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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39화 (3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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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도 모르지.”

엔디미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고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베로니카는 헬리드로 가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의 생각은 확고했고 몇 마디 한다고 해서 그 생각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내 인생 한 번 멋지군.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뱉었다. 말들이 점차 빠르게 달렸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들 위를 달리는 세 마리의 말들은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한참 달렸지만 다시 길손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슬슬 말들이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마침 해도 지고 있었고 저녁 식사도 할 시간이어서 달리던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몇 발자국 더 달리다가 멈추어 선 말이 투레질을 했다.

말에서 내린 엔디미온이 목덜미를 몇 번 쓸어주었다. 그리고 물을 먹여준 후에 주변에 있는 잡초들을 뜯어먹게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베로니카가 땔감을 모아서 불을 붙였고 엔디미온이 식사 준비를 했다. 이번에도 빵과 햄이었다.

그들은 대충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헬리드까지 사흘이 걸린다고 했으니 내일이면 도착할 듯 했다. 첫 번째 불침번인 베로니카만 깨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잠에 빠져들었다. 불침번을 두 번 교대했을 때 아침이 되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일찍 자리를 정리하고 말에 올라탔다. 말의 배를 걷어차자 짧게 울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선선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헬리드의 성벽이 보였다. 그리 큰 성은 아니었다. 당연히 로게나보다 한참 작았고 할리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작은 것처럼 보였다.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무장을 한 채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벽을 따라서 일정한 간격으로 헬리드의 문장을 그린 깃발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깃발을 보면서 엔디미온은 전쟁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무심히 생각했다.

나무로 만든 검은색 성문은 단단해 보였다. 바깥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는데 들어가는 사람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었다. 영지전을 하면 용병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가 아닐 때에도 많은 숫자의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는 것보다 영지전이 벌어졌을 때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이 더 값싸게 먹혔다.

“우리도 용병인 척 하고 들어가야겠군.”

용병이란 것이 무슨 자격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냥 칼 들고 갑옷 입고 있으면 다 용병이었다. 물론 커다란 규모를 가지고 전쟁 사업을 하는 이름난 용병 부대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용병 부대는 헬리드의 자금 사정으로는 고용할 수 없었다. 헬리드 영주도 그런 고급 용병보다는 값싸게 부릴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바랐을 것이다. 겔라오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쪽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용병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소만.”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엔디미온의 몸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금발의 청년은 어깨가 딱 벌어졌고 손이 두꺼웠다. 옷을 입고 있어도 얼마나 잘 단련된 몸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등 뒤에 메고 있는 창을 보고서 병사가 말했다.

“제법 괜찮은 용병이 찾아왔군. 지금까지 칼 든 얼치기들만 찾아왔는데 말이야. 이름이 무엇인가?”

“엔디미온.”

병사가 들고 있던 종이에 엔디미온의 이름을 기록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엔디미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뒤쪽의 일행을 소개했다.

“내 일행들이오. 같이 한 몫 벌어볼 생각으로 왔지.”

병사는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을 보았다가 다시 엔디미온을 보았다.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요정 여자와 장님 노인이 무슨 용병이냐는 뜻이었다.

“이 여자는 마법사요. 마법 한 번으로 병사 다섯을 죽일 수 있지. 실력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마법사는 구하기 힘든 고급 인력이니 고용해서 나쁠 건 없을 거요.”

엔디미온이 턱짓을 하자 베로니카는 눈치껏 간단한 마법을 부렸다. 손끝에서 불꽃이 타올랐다가 금세 꺼졌다. 병사가 오오 소리를 냈다.

세상에 마법사는 적었고 용병으로 일하는 마법사는 더 적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연구를 위해 집 안이나 탑 같은 곳에 처박혀서 일생을 보냈다. 엔디미온의 말대로 베로니카는 아주 고급 인력이었다. 헬리드 입장에서는 고용해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럼 그 뒤의 노인은? 저 사람도 마법사인가?”

길게 기른 흰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린 천을 보면 고명한 마법사라고 오해할 만 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 노인은 마법사가 아니오. 혹시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라고 들어보셨소?”

그런 거창한 이름을 병사가 들어봤을 리가 없었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적 없는데.”

“그럼 며칠 내로 듣게 될 것이오. 전쟁이 벌어지면 헬리드 사람 전부가 그의 이름을 연호할 것이니까.”

병사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통행 허가를 내주었다. 그가 보기에 엔디미온은 강력한 전사였고 베로니카는 희귀한 마법사였다. 그 두 사람을 용병으로 고용한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라이오넬이 그냥 눈 안 보이는 노인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만큼.

“일단 대장간부터 가지.”

헬리드 안으로 들어온 엔디미온 일행은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라가르디오와 싸우면서 사슬갑옷이 망가진 엔디미온은 새 갑옷을 구입하려고 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고철에 가까운 도적들의 무기도 매각하고.

“와, 분위기가 정말······. 살벌하군요.”

베로니카는 목을 움츠렸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병사들이거나 용병들이었다. 병사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용병들은 저들끼리 한 곳에 뭉쳐서 시시한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칼밥을 먹고 살던 사람인만큼 전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익숙함을 느꼈다. 백 년 전의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적들과 싸우고 사악한 것들을 쳐죽였다. 성벽에는 언제나 불이 붙어 있었으며 성 안쪽에서는 늘 연기가 나고 있었다. 병사들은 늘 엄숙한 얼굴로 무구를 손질했고 때때로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그게 마치 두려움을 없애주는 주문인 것처럼. 그들은 오직 악마를 처부수고 승리를 손에 거머쥐었을 때만 웃고 떠들며 노래했다. 그것 역시 잠깐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수도승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할 힘이 있으면 악귀들의 목을 베고 악마들을 창으로 찌를 때 써야 했다.

