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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35화 (3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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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결국 나는 널 이길 수 없었구나, 성배기사야.”

라가르디오는 다가올 죽음으로부터 저항하지 않았다. 몸을 태우는 듯한 신성한 빛을 느끼면서 엔디미온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거나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오른쪽 손부터 어깨까지 뼈가 모두 부러졌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였다.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신중한 준비, 그것을 통해서 성배기사와의 격차를 줄이는데 성공했으나 단지 거기까지였다.

불 뿜는 거인은 성배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신성한 의무를 행하는 고행자인 동시에 사악한 것들을 벌하는 징벌자다. 너 따위에게 질 만큼 나약하지 않다는 뜻이다.”

엔디미온이 성배의 힘을 가득 담은 손을 들었다. 라가르디오의 몸 위에 올라가서 날카로운 손날로 가슴을 헤집고 심장을 찾아내 짓이겨버릴 생각이었다. 라가르디오가 말했다.

“그래, 너도 참 딱하구나. 호수의 여왕이 너에게 내린 그 의무 때문에 지금까지 죽지도 못하고 부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엔디미온은 눈썹을 까닥거렸다.

“그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게 딱하다는 소리다. 너와 함께 싸웠던 그 잘난 영웅이란 작자들은 모두 의무로부터 도망쳤는데 너 혼자서 길고 긴 시간을 인내하지 않았느냐. 너는 그저 호수의 여왕의 충직한 인형에 불과하다. 스스로 생각할 줄도 모르고 오직 시키는 일만 할 줄 알지. 너는 살아있지 않아. 심장이 뛰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손끝에서 번쩍이던 빛이 잠깐 흔들렸다. 엔디미온은 눈을 내리깔고서 라가르디오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빛이 더 세차게 발광했다. 그는 손을 들었다가 다시 심장을 노리고 힘껏 내질렀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찢어지고 질척이는 살덩이들이 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엔디미온의 손에 저항했다. 하지만 힘을 주자 금세 좌우로 갈라지면서 심장으로 가는 길을 터주었다.

엔디미온은 심장을 힘껏 붙잡고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라가르디오가 입에서 걸쭉한 초록색 액체를 뱉어냈다. 심장이 뽑혔지만 악마는 바로 죽지 않았다. 힘겹게 입을 벌리며 아주 잠깐 동안 목소리를 냈다.

“흐흐흐, 이 멍청한 성배기사야······. 너의 적은 악마들뿐이 아니다. 때로는 사람이 악마보다 추악한 법이거든······.”

“그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냐.”

“흐흐, 멍청한 놈······. 너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라가르디오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엔디미온은 라가르디오가 남긴 말을 곱씹어 보았다. 사람이 악마보다 추악한 짓거리를 하는 것은 백 년 전에도 충분히 보았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던 것이 바로 악마숭배자들의 존재였다. 그들은 악마에게 힘을 받아서 활동하면서 악마보다 더 잔인한 짓거리를 벌였다. 엔디미온은 그들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벌했다. 그게 그의 의무였으니까.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악마들만이 적이 아니란 소리가 단순히 악마숭배자들에 대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라가르디오가 사용했던 변신술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백 년 전의 라가르디오는 불을 뿜는 능력과 일신의 용력을 믿고 날뛰던 악마였다. 변신술 같은 마법을 누가 가르쳐주었을까. 그것도 용으로 변신할 정도의 고난이도의 변신술을.

생각이 복잡해진 엔디미온은 손을 탁탁 털면서 뒤쪽을 쳐다보았다. 이제 남은 악귀들을 몇 마리 없었다. 그 몇 마리 남은 것도 라이오넬이 빠르게 죽이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다시 라가르디오의 시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거대한 창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창 쪽으로 걸어갔다. 살짝 몸을 숙이고 창대에 손을 가져가자 커다란 창이 갑자기 확 줄어들었다. 본래는 거인이 써야 할 만큼 거대했는데 지금은 엔디미온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줄었다.

“마법이 걸린 무기인가.”

라가르디오는 이 창을 납치한 난쟁이들을 시켜서 만들게 했다고 했다. 난쟁이 장인들은 특별한 힘을 가진 무기를 잘 만들었다. 창에 마법적 효과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면 창날을 굳이 불꽃처럼 구불구불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으니 이건 마법이 담긴 무기인 듯 했다.

아마 효과는 사용자에 따라 크기를 자유자재로 늘리고 줄이는 것이리라 짐작됐다. 마침 검을 잃은 엔디미온은 이 창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성배기사로 활동하면서 온갖 무기에 통달했다. 창 역시 그가 잘 사용하는 무기 중 하나였다.

혹시나 해서 신성력을 창에 주입했지만 불꽃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싸움의 충격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마법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창날은 은은하게 빛나면서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워졌다. 엔디미온에게는 오히려 불꽃을 일으키는 무기보다는 신성력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무기가 더 알맞았다. 그는 만족했다.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다.

“다들 용케 안 죽었군.”

엔디미온은 손에 창을 들고서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마지막 악귀를 라이오넬이 죽인 참이었다. 베로니카는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이마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번 건 금화 열 개는 쳐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다섯 개로 하지.”

