승은 처분해야 하는 것처럼 그 멍청한 개대가리가 죽은 것은 오히려 마땅한 처벌이었······.”
엔디미온은 마녀의 장황한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서 마녀를 향해 달렸다.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뒤에 주먹을 내질렀다. 그에게 있어서 가볍게 날린 공격일 뿐이었지만 마녀에게는 달랐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했다. 마녀 주제에 회피가 제법이었다. 엔디미온은 그대로 왼쪽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마녀가 마법으로 몸을 보호했다. 회색의 보호막에 주먹이 부딪히자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마녀가 뒤로 밀려났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씹! 말하고 있잖아! 뭐하는 짓거리야!”
“내가 그걸 왜 들어줘야 하는데.”
마녀는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가서 죽여! 저 망할 놈들을 다 죽이라고!”
마녀의 명령에 뒤에서 대기만 하고 있던 악귀들이 움직였다. 어쩌면 저건 악귀가 아니라 마녀의 사술로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몰랐다. 엔디미온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악귀의 얼굴에 일단 주먹부터 때려 박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렁한 살덩어리처럼 보이는데 막상 때려보니 아주 단단했다. 얼굴이 약간 찌그러진 악귀는 네 개나 되는 팔을 휘둘러서 엔디미온을 붙잡으려고 했다.
엔디미온은 오히려 자세를 낮추며 악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악귀의 허리는 통나무처럼 굵직했지만 성배기사의 엄청난 힘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엔디미온이 두 팔에 힘을 꽉 주자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악귀가 괴성을 지르며 네 개의 팔을 휘둘러 엔디미온의 등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악귀의 허리를 완전히 부러트렸다. 자세가 무너지는 악귀의 다리에 발을 걸어서 넘어트린 후에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악귀들의 일부는 엔디미온에게 달려오고 나머지는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마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검은색 화살들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엔디미온은 두 번째 악귀를 향해 달려갔다. 힘껏 내지른 주먹은 악귀의 배에 적중했다. 악귀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고 자연스럽게 허리가 굽혀졌다. 엔디미온은 악귀의 목을 손으로 끌어당기며 무릎으로 얼굴을 찍었다. 이번에는 악귀의 허리가 펴지면서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채찍처럼 날아간 발차기가 악귀의 목과 머리를 분리시켰다.
엔디미온이 악귀 한 마리를 상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무자비한 살육자처럼 악귀들을 한 마리씩 쳐부수며 마녀를 향해 전진했다. 머리를 부수고 다리를 부러트리고 목을 뽑았다. 악귀들이 아무리 육체를 단련했어도, 마녀의 사술로 육체가 강화됐어도, 악마로부터 넘치는 힘을 받았어도, 그 어떤 악귀도 성배기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죽어라! 죽어!”
마녀는 점차 다가오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초조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마법들을 모두 사용했다. 사악한 기운이 담긴 화살들을 연달아 쏘고 바닥에서 창칼이 솟아오르게 만들어 전진을 막으려고 했다. 또한 불꽃을 일으켜 엔디미온을 태우려고 했으나 그는 허리춤의 수통을 던져서 불꽃을 꺼버렸다.
마녀는 기가 막혔다. 성배기사의 위용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눈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라가르디오는 성배기사의 힘은 백 년 전보다 약해졌으니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고 했다.
그건 개소리였다. 성배기사는 여전히 강력했다. 마녀는 그 사실이 두려웠다. 백 년 전보다 약해진 지금도 이만큼 강한데 백 년 전에는 대체?
“뭐하고 있어, 이 멍청한 놈들아! 날 지키라고!”
마녀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자 악귀들 중 몇 마리가 돌아와서 엔디미온을 공격했다. 그 사이에 마녀는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그녀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으로 엔디미온을 죽일 생각이었다. 사악한 기운이 손끝에 모여들었다.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리듯 손 안의 사악한 기운들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그 크기를 키워갔다. 심호흡을 한 뒤에 충분히 커진 검은색 구체를 엔디미온을 향해서 휘둘렀다.
사악한 힘을 담은 구체는 세로로 길게 늘어나서 마치 칼날처럼 날아갔다. 그것은 동굴 바닥에서 천장에 닿을 만큼 길었고 천장과 바닥에 기다란 자국을 남기면서 질주했다. 악귀들 몇 마리가 그 공격에 휘말려 세로로 반쪽이 났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서 마녀는 오히려 웃었다.
아무리 성배기사라도 저 공격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힘이 다 빠진 그녀가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댈 때였다.
빛이 번쩍였다.
“제법이군. 저번에 내가 죽였던 그 마녀보다 강해.”
엔디미온은 멀쩡했다. 그는 손에 검을 들고 있었고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던 검은색 칼날은 온데간데없었다. 마녀는 눈을 찌르는 듯한 찬란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엔디미온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추고 있었다. 사악한 존재들을 태워버릴 듯 강렬한 빛이었다.
“호수의 여왕이 말했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마녀에게 걸어갔다. 그는 검을 다시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마녀는 몸을 떨면서도 도망칠 힘이 없었다. 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멱살을 붙잡았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 엔디미온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성배의 힘으로 약자를 돕고 불의를 행하지 말라. 아이와 노인과 여자를 때리지 말라.”
엔디미온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마녀의 입 안이 찢어져서 피가 튀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이 몇 개가 피 섞인 침과 함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저 뺨 한 대 맞았을 뿐인데 몸 전체가 저리는 느낌이었다. 마녀는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이 씹새야! 여자는 때리지 말라고 했다면서!”
“마녀는 때려도 돼.”
다시 한 번 커다란 손이 마녀의 얼굴을 때렸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마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엔디미온은 쉬지 않고 뺨을 갈겼다. 잠시 뒤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목이 부러진 마녀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고개를 떨구었다.
엔디미온은 쓰레기를 버리듯 마녀를 바닥에 휙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