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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38화 (3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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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에는 검붉은 것이 묻어서 얼룩덜룩했고 짐들은 누가 안을 들여다 본 것처럼 입구가 모두 열려있었다. 바닥에는 누런 이 몇 개가 떨어져 있었고 수풀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발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엔디미온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구역질나는 상황과 마주해야 할 널 배려했다고 해두지.”

“무슨 일이 있기는 했군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악한 것들을 벌하는 것이 성배기사의 의무이니 나는 그것에 충실했을 뿐이야.”

베로니카는 눈치가 빨랐다. 엔디미온이 두루뭉술하게 설명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대강 알아차렸다. 분명 그녀가 잠든 사이에 도적들이 겁도 없이 짐을 털려 했을 것이고 엔디미온이 그들 모두를 응징했을 것이다.

도적들이 여행자를 습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엔디미온 일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와 노인이 있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으니 도적들이 달려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베로니카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으나 도적들의 죽음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검을 뽑았으면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 때로는 그게 자기 자신일 때도 있는 것이다.

“도적들의 주머니는 확인했나요?”

“안 했는데. 그건 왜?”

“돈이란 건 누군가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야 가장 가치 있는 법인데 도적들은 이제 죽었으니 우리가 그냥 가버리면 주인 잃은 돈이 너무 불쌍하지 않겠어요?”

엔디미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마법사보다 도적이 더 어울리겠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엔디미온은 방금 자신이 죽였던 도적들의 시체를 찾아서 주머니를 하나씩 뒤졌다. 은화가 몇 개 나왔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들은 돈이 될 것 같지 않았고 무기들은 모두 저급한 것들이었으나 대장간에 갖다 주면 동전 몇 개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무기들을 끈으로 고정해서 말 위에 실었다.

엔디미온은 가방 안에서 금화 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그 안에 은화들을 함께 보관했다.

“어우, 제가 제법 잔 모양이네요. 부지런히 가야겠어요.”

도적들이 사용했던 수면가루 때문에 베로니카는 거의 한 시간을 잤다. 라이오넬 역시 누가 깨우질 않으니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로 자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그를 깨우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맺혀있던 침방울이 길게 늘어졌다가 뚝 끊어졌다.

“쓰읍, 벌써 식사 시간인가?”

무슨 헛소리야. 엔디미온은 자고 일어났더니 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친구의 뒤통수를 때리려다가 참았다. 호수의 여왕께서 말씀하시길, 노인과 아이와 여자를 때리지 말지어다.

“식사는 아까 했잖아. 쉴 만큼 쉬었으니까 얼른 가자. 헬리드는 이쪽으로 쭉 가면 되는 거냐?”

라이오넬은 멍하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람의 흐름과 주변의 냄새를 맡으며 자기 말을 찾아갔다. 장님이면서 능숙하게 말에 올라탄 그가 말했다.

“이쪽이 어딘데?”

아참, 이 자식 장님이었지. 엔디미온은 다시 말했다.

“서쪽으로 쭉 가면 되냐고”

“음, 중간에 방향이 틀어진 게 아니라면 로게나에서 서쪽으로 쭉 가면 헬리드가 나올 걸세. 내 기억이 맞는다면 말이야.”

장님에게 길안내를 맡겨야 하는 이 상황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지만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헬리드가 아니라 호수의 여왕이 있는 곳이었다. 서쪽으로 쭉 가다가 헬리드가 나오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호수의 여왕에게만 가면 되니까.

그들은 다시 말을 타고 달렸다. 라이오넬은 헬리드까지 나흘이 걸릴 거라고 했으니 아직 거리가 한참 남은 상태였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하고 해가 지면 잠을 잤다. 그런 식으로 이틀째 날을 맞이했다. 아침을 일찍 먹고 해가 머리 위로 올 때까지 말을 타고 달렸다. 며칠 동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슬슬 엉덩이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한 베로니카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가 다시 숙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먼지구름이 일고 있었다. 누군가 반대 방향에서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엔디미온은 허리를 세우고 목을 쭉 뻗어서 반대쪽에서 누가 오는지 확인했다. 짐마차가 두 대 보였고 말을 타고 있는 사람 세 명이 보였다. 두 명은 무장을 했고 한 명은 일상복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는 상인 같았다. 아무래도 헬리드에서 로게나로 가는 상단인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이 꼭 상단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짐마차 안에 든 것이 물건이 아니라 칼을 든 용병들일 수도 있었다. 길 위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점차 가까워지는 상단과의 거리를 재면서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저쪽에서도 엔디미온 일행을 눈치 챈 것인지 무장한 남자 두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상인이 고용한 용병인 듯 했다. 짐마차 뒤쪽으로 용병 세 명이 더 보였다. 길 위에서는 낯선 사람을 조심해야 하지만 양쪽 다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저들이 실은 상단으로 변장한 도적들이라도 엔디미온 혼자서 처리할 수 있으니 겁낼 이유가 없었다. 또한 엔디미온 일행은 겉으로 보기에 무해한 여행자들이었으니 상단 입장에서도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두 무리는 천천히 말과 짐마차를 몰고서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고 육성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왔을 때였다. 상단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반갑네. 여행자들인가?”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소. 그쪽은 상인인 것 같은데.”

“바로 보았네. 이 보잘것없는 상단의 주인이지.”

