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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36화 (3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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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변절자라고? 나와 함께 싸웠던 영웅들 중에 변절한 자가 있다는 소리냐?”

다그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목소리가 절로 날이 섰다. 멜리사는 잠깐 움찔거렸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모르셨습니까? 대악마가 죽고 나서 영웅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몇 년 뒤에 한 영웅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종국에는 악귀들을 이끌고 전쟁을 벌이려 했습니다.”

엔디미온은 기가 찼다. 지켜야 할 의무로부터 도망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악마와 악귀들을 죽이지 않은 것도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한때 악마들과 싸우고 대악마를 죽였던 자가 사악한 존재들과 함께 남들을 해치고 불의를 행했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대악마와 싸우다가 머리가 돌아버린 것도 아니고 대체 왜?

“변절자의 이름을 알고 있나?”

일단 라이오넬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전우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러던 중에 멜리사가 말했다.

“라우렌시오입니다. 요정기사 라우렌시오.”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그가 기억하는 라우렌시오는 요정 출신으로 마법과 검술이 뛰어난 기사였다. 요정답게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두 눈은 에메랄드처럼 빛났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약간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장난기 있는 성격과 잘 어울렸다.

검술은 라이오넬보다 아래였고 마법은 바이올렛보다 아래였으나 두 사람이 각각의 영역에서 정점에 달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검술과 마법을 둘 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보다 더 유연하게 전투를 할 수 있었다.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요정기사는 언제나 태양처럼 웃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엔디미온은 아직도 그에 대한 기억이 선명했다. 그래서 라우렌시오가 변절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라우렌시오가 아직까지 살아있나?”

라이오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라우렌시오가 아직까지 살아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요정기사 역시 성배의 힘을 나누어 받았으니까. 하지만 멜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라우렌시오는 성기사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름난 성기사들이 참여해서 꾸려진 토벌대는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변절자를 처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악마를 죽이고 나서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면 아직 강력한 성기사들이 조금 남아있을 때였다. 그들은 결투를 통해서 라우렌시오를 죽일 수는 없었으나 숫자로 찍어누를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을 감수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의 전우가 악마가 아닌 성기사들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고약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너 왜 나한테 이거 말 안 했어?”

베로니카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니, 안 물어봤으니까요. 전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다고요. 애초에 엔디미온 씨도 저한테 다른 영웅들에 대해서 안 물어봤잖아요?”

타당한 이야기였다. 엔디미온은 이번에는 라이오넬을 보면서 말했다.

“넌 라우렌시오가 그 난리를 칠 동안 뭐하고 있었어?”

졸다가 깬 라이오넬이 말했다.

“라우렌시오가 누구야?”

“······.”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를 한 대 갈기려다가 겨우 참았다. 노망 난 것이 잘못은 아니니까.

“라우렌시오가 죽은 것은 확실해?”

멜리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입니다. 혹시 멜리아나라는 성기사를 아십니까? 백 년 전에 활약했던 제 조상님인데 남기신 기록에 따르면 본인이 직접 시체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라우렌시오의 숨이 끊어졌다고 기록에 적혀 있었습니다. 사악한 것들과 어울린 탓인지 신성력을 담은 검으로 심장을 찌르자 고통스럽게 버르적대다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정 믿기 힘드시다면 저희 기사수도회에서 기록 열람을 요청하셔도 됩니다. 성배기사의 부탁이라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됐어.”

엔디미온이 라우렌시오의 죽음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말로가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이었다.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가 성기사들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쓰게 느껴졌다. 엔디미온은 숨을 한 번 삼켰다가 다시 내뱉으며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 나가자.”

일행들이 엔디미온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들어올 때는 긴장하며 걸었던 길은 나갈 때는 몹시도 짧게 느껴졌다. 얼마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다시 동굴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검은색 물감을 잘못 뿌린 듯 우중충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붓을 여러 번 빤 물통처럼 어스름한 하늘 위에 태양이 외롭게 노을빛을 뽐내고 있었다. 차츰 침전하듯 점차 빛이 사라져가는 하늘에는 성질 급한 별 몇 개가 벌써 모습을 드러냈다.

엔디미온은 산을 내려가면 완전히 깜깜해지겠다고 생각했다. 내려가면 저녁 먹을 시간에 딱 맞겠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그는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말의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주었다. 말이 고개를 돌려서 혀로 손을 핥으려고 했다.

“일단 간단하게 저녁부터 좀 해결하자고.”

