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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정리된 것 같고.”
엔디미온은 탁탁 소리가 나게 손을 털었다. 마녀도 죽였으니 악귀들을 상대하는데 힘을 보탤까 했지만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멜리사가 기합을 지르며 메이스로 머리를 후려친 놈이 마지막 악귀였다. 머리가 깨지고 초록색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
마녀와 악귀들이 모두 죽은 후에 동굴은 다시 기분 나쁜 적막에 휩싸였다. 멜리사는 끈적거리는 불안감과 묵직한 긴장감에 몸이 뻐근했다. 그녀는 라가르디오의 생각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몇 개의 교구가 연합하여 꾸린 토벌대를 박살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악마가 어째서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꾸만 부하들만 보내고 라가르디오가 직접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 상황은 마치 라가르디오가 겁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에게? 엔디미온에게?
“이동한다.”
엔디미온 일행은 동굴의 더욱 안쪽까지 걸어갔다.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커졌고 나중에는 널찍한 광장이 나타났다. 그 안은 아까까지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무것도 없었던 통로와는 달리 이곳에는 벽 곳곳에 횃불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기름 먹인 천으로 나무를 감싸고 불을 붙인 그런 횃불이 아니었다.
벽에 붙어있는 것은 머리뼈였다. 기름으로 젖어서 반질거리는 머리뼈 안에는 초록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때문에 광장 안은 전체적으로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초록색 불꽃은 그림자를 춤추게 했고 벽에 비친 검은색 사람들은 키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이 기분 나쁜 공간을 보고서 입을 틀어막았고 멜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곳곳에 있는 뼈무덤을 보았다. 악귀들은 뼈를 던지고 받으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고 어떤 놈들은 과자를 먹듯 뼈를 씹어 먹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수많은 뼈들로 만들어진 의자였다. 화려한 모양을 하고 있는 의자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아주 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악마가 있었다. 불 뿜는 거인이자 진실과 거짓을 뒤바꾸는 자, 라가르디오였다.
“반갑지 않은 얼굴들이 있군.”
라가르디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불 뿜는 거인이라 불리는 자답게 그의 키와 덩치는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컸다. 허리는 거목처럼 굵었고 땅을 딛고 선 다리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악력만으로 사람을 터트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억센 손과 등 뒤에 달린 커다란 날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겁을 집어먹게 했다. 시각적으로 가장 강렬한 것은 바로 두꺼운 목 위에 달린 염소의 머리였다. 한 바퀴 꼬여서 좌우로 뻗은 뿔의 끝부분은 아주 날카로웠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두 눈의 동공은 세로로 쭉 찢어져서 한층 더 악마다운 느낌을 주었다. 라가르디오의 코끝에서 나오는 숨결은 불꽃이었다.
베로니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르할리나와 오르탈라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악마였다. 아르할리나 역시 백 년 동안 힘을 모았다지만 라가르디오는 애초에 체급 자체가 다른 악마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잘게 몸을 떨었다. 그 순간 누군가 손을 잡아주었다. 작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떨지 마십시오. 제가 함께합니다.”
작은 체구의 난쟁이 성기사는 자신도 떨고 있으면서 베로니카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그녀는 약간이지만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나한테 얻어맞고 울면서 도망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한데.”
엔디미온은 한 걸음 걸어 나오면서 웃었다.
“이런 곳에서 무게 잡고 있는 모습이 참 우습구나, 라가르디오.”
“울면서 도망쳐? 내가? 웃기는군. 악마는 울지 않는다.”
라가르디오가 코웃음을 치자 코끝에서 불길이 일었다. 엔디미온은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접었다.
“도망친 건 부정하지 않는군. 그래, 부하들이 본다고 무게를 잡더라도 양심은 있어야지.”
“넌 내가 아직도 백 년 전의 라가르디오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보기에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키가 좀 더 컸나? 매일 아침마다 체조라도 하는 거냐?”
엔디미온의 도발에 라가르디오는 푸르릉 소리를 내며 뜨거운 숨결을 뱉어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당장 덤벼들지는 않았다. 옛날과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백 년 전의 라가르디오는 오만하고 참을성 없는 악마였다.
“며칠 전부터 부하들만 보내서 깔짝거리기에 난 또 뭐 대단한 걸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군. 도망치려고 시간을 끈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쓸데없이 부하들을 낭비한 거냐.”
“내가 너와의 싸움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뼈로 만든 의자의 등받이에는 길쭉한 창 한 자루가 기대어 있었다. 라가르디오는 손을 뻗어서 그것을 잡았다. 창대는 새까만 색깔이었고 창날은 불꽃을 형상화한 듯 구불구불했다. 불 뿜는 거인이라 불리는 악마가 힘을 주입하자 창날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곧 뜨겁게 달구어졌다.
열기가 멀리 떨어져 있는 엔디미온의 얼굴에 닿을 정도였다. 라가르디오가 부웅 소리를 내며 창을 한 번 횡으로 휘두르자 열풍이 모두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베로니카와 멜리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라이오넬은 벌써 검을 뽑으려는 듯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자세를 낮추고 손잡이를 잡고 있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았다.
라가르디오는 숨결과 함께 불꽃을 내뱉으며 말했다.
“싸울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이지. 내가 왜 부하들을 의미도 없이 소비했냐고?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했거든.”