“여섯 개 합시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의 얼굴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여섯 개.”

베로니카도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오늘 태어나서 가장 많은 악귀들을 죽였다. 마력을 있는 대로 짜내서 지금은 작은 불꽃 하나 일으킬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멜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곳에서 멀쩡한 것은 라이오넬 한 명뿐이었다.

“잠시 쉬고 내려가지. 내려가면 딱 저녁 먹을 때겠군.”

엔디미온의 말에 베로니카가 털썩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물컹한 감촉에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라이오넬은 그녀의 비명 때문에 검을 흔들며 적은 어디에 있냐고 소리쳤다. 참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멜리사만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엔디미온만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눈치 챈 엔디미온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두 손을 깍지 꼈다. 상체를 조금 내밀고 멜리사를 쳐다보는 모습은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는 듯 보였다. 멜리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에 메이스를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다. 엔디미온은 그녀가 말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려다가 그냥 먼저 말했다.

“내가 성배기사냐고? 맞소.”

엄청난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멜리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배기사는 백 년 전의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습니다.”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의무로부터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이오.”

“······제가 감히 성배를 보여줄 것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엔디미온은 손가락으로 베로니카의 수통을 가리켰다. 그녀는 얼른 수통을 엔디미온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잠깐 동안 수통을 잡고 있다가 뚜껑을 열어서 안에 들어있는 것을 바닥에 있는 악귀의 시체에 뿌렸다. 마치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시체에서 연기가 발생하다가 갑작스럽게 재로 변했다.

“성배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요. 그것은 실체가 있는 물건이 아니라 강력하고도 신성한 어떠한 힘을 말하는 것이오. 그리고 나는 손에 잡히는 온갖 것들을 정화하고 물을 성수로 바꿀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성배기사라는 증거요.”

엔디미온의 등 뒤로 후광이 비쳤다. 멜리사는 이제 그가 정말로 성배기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는 빛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사악한 것들을 처단하는 전능자의 종입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성배기사를 직접 보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엔디미온은 그냥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눈물이라도 한 방울 찔끔 흘린 것 같은 멜리사를 보고서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영웅이라 부르며 치켜세워주는 것에 우쭐해 하기에는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백 년 전의 영웅들은 대악마 다르디낭을 죽이고 나서 뿔뿔이 흩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배기사께서 긴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한 번 모습을 나타낸 것은 온갖 사악한 것들을 추축하고 이 혼란한 세상에 빛을 가져오기 위해서겠지요?”

멜리사가 선물을 기대하는 꼬마처럼 눈을 반짝였다. 엔디미온은 눈을 내리깔고서 짤막하게 말했다.

“난 단지 의무를 행할 뿐이오.”

“성배기사님, 저는 그저 당신의 행적을 쫓으며 전능자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 정진하는 어린 양일 뿐입니다. 말씀을 낮추시지요.”

엔디미온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가 환하게 웃었다. 성기사 가문에서 자란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성배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영웅을 직접 보게 되었으니 헤실거리는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작은 새처럼 자꾸만 재잘거렸다.

“성배기사님은 과연 대단하십니다.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시 한 번 사악한 것들과 맞서기 위해 나타나시다니요. 영웅들 중 그 누가 그리 하겠습니까?”

엔디미온은 작게 웃었다.

“의무를 다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한때 의무로부터 도망쳤으나 다시 돌아온 탕자가 있거든.”

“네? 그게 누구입니까? 성배기사님 말고도 돌아온 영웅이 또 있는 겁니까?”

멜리사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새로운 장난감을 기대하는 꼬마 같은 모습에 지켜보던 베로니카가 웃었다. 엔디미온은 손을 들어서 라이오넬을 가리켰다. 전투가 끝나자 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라이오넬을.

“······설마 영감님이? 아니, 아니요. 저는 농담이라고 믿겠습니다.”

“글쎄, 난 저 정도로 검 잘 쓰는 노인이 영웅이라고 한다면 믿겠는걸.”

“오, 이런······.”

멜리사는 전설적인 검사 라이오넬이 노망난 노인이란 사실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무것도 안 할 때는 언제나 꾸벅꾸벅 졸고 싸울 때는 천둥검이니 뭐니 해서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던 노인이 성배기사와 함께 싸웠던 영웅 중 한 명이라니, 맙소사. 멜리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백 년의 시간이 길긴 길었던 모양입니다. 영웅도 시간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는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을 번갈아 보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라이오넬님만 나이를 먹은 겁니까?”

“의무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것은 오직 나뿐이니까.”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기에 멜리사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엔디미온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는 엉덩이를 대충 손으로 털어낸 후에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이제 슬슬 산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오른손으로 턱을 잡고 있던 멜리사는 다시 웃는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어쨌거나 다시 한 번 세상을 위해 사악한 것들과 싸우다니 두 분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추악한 변절자가 보고 배워야 할 참된 영웅의 태도입니다!”

엔디미온은 제자리에 딱 멈추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 아니, 씹. 변절자는 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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