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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목을 쭉 뻗어서 겔라오드 진지 쪽을 보았다. 헬리드 영주와 다르게 겔라오드 영주는 뒤에서 지휘만 할 뿐 직접 적들과 무기를 맞대고 싸우지는 않았다.
이 전쟁을 끝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무엇인지 엔디미온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수많은 병사들을 뚫고 당장 겔라오드 영주에게 달려가서 그 목을 부러트리는 것이다.
“죽어라, 헬리드 촌놈아!”
왼쪽에서 달려드는 병사의 머리에 손도끼를 던지고 창을 크게 휘둘러서 병사 두 명을 한꺼번에 베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병사의 머리에서 손도끼도 회수하지 않고 곧장 겔라오드 영주 쪽으로 움직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겔라오드 영주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목을 부러트려 전쟁을 끝내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다른 병사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큰 엔디미온이 성큼성큼 걸으며 겔라오드 영주 쪽으로 움직이자 병사들이 그를 막기 위해 결집했다.
마치 돌격하는 전투마를 막는 창병들처럼 한곳에 모여서 무기를 내밀고 있는 모습은 제법 위협적이었다. 아무리 강인한 전투마를 탄 기병이라도 병사들이 만들어낸 벽을 그냥 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전투마가 아니었고 성배의 힘을 다루는 기사였다. 그는 자신의 튼튼한 몸과 새로 산 갑옷을 믿었다. 허리를 낮춘 상태에서 왼쪽 어깨를 쭉 내밀고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에 창을 단단히 끼우고 창대를 손으로 잡았다. 창날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주입한 창은 더욱 단단해지고 날카롭게 변했다.
바닥을 힘껏 박차고 달리자 무기를 내민 병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그들은 설마 무식하게 몸으로 들이박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저 덩치 큰 기사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생각이 뒤죽박죽이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혔다. 순간적으로 불티가 튀었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병사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엔디미온은 굳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넘어진 병사들의 몸을 뛰어넘어가며 다시 겔라오드 영주를 향해 달렸다.
“막아라! 저 자식을 막아! 영주님에게 간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겔라오드 쪽 기사 한 명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를 따라서 병사들이 엔디미온을 향해 달렸다.
엔디미온은 창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말이 달려오는 것에 맞추어서 창을 낮게 휘둘렀다. 말의 다리가 잘려나가고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몸이 엔디미온 쪽으로 고꾸라졌다. 기사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랐고 창은 그대로 머리를 관통해서 바닥에 내리꽂혔다. 엔디미온이 창을 다시 뽑은 후에 오물들을 털어내자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덤벼들 생각이 없어보이자 엔디미온은 그대로 겔라오드 영주를 향해 달렸다. 기병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는 말을 타고 엔디미온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서코트가 약간 찢어지고 그 밑에 있는 사슬갑옷에서 불티가 튀었다.
기병이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엔디미온을 노렸다. 기병과 정면대결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기병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엔디미온은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꽂고 허리춤에 있던 짤막한 검을 꺼냈다. 손잡이를 부러질 듯 쥐었다가 어깨의 탄력을 이용해서 힘껏 던졌다.
투척용으로 쓰기에는 길이가 긴 검이었지만 빙그르르 회전하면서 날아간 검은 말의 머리에 적중했다. 말이 힘을 잃고 쓰러지자 엔디미온은 손을 뻗어서 기병의 투구를 붙잡았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후에 꽂아두었던 창을 뽑아서 심장을 찔렀다. 기병은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신성력을 담은 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젖은 땅에 막대기를 꽂듯 부드럽게 들어간 창날은 심장의 온기를 빼앗았다.
“라이오넬도 알아서 잘하고 있는 것 같고.”
슬쩍 라이오넬 쪽을 보니 그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다가오는 적들만 상대하고 있었다. 장님인 그는 적과 아군을 눈으로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발달한 감각은 자신을 향하는 살기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달려드는 적들을 모두 죽이는 라이오넬의 모습은 실로 비범했다.
엔디미온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겔라오드 영주 쪽을 보았다. 그는 상황이 영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부관에게 무어라 열심히 말을 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영주 곁에서 말을 타고 있는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눌러 쓴 사람을 발견했다. 손에는 양치기마냥 길쭉한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수상쩍은 모습이었다.
“저 새끼로군.”
이제 그의 목적은 겔라오드 영주에서 망토를 두른 수상쩍은 사람으로 바뀌었다. 아직 병사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마음만 먹으면 금세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창을 단단히 쥐고서 수상쩍은 사람을 잡으러 가려고 했다.
“너! 제법 잘 싸우는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겔라오드의 이븐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길을 가로막은 것은 양손에 도끼 하나씩을 든 거한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얼굴 곳곳에 흉터가 많아서 산적 같은 생김새였다. 그는 엔디미온과 키는 비슷한데 덩치는 두 배 정도 컸다. 팔뚝이 어지간한 사람의 허리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는 몸 곳곳이 피범벅이었는데 그것은 전부 헬리드 병사의 것이었다. 남자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날을 혀로 핥았다.
더럽게 뭐하는 짓거리야. 엔디미온은 이 목청 큰 병사를 죽이고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빠르게 내지른 창은 도끼에 막혔고 다른 손에 든 도끼가 엔디미온의 손을 노렸다. 설마 막을 줄은 몰랐기에 창을 뒤로 빼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븐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다시 묻겠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겔라오드의 이븐이다!”
