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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34화 (3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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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일어나자마자 다시 한 번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는 바닥을 구르다가 몸에 붙은 불꽃을 손으로 탁탁 털어낸 후에 정면을 보았다. 다시 한 번 날아오는 불꽃의 칼날을 보고서 이번에는 바닥을 구르는 대신에 정면에서 맞서는 것을 택했다. 신성력을 끌어올리고 라가르디오를 향해 뛰었다.

날아온 불꽃의 칼날을 검으로 잘랐다. 불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엔디미온이 들고 있는 검은 옅은 빛을 뿌리면서 황금색으로 빛났다. 일시적으로 성검과 같은 효력을 얻게 된 검은 어서 악마를 죽이라는 듯 웅웅 소리를 내며 작게 떨렸다. 철검에 신성력을 잔뜩 들이부은 것이기에 검의 수명을 소모하는 일이지만 지금 당장은 라가르디오를 죽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검이야 나중에 새로 구하면 될 일이었다.

빠르게 라가르디오에게 접근한 엔디미온은 빛을 뿌리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다시 한 번 다리 각반을 자르고 이번에는 그 밑에 있는 살갗까지 한꺼번에 베었다. 초록색 액체가 확 튀었으나 엔디미온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라가르디오만 보고 그를 죽일 생각만 해야 했다.

라가르디오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후에 이번에도 엔디미온을 걷어차려고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빨랐고 재빠르게 다리 사이를 통해서 뒤쪽으로 돌아갔다. 발목 부분을 노리고 검을 휘두르자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입에서 튀어나오는 비명은 마치 천둥소리 같아서 모두를 움찔하게 했다.

“백 년 전에 도망칠 때도 그런 비명을 질렀지.”

엔디미온은 웃으며 다시 라가르디오의 정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악마의 정강이에 검을 꽂았다. 엄청난 각력을 이용해 뛰어오른 후에 그걸 밟고 다리에 매달리고서 다시 검을 뽑았다. 다리 각반에 튀어나온 부분들을 손으로 잡고 다리를 올라서 허벅지까지 훌쩍 올라왔다.

라가르디오는 당연히 개미처럼 달라붙은 엔디미온을 떨쳐내기 위해서 다리를 흔들었으나 허벅지에 검을 박고 검 손잡이를 단단히 잡은 그를 떨어트릴 수는 없었다. 화가 난 라가르디오는 손을 뻗어서 엔디미온을 잡으려고 했다. 거대한 손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검을 뽑아서 이번에는 손에 꽂았다. 라가르디오의 손 위에 올라탄 후에는 검을 뽑고 바로 어깨까지 달렸다.

“쥐새끼 같은 놈!”

성이 난 라가르디오가 손을 털어서 엔디미온을 떨쳐냈다. 공중에 떠오른 그는 한 바퀴 회전한 후에 떨어지면서 라가르디오의 목덜미에 검을 꽂았다. 충만한 신성력이 상처 안을 헤집었다. 불 뿜는 거인이라 불리던 강력한 악마도 몸을 태우는 듯한 신성력의 고통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는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손으로 엔디미온을 후려쳤다.

손에 맞고 밑으로 떨어진 엔디미온은 바닥과 등이 부딪히는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바닥을 굴러야 했다. 라가르디오의 거대한 발이 그를 짓뭉개려고 하고 있었다. 쿵 소리가 나면서 박살난 바닥에 거대한 발자국이 남았다. 엔디미온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창끝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검을 들어 올려서 공격을 막다가 라가르디오가 방망이를 휘두르듯 대각선으로 크게 창을 움직이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손으로 바닥을 한 번 딛고 빙그르르 돌아서 두 발로 다시 착지했다. 그 사이에 라가르디오는 투창 자세를 잡았다. 불꽃을 닮은 창날은 아지랑이와 함께 이글거리고 있었고 창을 잡은 손에는 볼록 솟은 혈관이 두드러졌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날아간 창은 처음에는 불꽃이었고 그 다음에는 빛이 되었다.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불태우고 박살낼 기세로 날아간 창은 엔디미온과 충돌해서 커다란 굉음을 발생시켰다. 거인의 근력과 악마의 힘이 합쳐진 공격은 돌바닥을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충격 때문에 날아가던 돌조각들은 불이 붙어서 순식간에 재로 변했고 희끄무레한 연기가 사방을 꽉 채웠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라가르디오는 황금색 두 눈을 빛내면서 회색의 연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기가 잠깐 흔들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좌우로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빛이 번쩍였다. 라가르디오는 입을 벌려서 불꽃을 뿜었다. 강철도 녹여버릴 듯한 열기의 불꽃은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공중에서 불살랐다. 쇳물이 바닥에 후두둑 쏟아졌다.