엔디미온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모아왔다. 베로니카는 그가 모아온 땔감에 마법으로 불을 붙였고 멜리사는 자연스럽게 식사 준비를 했다. 라이오넬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따뜻한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면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눈을 천으로 가리고 있으니 졸고 있는 것인지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멜리사가 능숙한 칼질로 당근을 잘랐다. 엔디미온은 그녀가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시선은 그녀를 향했으나 사실 보고 있는 것은 다른 곳이었다. 그의 눈은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추억은 신기루처럼 아른거렸다. 처음 악마를 해치웠던 일, 기사가 됐던 일, 죽을뻔했던 일,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빌렸던 일, 대악마를 죽였던 일. 어떤 추억을 뒤져도 그 안에는 함께 웃고 울던 친우들이 있었다. 어떤 추억에는 라이오넬과 등을 맞대고 악마들을 무찔렀던 모습이 담겨 있었고 어떤 추억에는 바이올렛의 마법 덕분에 목숨을 구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라우렌시오와 함께 술을 마시며 어깨동무를 하고서 춤을 추던 추억도 있었다. 추억은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선명해지고 또렷해졌다. 백 년의 시간은 길었으나 그것이 추억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엔디미온은 그와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됐을까. 내가 백 년 동안 호밀밭에 처박혀 있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을까? 신분을 숨기고 범인(凡人)처럼 살다가 죽었을까? 보통 사람들처럼 아침을 맞이하고 점심을 먹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었을까? 아니면 라우렌시오처럼 변절했을까? 어쩌면 정체를 숨기고 악행을 저지르며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엔디미온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감당할 수 없게 불어난 궁금증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의무를 다할 것. 왜냐하면 그는 성배기사였으니까.

“스튜를 좀 끓였습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이번에 멜리사가 만든 요리는 햄을 가지고 끓인 스튜였다. 그녀는 요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소금이나 후추 따위를 많이 가지고 다녔다. 덕분에 그들은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식사를 끝낸 엔디미온은 그릇을 내려두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식사를 끝마쳤다. 베로니카가 식기들을 한데 모으더니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그녀는 한참 바닥을 더듬거리다가 한 곳에 멈추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땅이 진동하더니 손으로 누르고 있던 곳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멜리사가 깜짝 놀라서 오오 소리를 냈다. 베로니카는 그 물에 식기들을 씻으며 말했다.

“마법으로 지하에 흐르는 물길을 찾은 건데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마법으로 그런 것도 할 수 있나요? 어, 그런데 제가 알기로 마법사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던데요. 왜 물길을 찾은 건가요?”

“그건 마력이 많이 들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겨우 설거지하려고 마력을 소모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 방식은 본래 지하에 있는 물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거니까 그다지 마력이 많이 들지 않아요.”

멜리사는 다시 한 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니카는 대충 식기들을 씻은 후에 모닥불 근처에서 말렸다.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밤이 되었다. 지금 산을 내려갈 수도 있지만 급한 일을 처리했는데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잠잘 준비를 했다. 엔디미온은 멜리사가 잠자리를 까는 것을 보다가 말했다.

“멜리사.”

“네, 부르셨습니까?”

“내일 날이 밝으면 곧장 로게나로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어, 그런데 저 혼자요?”

엔디미온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는 밤의 추위 때문에 손을 서로 비비며 말했다.

“같이 안 가십니까? 왜 저 혼자 돌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일단 첫째로 라가르디오가 죽었다는 걸 누군가 로게나에 알려야 하니까. 악마들의 시체는 고약해서 가만히 두면 주변을 오염시킨다는 걸 너도 알 거다. 라가르디오 정도 되는 악마라면 이 산 전체를 오염시키겠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서 널 보내는 거야.”

“첫째가 있다는 건 둘째도 있다는 뜻이겠군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엔디미온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내가 돌아가서 라가르디오를 죽였다고 말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하니까. 난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어······. 외람된 말씀이지만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여명교단에 알리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라이오넬님이 돌아온 것도요?”

“그래.”

“어째서요? 성배기사께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면 성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악마들과 싸우고 있는 모든 성기사들의 사기도 올라갈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까도 말했지만.”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러나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다.

“난 귀찮은 일은 질색이다.”

멜리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납득할 수 없지만요. 죄송합니다. 불경한 소리를 했습니다.”

“괜찮다. 다시 말하지만 돌아가서 나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라.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것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겠지만 진실을 말하는 건 지금이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혼자서 로게나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그 두 가지가 끝입니까?”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고서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세 번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목구멍 뒤로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멜리사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깔다가 만 잠자리를 마저 깔았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엔디미온은 그 안에 땔감을 던졌다. 마지막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은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성배기사는 변절자 라우렌시오가 죽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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