자꾸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라이오넬과 붙여두면 쿵짝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짤막하게 말했다.
“엔디미온.”
“그래, 엔디미온! 헬리드의 엔디미온이로군! 너! 나와 싸우자! 겔라오드와 헬리드의 이름을 걸고서 싸우자는 소리다!”
엔디미온은 이 전투광의 요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싸움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자세를 낮추고 창을 잡은 손을 뒤로 뺐다. 강력한 찌르기 한 번으로 적을 끝장낼 생각이었다.
이븐은 그런 엔디미온의 생각을 읽었는지 두 자루의 도끼를 교차해서 방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와라!”
자신감 넘치네. 엔디미온은 빠르게 창을 내질렀다. 두 자루의 도끼날과 부딪히자 쾅 소리가 났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였다. 본래라면 도끼 자루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고 창이 그대로 이븐의 배를 관통했어야 했다.
엔디미온은 이븐을 쳐다보았다. 그의 거대한 팔뚝은 힘줄이 잔뜩 솟아 있었다. 힘으로 엔디미온의 공격을 버텨낸 것이다. 대단한데. 엔디미온은 감탄했다. 악마나 되어야 성배기사의 공격을 힘으로 버텨낼 수 있을 것인데 이 남자는 인간이면서 버텨낸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비록 엔디미온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럴 리가 없다. 엔디미온은 이븐의 비정상적인 덩치를 보고서 감을 잡았다. 겔라오드 영주는 어떤 식으로든 악마의 꾐에 빠졌다. 이븐의 강력한 힘 역시 사악한 존재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했으니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하하하! 엄청난 힘이구나! 더욱 더 내 상대에 걸맞은 적이다! 싸우······.”
엔디미온은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빠르게 창을 휘둘렀다. 이븐의 목이 비스듬하게 움직이더니 그 위에 있던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는 성배기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 이븐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깔끔한 절단면 사이로 음습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건 분명히 악마의 기운이었다. 겔라오드는 어떤 식으로든 악마와 연관이 있었다.
“자세한 건 저 자식을 붙잡아서 물어보면 되겠지.”
바닥에는 죽은 병사들이 떨어트린 무기가 많았다. 엔디미온은 그것들 중에서 적당한 것을 하나 집어 들고서 힘껏 던졌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것은 메이스였다. 투척용 무기도 아니고 메이스를 던져서 멀리 떨어진 적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엔디미온이 던진 메이스는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서 정확히 노리던 것을 맞추었다.
검은색 망토의 사람이 타고 있던 말이 머리가 깨져서 쓰러졌다. 그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은 깜짝 놀라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곁에 있던 겔라오드 영주와 그 부관은 얼른 진지 쪽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곳곳에서 후퇴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겔라오드 병사들이 진지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엔디미온은 말에서 떨어진 사람이 도망치기 전에 그를 향해 달렸다. 겔라오드 병사들은 도망치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낙마하면서 발목이 부러진 것인지 검은색 망토의 사람은 끙끙 앓으면서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는 엔디미온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고서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우악스런 손아귀가 뒷덜미를 붙잡았다.
“어딜 가시려고.”
“씨발, 대체 뭐야! 너 뭐냐고! 괴물이냐?”
“내가 누구냐고? 설마 악마의 하수인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네 주인이 가르쳐주지 않더냐?”
“무슨, 무슨 개소리야?”
검은색 망토의 사람은 남자였고 목소리가 젊었다. 이런 젊은이들이 힘에 취해서 악마숭배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엔디미온은 한 손으로 남자를 들어 올린 후에 다른 손으로 망토의 모자를 벗겼다. 흔한 갈색 머리카락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외모의 청년이었다.
“······뭐야? 너 왜 요정이 아닌 거냐.”
남자의 귀는 짧았다. 요정이라면 귀가 길어야 하는데 귀가 짧고 끝이 뭉툭했다. 요정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기는! 인간이니까 아니지!”
엔디미온은 침착하기로 했다.
“그래, 요정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넌 분명 마법사일거다.”
“마법사는 개뿔! 난 그냥 기록관이야! 영주님께서 이 전투를 기록하라고 하셔서 따라나온 것뿐이라고! 나한테 대체 왜이래!”
엔디미온은 남자의 품 안을 뒤져서 종이뭉치를 찾아냈다. 내용을 확인하니 사술에 대해서 적어둔 것이 아니라 정말 전투를 기록한 것뿐이었다. 엔디미온은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 지팡이는?”
“난 본래 절름발이야! 아까부터 요정이니 마법사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남자는 요정도 아니었고 마법사도 아니었다. 사악한 악마의 하수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허탈했다. 내 생각이 다 틀렸다고? 진짜로 직업 차별적이자 종족 차별적인 생각이었나? 그는 아직 자기 손에 붙잡힌 채로 꽥꽥대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더 떠들지 못하게 뺨을 살짝 때린 후에 바닥에 내던졌다. 마녀들을 때렸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살짝 때렸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그런데 이 새낀 날 언제 봤다고 자꾸 반말이야.
“······아무래도 영주를 잡아다 족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