라가르디오의 황금색 두 눈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그의 눈은 성배기사를 보고 있었다. 두르고 있던 망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입고 있던 사슬갑옷은 곳곳이 끊어져서 넝마나 다름없게 변했다. 엔디미온은 손으로 사슬갑옷을 끊어낸 후에 바닥에 내던졌다. 신성력과 사슬갑옷 덕분에 조금 찢어지는데 그친 웃옷만을 입고서 몸 전체에 신성력을 주입했다.

“이게 끝이냐?”

엔디미온은 손으로 목 뒷부분을 주물렀다. 라가르디오는 분명히 백 년 전보다 강해졌다. 지금까지 누가 유리하다고 할 것 없이 호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것은 동시에 성배기사의 힘이 약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악마와 성배기사 사이의 격차가 약간 줄어들었을 뿐이다. 아주 약간.

“창 휘두르고, 주먹 날리고, 불 뿜고. 이게 다냐고.”

라가르디오는 대답하는 대신에 콧김을 뿜었다. 불꽃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악마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 검은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두 주먹뿐이었지만 오히려 더 당당했다. 그에게는 아직 성배의 힘이 있었다.

“신중함이란 무엇이냐? 늘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다. 영리한 토끼가 굴을 몇 개나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야.”

엔디미온은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는 처음에는 걷다가 이제는 달리고 있었다.

“내가 오직 일신의 용력만으로 널 이기려고 했을까? 불꽃을 내뿜고 창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널 죽이려고 했을까? 아니다, 이 멍청한 놈아!”

라가르디오가 일갈하며 손을 뻗자 바닥에 박혔던 창이 스스로 날아와서 손에 잡혔다. 그가 발을 쾅 소리가 나게 구르며 입에서 불을 뿜었다. 불길이 돌조차 태워버릴 기세로 넘실거렸다. 엔디미온은 본능적으로 뒤로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가 창에 맞아 길게 갈라졌다.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온갖 것들을 배우고 익혔다! 이 멍청한 성배기사야! 나를 봐라! 내가 무엇을 하는지 똑똑히 봐라!”

다시 한 번 발을 쿵 구르자 라가르디오의 모습이 변했다. 거대한 사자의 모습에 꼬리는 뱀이었다. 입을 쩍 벌려서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자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엔디미온은 깜짝 놀라며 뒤로 크게 뛰었다. 푸른색 빛이 번쩍이면서 돌바닥을 부쉈다. 생각보다 강력한 공격에 엔디미온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져 나갔다.

“나는 벼락을 부리는 사자이며!”

이번에는 날개 달린 뱀으로 변했다. 쉬이익 소리를 내면서 입 안에서 보라색 액체가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엔디미온의 몸에 직격하여 옷을 녹이고 살갗을 오염시켰다.

“날갯짓을 하는 독 뿌리는 뱀이자!”

엔디미온은 시야가 흐리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라가르디오가 무엇으로 변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몸 전체는 검은색 비늘이 감싸고 있었고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 없었다. 커다란 날개를 한 번 펄럭이면 돌풍이 불었고 두꺼운 다리를 옮기면 지진이 일어났다. 라가르디오는 엄청난 덩치로 동굴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용이었다.

“죽음과 불꽃, 그 자체다!”

