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37화 (37/199)

37

* * *

다음 날이 되자 어제 말했던 대로 멜리사는 혼자 로게나로 돌아갔다. 엔디미온 일행은 그녀와 반대쪽으로 산을 내려갔다. 능력 있는 성기사인 멜리사와 헤어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누군가는 로게나에 라가르디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멜리사는 산을 내려가면서 언제든 자신을 다시 불러달라고 말했다. 엔디미온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

“그래서 이번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라가르디오가 죽은 덕분인지 산은 어제와 분위기가 달랐다. 이상할 정도로 울창했던 나무들은 가을임에도 청록빛이었고 하나 같이 알싸한 냄새를 풍겼다. 선선한 바람과 더해지니 약간 주변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지만 춥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을답게 바닥에는 도토리나 솔방울 따위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엔디미온의 말이 잘 마른 솔방울 하나를 발로 뭉갰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서쪽.”

“서쪽이란 이름의 도시도 있나요?”

엔디미온은 바람이 불자 떨어지는 솔방울을 손으로 잡아챘다. 의미도 없이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면서 말했다.

“일단은 서쪽이야.”

베로니카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혹시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설마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악마들을 죽이는 게 목적일 리는 없고.”

엔디미온은 눈 안에서 이물감을 느꼈다. 불어온 바람 때문에 먼지가 들어간 탓이었다. 그는 위로 던졌던 솔방울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쯥 소리가 나게 아랫입술을 한 번 빨았다가 말했다.

“난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돌려주러 가야 해.”

“호수의 여왕이요? 그게 누구인데요?”

사람들은 호수의 여왕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의무로부터 도망쳤던 영웅들도 그 말만은 착실히 지켰다. 덕분에 성배기사에게 성배를 빌려주었던 호수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에 남지 않았다.

“호수의 여왕은 호수의 여왕이야. 내게 성배를 빌려주었던 사람이지. 정령인지 아니면 전능자의 화신인지 아무도 몰라.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가 그녀에게 성배를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뿐이니까.”

“어······. 그래서 그 호수의 여왕이란 사람은 어디에 있는데요?”

“아주 먼 곳에.”

엔디미온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베로니카는 그와 다닌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저런 식으로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더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은 조용히 말을 몰았다. 가끔씩 라이오넬이 재채기를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라이오넬이 불쑥 말했다.

“로게나에서 서쪽으로 쭉 가면 헬리드가 나오겠군.”

라이오넬은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방랑하면서 안 가본 곳이 없기에 지도가 없어도 대략적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정신이 멀쩡할 때의 이야기였다. 엔디미온은 슬쩍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좀 멀쩡한 것 같았다.

“헬리드요? 거기까지는 며칠 걸리는데요?”

“글쎄, 넉넉잡아서 사흘?”

사흘 정도면 가지고 있는 식량이 다 떨어질 즘에 도착할 듯 했다. 할리아 토박이인 베로니카는 헬리드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고 그것을 라이오넬에게 질문했다. 멀쩡한 정신일 때는 산발이 된 흰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리고 있는 천 때문에 신비로운 분위기의 수행자처럼 보이는 그는 질문에 막힘없이 척척 대답했다. 베로니카는 그런 그가 안타까웠다. 정신 멀쩡할 때는 멋있는 노인인데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는 칼부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엔디미온은 두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들으며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그는 헬리드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옛날에 거기서 악마들과 싸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을 보면 별로 대단한 전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점심 식사하고 다시 출발한다.”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식사 준비를 했다. 이제 멜리사의 맛있는 요리 대신에 엔디미온의 요리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베로니카는 우울해졌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자신이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라이오넬은 장님이고 엔디미온이 요리를 배울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헬리드에 들어가면 요리책부터 구해야지. 그리고 조리 도구도 몇 개 사고. 엔디미온에게 요리를 배우겠다고 말하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개를 꺼내서 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이제부터 식량 같은 건 네가 알아서 사라.”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요리를 배우기 전까지 식사 준비는 그대로 엔디미온이 하기로 했다. 그는 대충 햄을 자르고 딱딱한 빵을 찢어서 접시에 담았다. 식사는 그게 끝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빵은 적셔 먹을 것이 없으니 잘 씹히지도 않았다. 베로니카는 침으로 빵을 적셔가면서 힘들게 식사를 끝냈다. 반면에 엔디미온은 과자를 먹듯이 우적우적 빵을 씹어먹었다. 노인인 라이오넬 역시 힘들이지 않고 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베로니카는 감탄했다.

과연 영웅은 영웅이군. 이상한 방향에서 감탄한 그녀는 식기들을 정리하고 잠깐 동안 휴식했다. 바람이 솔솔 불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잠이 오는 기분이었다. 햄과 빵을 너무 많이 먹었나?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점차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다가 결국은 고개를 떨구었다.

엔디미온은 손으로 눈 주변을 한 번 비빈 후에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이를 먹은 탓인지 시도 때도 없이 졸았다. 햇살이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하니 더욱 졸음이 몰려왔을 것이다.