“앗, 대장간이에요!”

베로니카가 소리치기 전에 엔디미온도 벌써 대장간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후끈한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대장간 안은 망치질 소리로 시끄러웠다. 대장장이 몇 명이 바쁘게 움직이며 철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 준비를 위해서 무기와 갑옷을 만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성큼성큼 걸어서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태양을 가리자 자연스럽게 대장간 안에 그늘이 졌다. 목에 수건을 걸치고 있던 뚱뚱한 대장장이가 누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대충 수건으로 훔친 뒤에 입을 열었다.

“대장간에 용건이라도 있소?”

“갑옷을 좀 보러 왔는데.”

대장장이는 엔디미온을 한 번 쳐다본 후에 말했다.

“용병인 것 같은데 갑옷도 안 입고 다니시오? 거 화살 맞고 죽기 딱 알맞군.”

“안 맞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오. 내가 입을 만한 갑옷이 있소?”

“돈 많소?”

“너무 많아서 걱정이지.”

대장장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얼굴은 열기에 타서 새까만데 이는 희었다.

“따라오시오. 내가 옛날에 만들어 두었던 게 있는데 그거라도 입으려면 입으시던가.”

대장장이가 연신 땀을 훔치며 대장간을 나가자 엔디미온도 그 뒤를 따랐다. 대장간 바로 왼쪽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그 안에 갑옷이나 무기들을 보관해두는 듯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났다. 대장장이가 벽에 걸린 갬비슨을 꺼내 들고 왔다.

“이거 딱 맞을 것 같군. 그 위에 이걸 입으면 되겠소.”

엔디미온이 갬비슨을 받아들자 이번에는 사슬갑옷을 가져왔다. 대충 보기에 몸에 맞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갬비슨을 입고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서 그 위에 사슬갑옷을 입었다. 좀 낡았기는 해도 나쁘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값을 치르려는데 대장장이가 구석을 뒤지더니 서코트 한 벌을 들고 나왔다. 청색이었고 중앙에 어떤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성벽 위에 있던 깃발에 그려진 문장이었다. 헬리드의 문장이었다. 그것까지 입고 나자 완연히 기사의 모습이었다. 대장장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대장간에서 서코트도 만드나 보오?”

“그럴 리가 있나. 이건 의상실에서 갑옷을 줄 때 함께 주라고 내게 맡겼던 거요.”

“그런데 왜 나한테 주는 거요. 따로 주인이 있는 것 같은데.”

대장장이가 목 안의 가래를 끌어모아서 바닥에 탁 뱉었다.

“원래 그거 입어야 할 사람이 죽었으니 그러지. 몇 년 전에 영주님은 차남이 성인이 되자 선물로 갑옷을 주려고 했소. 내게 갑옷을 만들라고 시켰고 그래서 만들던 중이었는데 영주님의 차남이 덜컥 병에 걸려서 죽어버린 거요. 물론 그건 참 안 된 일이지만 물건을 만들라고 시켰으면 어쨌거나 대금을 치러야 할 거 아니오? 그런데 아들이 죽었으니 갑옷은 안 받겠다, 돈도 못 주겠다, 이러면 어쩌자는 거요?”

대장장이가 혀를 한 번 찼다.

“물건은 만들었는데 돈 받을 데가 있어야지. 그래서 일단 보관하고 있었는데 마침 딱 맞는 손님이 나타났군. 돈 많다고 했으니 값을 치를 능력은 있을 거라고 믿겠소. 미리 말하지만 그게 제법 값이 나가거든.”

“아, 물론이오. 내가 말했잖소. 돈이 너무 많다고.”

엔디미온은 흥정 한 번 없이 값을 치렀다. 대장장이가 양심껏 적당한 가격을 받아서기도 했고 돈이 다 떨어져도 악마들의 목을 몇 개씩 베어서 금세 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서코트의 문장은 염색약으로 지워주겠소. 기사도 아닌데 헬리드의 문장을 달고 싸우는 것이 당신도 부담스러울 거 아니오.”

“헬리드 영주는 어떤 사람이오?”

뜬금없는 질문에 대장장이가 되물었다.

“영주님이 어떤 사람이냐고?”

“혹시 죽은 아들에게 주려고 했던 갑옷을 입고 싸우는 것을 보고 화를 낼 사람이오?”

“그건 아닌데······.”

“그럼 일개 용병 따위가 건방지게 헬리드의 문장을 달고 싸운다고 화를 낼 사람이오?”

“그것도 아니지. 갑옷 대금을 안 치른 것이 좀 아니꼽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오. 크게 모난 곳도 없고 모자란 곳도 없지. 그만하면 영주치고 괜찮은 사람이오.”

“그럼 됐소. 문장은 그냥 두시오. 헬리드 영주는 오히려 기뻐할 것이오.”

대장장이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요? 영주님이 왜 기뻐해?”

엔디미온은 나직이 말했다.

“내가 헬리드의 문장을 달고서 적들의 머리통을 다 박살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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