용이 내뿜은 불꽃은 거인의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백색이었고 같은 불꽃조차 태워버렸다. 엔디미온은 신성력으로 대항했으나 불꽃은 그것 역시 집어삼켰다. 고통에 찬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라가르디오는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며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염소의 머리를 가진 거인은 창을 빙그르르 돌리다가 백색으로 타오르고 있는 성배기사를 겨누었다.

“나를 보아라! 내 몸 안의 넘치는 힘을 보아라!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영혼을 먹어치웠다!”

동굴 안에 있는 수많은 뼈들은 모두 라가르디오가 잡아먹은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는 다시 세상에 나타난 엔디미온이 언젠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쉬지 않고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하나라도 더 많은 영혼을 빼앗으려고 했다.

세 번의 습격으로 라가르디오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엔디미온은 백 년 전보다 약해졌으나 자신은 훨씬 더 강해졌다는 것을. 그는 엔디미온이 산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역시나 부하들을 보내서 시간을 벌게 했다. 그리고 그동안 악귀들이 잡아온 사람들을 먹으며 영혼을 빼앗았다. 충분한 힘을 모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힘을 탐하는 것이 바로 그의 신중함이었다.

“나는 강하다! 죽어라, 성배기사야!”

라가르디오가 창을 던졌다. 이미 한 번 그랬던 것처럼 불꽃이었다가 빛으로 변해서 날아갔다. 엔디미온은 아직 백색의 불꽃에 휩싸여 있었고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창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고 엔디미온의 몸에 그대로 직격했다. 백색의 불꽃이 창에 동조하듯 더 크게 타올랐다. 두 개의 불꽃이 주변을 전부 집어삼킬 것처럼 넘실거렸다.

귀를 때리는 굉음,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열기, 불어오는 돌풍. 라가르디오조차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만한 공격을 제대로 맞았으니 성배기사는 무사할 수 없었다. 설령 아직 살아있다고 해도 만신창이일 것이다. 몸 전체에 힘이 들끓고 있으니 다 죽어가는 성배기사 따위는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는 열기가 좀 가시자 슬며시 눈을 떴다. 잘난 척하던 성배기사의 꼴을 감상하려고 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라, 성배기······.”

빛이 번쩍였고 라가르디오는 빛을 잃었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가르디오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째서인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주인을 향해 날아오는 창이었다. 그것은 손이 아니라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잡을 수도 없이 빨랐다. 라가르디오가 던졌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위협적으로 날아왔다.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창은 라가르디오의 얼굴을 관통했고 그의 거대한 몸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세상이 깜깜했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빛이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것은 온갖 사악한 것들을 태우고 정화하는 신성한 빛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가르디오는 자신의 눈을 관통한 창을 거칠게 뽑았다. 창의 열기 때문에 눈 주위가 뭉개지고 진물이 흘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그는 두 다리로 설 수 있었고 단단한 주먹으로 성배기사의 뼈를 부러뜨릴 수 있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눈 따위야 나중에 힘을 회복하여 재생시키면 그만일 뿐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성배기사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럼 끝을 내야지.”

엔디미온도 주먹을 쥐었다. 그는 성배의 힘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열기 때문에 살갗이 빨간색으로 달아올랐고 몸 곳곳에 아직 불씨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악마와 성배기사는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두 주먹끼리 부딪히자 충격 때문에 바람이 불었다.

불 뿜는 거인이라 불리던 라가르디오의 주먹에 비해서 엔디미온의 것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주먹이 부딪히자마자 손이 박살나버린 것은 오히려 라가르디오였다. 두꺼운 손가락들은 모두 부러졌고 손목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렸다. 손끝에서 시작된 충격은 그대로 손목을 타고 내달려서 어깨까지 이어졌다. 손가락에서 어깨까지의 모든 뼈들이 박살나면서 라가르디오의 어깨가 빠져서 덜렁거렸다.

단지 주먹과 주먹이 부딪혔을 뿐인데 그 충격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라가르디오는 다리를 비틀거리다 다시 한 번 뒤로 넘어졌다. 엔디미온은 몸 안의 신성력을 끌어 모았다. 손끝이 번쩍였다. 마치 징벌자의 창칼처럼.

라가르디오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고, 변신술을 배우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을.

그건 전부 헛짓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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