이번에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뻥 뚫린 하늘은 구름 한 전 없이 맑았다. 이런 날이면 새 한 마리 정도 날아갈 법도 한데 아무것도 없었다. 시리게 빛나는 하늘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바닥을 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다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몸을 비비면서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바람소리만 남은 것 같은 세상에서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들을 움직인 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불쑥 튀어나온 손이 나뭇가지들을 위로 들어 올리거나 좌우로 밀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 여섯이었고 그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자고 있는 베로니카를 보며 웃었다.

“이거 효과 한 번 죽여주는군. 어디 보자, 챙길 게 제법 많은데. 말 세 마리, 두둑해 보이는 짐, 거기에 요정 여자까지? 오늘 첫 수확부터 대박을 쳤는걸.”

대머리 남자가 웃으면서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들은 물건과 말을 챙기기 위해 각자 움직였다. 남자 한 명이 바닥에 떨어진 창을 집으려고 할 때였다.

“수면가루를 썼나?”

“뭐야, 씨부럴!”

남자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엔디미온이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수그리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똑바로 일어서니 커다란 덩치와 큰 키가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남자가 집어가려고 했던 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할 일 없는 도적 놈들인 것 같군. 내가 기회를 주지. 이대로 조용히 돌아가. 그러면 나도 쫓지 않으마.”

도적들은 대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머리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도망가라니. 그럴 이유가 있나? 엔디미온이 왜 수면가루를 마시고도 잠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은 여섯 명이고 저쪽은 한 명이었다. 혼자서 여섯 명을 이기는 것을 불가능했다. 도적들의 대장이 싸울 준비를 하자 부하들도 얼른 무기를 들었다.

엔디미온은 말없이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베로니카는 수면가루 때문에 잠이 깰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라이오넬은 수면가루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졸려서 잠든 것 같았다.

“난 분명히 기회를 줬다.”

성배기사의 의무가 사악한 것들을 죽이고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라면 남들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을 벌하는 것도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엔디미온의 창을 빙그르르 돌리다가 창대 끝으로 바닥을 탁 찍었다. 그것을 신호 삼아서 도적들이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은 오랜만에 잡아보는 창을 손에 익히려는 것처럼 일부러 제일 먼저 달려든 도적과 몇 합을 부딪쳤다. 짧은 칼을 들고 있던 도적은 성배기사의 묵직한 공격에 무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다음에 떨어진 것은 그의 목이었다.

라가르디오가 쓰던 창은 불꽃처럼 생긴 구불구불한 창날이 넓적해서 사실 파르티잔에 가까운 무기였다. 긴 길이 덕분에 찌르기 공격을 할 때도 유용했지만 방금처럼 적의 목을 단번에 벨 수도 있었다.

남은 것은 다섯. 엔디미온은 창을 내질러서 도적의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빠르게 뽑으면서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달려들던 도적 한 명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자 한 발자국 내딛으면서 정수리를 노리고 창을 내리찍었다. 성배기사의 강력한 힘으로 내리친 창은 사람의 머리를 반으로 자르고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가다가 뼈에 걸려서 멈추었다.

그것을 기회라고 여긴 도적들은 좌우에서 엔디미온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는 창을 힘껏 뽑으며 창대의 끝부분으로 왼쪽에서 뛰어드는 도적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광대뼈가 부러지고 이가 뽑힌 그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엔디미온은 그 상태에서 손을 교차시켜서 창을 크게 회전시켰다. 빙그르르 돌아간 창날은 그대로 오른쪽에 있던 도적의 얼굴을 갈랐다. 얼굴에 길게 상처가 난 도적의 몸을 발로 차자 그 뒤에 있던 도적과 부딪혔다.

엔디미온은 창으로 두 명의 도적들을 한꺼번에 관통했다. 다시 창을 뽑으려고 하니 무언가에 걸린 듯 잘 뽑히지 않았다. 혼자 남은 도적들의 대장은 기합을 지르며 커다란 도끼로 엔디미온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창을 뽑는 대신에 주먹을 들어 올린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비트는 것으로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허리를 들면서 대머리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오른쪽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후에 곧장 왼쪽 주먹을 날렸다. 단 두 대를 맞았을 뿐인데 대머리 남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갈고리처럼 날아오는 주먹이 자신의 턱에 직격하기 일보직전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엔디미온이 날린 주먹은 깔끔하게 턱을 때렸고 그 충격으로 대머리 남자는 부러진 이들을 잔뜩 뱉어야 했다. 비틀거리던 그가 뒤로 넘어지려고 했다.

엔디미온은 아직 도적들의 몸에 박혀 있던 창을 뽑은 뒤에 대머리 남자의 몸을 크게 베었다. 왼쪽 목에서부터 오른쪽 가슴까지 길게 상처가 남았다. 쿵 소리가 나면서 마지막 적이 쓰러졌다.

혼자서 여섯 명의 도적들을 해치우는데 걸린 시간은 오 분도 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사방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가만히 보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으로 모두 치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가서 베로니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뒤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다시 눈을 뜬 베로니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우, 내가 왜 갑자기 잠들었지?”

베로니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곳곳에 묻은 핏자국들을 보고서 숨을 삼켰다. 그녀는 조용히 턱을 괴고 있는 엔디미온을 보며 물었다.

“혹시 제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요?”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아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