“준비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도 날 이길 것 같지는 않은데.”
“글쎄. 이번에는 너도 긴장 좀 해야 할 거다. 백 년 동안 내가 얻은 가장 강력한 무기는 난쟁이들을 납치해서 만든 이 창도 아니고.”
라가르디오가 창대의 끝으로 바닥을 쿵 소리가 나게 찍자 저들끼리 놀고 있던 악귀들이 모두 새빨간 눈을 빛내며 광장의 중심으로 모였다. 그 숫자가 일백은 될 듯 보였다.
“내 명령 한 번에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충직한 악귀들도 아니다. 바로 신중함이지. 그게 중요한 거야.”
옛날에 내가 너무 세게 때려서 맛이 가버렸나.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백 년 동안 벽만 보고 살면 미쳐버릴 수도 있지. 내가 잘 알아. 나도 백 년 동안 호밀만 보고 살았거든.”
“흐흐흐······. 언제까지 건방을 떨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꾸나, 성배기사야.”
성배기사.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것은 멜리사였다. 라가르디오는 분명히 엔디미온을 보고서 성배기사라고 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엔디미온의 등을 쳐다보았지만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라가르디오가 창을 휘두르자 그것이 신호가 되어 악귀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악귀들을 지휘하는 것은 악마숭배자들이었다. 모두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멜리사는 자세를 낮추고 방패를 들어서 달려드는 악귀를 뒤로 넘겨버린 후에 곧장 메이스로 다리를 부쉈다. 베로니카는 얼른 주문을 외워서 악귀들의 다리를 얼려 움직임을 저지했으며 그 사이에 뛰쳐나간 라이오넬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럼 무슨 배짱으로 도망도 안 가고 있었는지 한 번 보자고.”
엔디미온은 검을 뽑아들고 라가르디오를 향해 달려갔다. 악귀들은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성배기사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 악마 라가르디오만 얼른 해치우면 금방 끝날 싸움이었다. 그는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베어버리며 질주했다.
라가르디오 역시 커다란 몸을 움직였다. 그가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쿵쿵 소리가 났다. 거대한 악마는 창을 휘둘러서 길을 가로막고 있는 악귀들을 한 번에 너댓 마리씩 날려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엔디미온 하나뿐이었다. 악귀들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방해일 뿐이었다.
불 뿜는 거인이 휘두르는 창은 날카롭기도 했지만 열기가 엄청났다. 그것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열풍이 불었고 창날에 닿은 것은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엔디미온은 일단 창을 피해서 뒤로 물러난 후에 라가르디오가 창을 뒤로 잡아당기는 순간에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은 각력은 단단한 돌바닥을 박살냈다. 달려간다기보다는 날아간다는 느낌으로 움직이던 엔디미온은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노리는 것은 라가르디오의 두꺼운 다리였다. 다리에는 가죽으로 만든 각반을 차고 있었는데 기름을 먹인 듯 반들거렸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으로 휘두르는 검의 날카로움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검은 가죽 각반을 종이 자르듯 베었고 라가르디오가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창을 크게 내리쳤다. 엔디미온은 뒤로 뛰는 대신에 더 안쪽으로 달렸다. 역수로 든 검을 라가르디오의 발등에 세게 내리찍었다. 비명 대신에 날아온 것은 성난 발차기였다.
엔디미온은 바닥을 한 번 구른 뒤에 빠르게 다시 일어났다. 그가 달려가기 전에 라가르디오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악마 아르할리나도 손에서 검은색 불꽃을 뿜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뜨거운 불꽃이었다. 그것은 마치 아가리를 쩍 벌린 뱀처럼 엔디미온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처음에는 성수로 대항하려고 했으나 아까 전에 마녀를 상대할 때 수통을 던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몸 안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은은한 빛이 몸을 감쌌다. 그 상태에서 불꽃이 엔디미온의 몸을 집어삼켰다. 불꽃은 마치 회오리치듯 회전하다가 검에 힘을 실어서 한 번 휘두르자 반으로 갈라졌다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게 백 년 전이랑 다를 게 뭐냐?”
라가르디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창을 잡은 손을 어깨 뒤로 뺐다가 아주 빠르게 내질렀다. 공격은 한 번이 아니었다. 창끝이 수십 번 엔디미온을 노렸다. 몸 안에서 들끓는 신성력을 눈에 집중시키자 날아오는 창의 경로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엔디미온은 검을 들어서 공격을 막았다. 치열한 공방 때문에 사방으로 불티가 튀었다. 단순히 창과 검이 부딪혀서 불티가 튀는 것이 아니라 라가르디오가 가진 불을 다루는 힘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날아간 불씨들은 온갖 것들에 달라붙어서 순식간에 타올랐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 때문에 이제 공기는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숨을 쉬려고 공기를 삼켰다가는 목구멍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라가르디오는 엔디미온이 공격을 모두 막아내자 등 뒤의 커다란 날개를 움직여 바람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엔디미온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리를 들어서 그의 몸을 걷어찼다. 그리고 황금색 눈을 빛내며 들고 있던 창에 힘을 잔뜩 실었다. 그것을 횡으로 크게 휘두르자 열풍이 불면서 불꽃의 칼날이 공기를 태우며 날아갔다.
발차기를 맞고 방금 막 바닥에서 다시 일어난 엔디미온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꽃의 칼날이었다.
“오우 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