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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는 멍하니 있다가 엔디미온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적들은 큰 키와 커다란 덩치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두꺼운 손과 튼실한 다리는 겁을 먹은 적들의 머리를 때리고 찰 것이다. 단지 갑옷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 적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흔치 않았다. 만약 저 손에 무기가 들린다면 어떨까. 이 무시무시한 기사는 등에 메고 있는 창을 꺼내서 거침없이 적들을 죽일 것이다.
일당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엔디미온은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영주님이 기뻐하시겠군.”
대장장이는 엔디미온이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 헬리드 영주는 분명 기뻐할 것이다. 헬리드 기사가 해야 할 일을 엔디미온이 대신해 줄 테니까.
“투구는 있으시오?”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창칼이 머리에 부딪히기 전에 적들을 죽일 것이고 화살이 머리에 꽂히기 전에 반응할 것이니 투구를 쓰지 않아도 감히 그의 머리에 흠집을 낼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어도 공격에 가장 취약한 곳은 머리였고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투구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혹시 하나 있으면 주시오. 값은 치르겠소.”
“물건 몇 개를 보여주겠소. 투구 말고 다른 것도.”
대장장이는 투구와 손도끼, 그리고 짤막한 검 하나를 가져왔다. 기사의 무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상황에 맞게 무기를 바꾸어 가며 싸워야 했다. 상대가 두꺼운 갑옷을 입었다면 그 틈새 사이를 짤막한 검으로 찔러야 했다. 때때로는 검을 들고 싸우는 대신에 도끼를 들고 투구를 쓴 머리를 한 번에 갈라야 할 때도 있었다.
사실 엔디미온은 창 한 자루만으로 적들 모두를 능히 상대할 수 있었으나 일단은 그것들 전부를 사기로 했다. 그는 돈이 많았다. 향락을 즐기지도 않고 오직 의무만을 향해 달리니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아, 그리고 고물을 좀 넘기려고 하는데.”
“고물?”
허리에 손도끼와 짤막한 칼을 차고 한 손으로 투구를 든 엔디미온은 창고를 나와서 자신의 말을 가리켰다. 말의 등 위에는 도적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이 실려 있었다. 그것을 본 대장장이가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말했다.
“진짜 고물이군. 녹여서 화살촉이나 만들면 되겠어.”
“그래서 사시겠소?”
대장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장간 안의 조수를 시켜서 말 위의 무기를 가져가게 했다. 그리고 동전 몇 개를 엔디미온에게 주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애초에 그도 많은 돈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거래를 끝낸 후에 엔디미온 일행은 대장간을 떠났다.
베로니카가 물었다.
“진짜 전쟁에 참가하실 생각이에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던 그들은 지나가는 용병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무장을 한 용병도 있었고 누더기 같은 갑옷을 대충 입고 검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용병도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말했던 것처럼 얼치기들이 많았다.
“싸우기야 하겠지만 상황을 봐야겠지. 겔라오드 영주가 정말 사술에 빠졌는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제발 겔라오드 영주가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길 빌었다. 그래야 전쟁 같은 끔찍한 일에 휘말리지 않고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 차라리 악마를 죽이면 죽였지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싫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서 헬리드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이틀째 되는 날에 갑작스럽게 겔라오드 군대가 나타났다. 헬리드 내부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병사들과 용병들은 갑옷과 무기를 챙겨서 성벽으로 이동했고 엔디미온 일행도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넌 성 안에 숨어있어.”
엔디미온은 자신을 따라오는 베로니카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요? 저는 숨어있으라고요? 저만요?”
“혹시 사람 죽여 본 적 있나?”
아침 식사했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가벼운 질문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래서 더 섬칫함을 느꼈다. 엔디미온은 그녀와 달랐다.
“······아니요.”
“그러니까 숨어있으라고. 너 지키면서 싸울 수는 없으니까.”
베로니카는 그게 엔디미온의 배려란 것을 알았다. 똑같이 무언가를 죽이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과 악마를 죽이는 것은 달랐다. 차마 사람을 죽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라이오넬과 성벽으로 떠나는 엔디미온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각자 위치로! 빨리! 빨리 움직여!”
겔라오드 군대는 성벽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성벽 위에서 본 적들의 숫자는 대략 사오백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헬리드의 병사들과 용병들을 합친 숫자와 비슷했다. 헬리드 영주는 허리가 꼿꼿하게 풍채가 당당한 중년이었는데 날카로운 각도로 끝이 올라간 콧수염이 그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혈기왕성한 사람이었고 굳이 성벽을 끼고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헬리드 군대는 약간의 수비 병력을 남겨두고서 성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전진했다.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멈추어 선 두 군대는 서로를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기분 나쁜 고요함이 전장에 감돌았다. 병사들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지 자꾸만 헛기침을 했다.
겔라오드 군대 쪽에서 기수 한 명이 나왔다. 그는 개울을 넘지는 않고 화살이 닿지 않을 적당한 곳에 서서 헬리드 군대 쪽을 향해 외쳤다.