대답한 것은 일상복을 입고 있던 중년의 남자였다. 뺨이 홀쭉하고 광대뼈가 두드러졌는데 턱에 염소 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형과 합쳐지니 왠지 셈을 잘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좀 신경질적이지 않을까 했지만 우려와 다르게 붙임성이 좋았다.

“나는 조르디라고 하네. 자네는?”

“나는 엔디미온이오.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여행자요.”

“아, 엔디미온. 영웅의 이름이지. 그런데 참 특이한 구성이군.”

엔디미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과 장님 노인, 거기에 덩치 큰 남자까지. 여행자치고 특이한 구성이긴 했다.

“그런 소리 자주 들었소. 로게나로 가는 길이오?”

“맞네. 톨란에서 출발해서 헬리드를 거쳐 이제는 로게나로 가는 중이지.”

엔디미온은 톨란이 어디 있는 도시인지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먼 길 가느라 힘드시겠소. 우리는 헬리드로 가는 중인데 맞게 가고 있는지 모르겠군. 초행이라 그런데 길 좀 물어도 되겠소?”

조르디가 손으로 자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헬리드로 간다고······. 방향은 맞다네. 이대로 쭉 가면 헬리드가 나올 걸세. 그런데 거기 오래 머물지는 말게. 요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거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게 무슨 뜻이오?”

조르디는 주변에 달리 들을 사람도 없건만 목을 가다듬은 후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헬리드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네. 조만간 전쟁이 벌어질 걸세. 겔라오드 쪽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겔라오드라면 헬리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었다. 엔디미온은 전쟁이라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미간을 좁혔다.

“전쟁을 한다고 하셨소? 갑자기 왜?”

“헬리드와 겔라오드는 본래 서로 사이가 나빴다네. 그래서 사소한 문제로 자주 다투고 했는데 이번에는 다툼의 불씨가 커지고 커져서 결국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와버린 걸세. 두 도시 모두 진심이야. 무기를 만들고 식량을 사들이며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네. 직접 헬리드에 가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네. 내가 충고하지. 꼭 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 가지 말고 만약 가더라도 오래 머물지 말게.”

가만히 있던 베로니카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기사수도회가 가만히 있었나요? 아무리 영주가 영지의 주인이라고 해도 기사수도회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잖아요.”

각 도시에는 기사수도회가 있다. 기사수도회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악마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그들 뒤에는 여명교단이 있기에 영주가 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베로니카가 생각하기에 기사수도회가 이 전쟁에 동의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각 도시의 기사수도회는 영주들끼리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길 요구했지. 하지만 둘 다 워낙 강경해서 말일세. 결국 기사수도회는 각 도시에서 떠났다네.”베로니카는 탄식했다. 조르디가 목을 움츠리면서 말을 이었다.

“겔라오드 영주가 변했어······. 본래 온후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호전적인 사람이 돼버렸다네. 이번 일도 전쟁까지 갈 만한 다툼은 아니었는데 겔라오드 영주의 강경한 대응 때문에 일이 커진 걸세. 왜 그리 변했을까. 마치 사악한 것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엔디미온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가만히 있었기에 베로니카가 대신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충고 감사합니다, 조르디 씨. 덕분에 위험에 대해 미리 알게 됐군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조르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조심하시게. 우리는 먼저 가보겠네.”

멈추어 있던 상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짐마차가 지나가기 쉽게 좌우로 비켜섰고 마차를 끄는 말들이 따각따각 발굽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조르디의 상단이 점차 멀어졌다. 엔디미온 일행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는 엔디미온의 곁으로 말을 가까이 붙인 베로니카가 말했다.

“왜 그래요? 어디로 갈지 생각 중이에요?”

엔디미온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갈 곳이야 정해져 있잖아.”

“잠깐만요. 설마 헬리드로 갈 생각이에요? 아까 저 상인이 이야기하는 거 들었잖아요. 거긴 전쟁 준비 중이라니까요?”

“그래, 들었으니까 더 가야지.”

베로니카는 어이가 없는지 입으로 허 소리를 냈다. 그녀가 말했다.

“엔디미온 씨의 목적은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돌려주는 거라면서요? 그런데 헬리드에는 왜 가요? 엔디미온 씨는 사람 죽이는 용병이 아니잖아요?”

“물론 나는 용병이 아니라 사악한 것들을 벌하는 성배기사야.”

“그런데 왜요?”

“아까 그 상인이 겔라오드 영주가 변했다고 말했으니까. 마치 사악한 것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으으. 베로니카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서 겔라오드 영주 뒤에 악마가 있기라도 하다는 소리인가요? 아니면 겔라오드 영주가 악마숭배자가 됐다거나?”

“글쎄. 그건 모르지. 하지만 정말로 겔라오드 영주가 악마의 꾐에 빠졌다면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그리고 이건 내 경험에 따른 의견인데 아마 겔라오드 영주 곁에 마법사가 한 명 있을 거다. 그리고 아마 그 마법사는 요정일 거고.”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베로니카가 눈을 깜빡이자 엔디미온이 말했다.

“대개 남을 속여서 나쁜 일을 벌이는 놈들은 마법사야. 그리고 뒤에서 수작질을 하는 놈들은 대개 요정이지. 다시 말해서 겔라오드 영주에게 사악한 마수를 뻗쳐 그를 현혹시킨 놈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요정 마법사일 거라는 뜻이야. 그 자식을 잡아서 죽여야 해.”

엔디미온이 가진 요정과 마법사에 대한 감상을 들은 요정 마법사 베로니카는 뚱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대단히 종족 차별적이자 직업 차별적인 발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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