“이 헬리드 촌놈들아! 머리통이 텅 비어서 물에 던져도 둥둥 뜨는 놈들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리 멍청할 줄은 몰랐다! 너희의 잘못이 오늘의 사단을 만든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헬리드 영주가 나와서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 자비로운 겔라오드는 너희를 용서할 것이다!”
이번에는 헬리드 군대 쪽에서 기수가 달려나갔다. 그 역시 화살에 맞지 않을 만한 곳에 서서 외쳤다.
“너희 겔라오드 돼지 놈들은 똥구멍으로 음식을 먹고 입으로 싼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구나! 그 더러운 입구멍에서 나는 썩은 내가 여기까지 진동한다! 우욱! 너희는 그 냄새 나는 입구멍이 무기냐? 그럼 우리가 졌다!”
헬리드 병사들이 와하하 웃었다. 그 뒤로 두 기수들은 서로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 말머리를 돌려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자기 무기를 꽉 쥐었다. 조금 있으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긴장감을 깨버렸다.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를 낸 것은 라이오넬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품을 하며 말했다.
“지금 뭐 축제라도 하는 건가? 다들 막 웃던데.”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장님인 것 같은데 심지어 노인이기까지 했다. 대체 이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그들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라이오넬은 아무도 없는 곳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일세.”
혼자서 악수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어이가 없어서 허 소리를 냈다. 그들은 아무리 봐도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인 라이오넬을 성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병사 한 명이 그를 데리고 성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병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투구를 쓴 기사였다.
“그냥 두시오. 내 일행이오.”
엔디미온을 본 병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병사들도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갑옷을 입고 서코트에 그려진 문장을 보면 분명 헬리드의 기사인데 그들은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 때문에 전열이 곧 소란스러워졌다. 헬리드 영주가 미간을 찡그리며 부관에게 전열을 가다듬으라고 시킬 때였다. 갑자기 겔라오드 쪽에서 뿔나팔 소리가 났다. 그 뒤에는 북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마지막으로는 함성 소리가 났다.
겔라오드 군대가 진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헬리드 영주도 깜짝 놀라서 진격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손에 들고 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양쪽을 합쳐서 거의 천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함성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엔디미온은 전열에서 빠르게 달렸다가 다시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그는 일부러 뒤쪽으로 쳐졌다. 적들과 싸우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전장의 뒤쪽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겔라오드 영주가 악마의 꾐에 빠졌다면 분명 이 전쟁에서 사악한 술수를 부릴 것이다. 그걸 확인해야 했다.
“돌격! 돌겨어억! 다 죽여버려! 이 멍청아! 넌 또 뭐하고 있어! 가서 죽여! 적들을 죽이라고!”
누군가 엔디미온의 뒤통수를 때렸다. 감히 그의 뒤통수를 때릴 사람이 있을 줄 몰라서 멍하니 있는데 말을 타고 달려가는 헬리드 영주가 보였다. 그는 한 손에 검을 들고 달리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직접 적들을 죽였다. 크게 내지르는 소리를 들어보니 누가 뒤통수를 때렸는지 알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나이도 있는 사람이 목청 한 번 크네.
“가서 죽이라고······.”
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진짜 용병이 아니었고 그냥 상황만 지켜볼 수도 있었지만 적진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이미 시작된 전쟁이었다. 끝을 내려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누군가는 항복을 해야 했다.
엔디미온은 누군가를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이유가 있다면 누구든 죽였다. 그것은 성배기사의 적이 언제나 악마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달리고 있었다.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달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창을 휘둘렀다. 힘껏 휘두른 창은 겔라오드 병사 두 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창을 내질러서 병사의 몸통을 찌른 후에 그대로 달려서 그 뒤에 있던 병사까지 찔러 죽였다. 창을 뽑으며 창대로 후려쳐서 병사 하나를 쓰러트렸다.
발로 단단히 바닥을 디디고 어깨 힘을 이용해서 힘껏 날린 창은 병사 셋을 한 번에 관통했다. 엔디미온은 창을 회수하러 가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손도끼와 짤막한 검을 뽑았다. 달려드는 적의 머리통에 손도끼를 꽂아버리고 검으로 다른 병사의 목을 찔렀다.
병사들 대여섯 명이 뭉쳐서 엔디미온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성난 황소처럼 날뛰는 그는 적들을 찌르고 베고 머리통을 박살내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적들은 물론이고 아군까지 쳐다볼 만큼 대단한 무용이었다. 병사 열댓 명을 죽이고 드디어 아까 던졌던 창을 회수한 엔디미온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배가 빵빵해졌다가 그 안에 들어찼던 공기들이 목소리와 함께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덤―벼―라!”
쩌렁쩌렁한 외침은 적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주었으나 아군에게는 엄청난 용기를 주었다. 헬리드 병사들은 기세가 올라서 더욱 세차게 무기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