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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드 영주는 당당하게 성문을 통과하며 개선의 영광을 누렸다. 한 번의 전투로 백여 명의 적들을 죽였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수십 명의 적들을 사로잡았다. 노획한 무기와 겔라오드 병사 수십 명의 몸값을 합치면 이번 전쟁 준비를 위해 썼던 금액을 모두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헬리드 사람들은 이 영지전의 승자가 자신들이라고 믿었다. 겔라오드 병사들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고 진지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백 명 정도 되는 병력 중에서 상당수를 잃었으니 감히 성벽을 향해 돌격하지 못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헬리드 영주의 무용을 칭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광장에 커다란 불꽃이 치솟고 사람들은 그 주변을 돌면서 술과 먹을 것을 먹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일부는 벌써 축제를 벌이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린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의견은 묵살됐다. 엔디미온 역시 벌써부터 축제를 벌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술이 잔뜩 들어간 병사들은 더 많은 술과 고기를 찾아다닐 뿐이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겔라오드가 가져올 위협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다들 긴장감이라고 찾아볼 수 없군.”
엔디미온은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우고 혀를 한 번 찼다. 너무 오래 들고 있었던 탓에 술잔 안에 들어있던 것은 성수로 변했다. 그는 청량감이 느껴지는 성수를 꿀꺽 삼킨 후에 술잔을 바닥에 던졌다. 놋으로 만들어진 잔은 바닥에 부딪혀서 쨍 소리가 났으나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 산발적인 소리는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았다.
“아! 여기 우리의 영웅이 있군! 엔디미온! 헬리드의 엔디미온!”
누군가 엔디미온의 이름을 외치자 병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병사들은 이번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엔디미온이란 것을 알았다. 그가 혼자서 수십 명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기병까지 물리친 것을 대부분의 병사들이 보았다. 그들은 엔디미온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둥검의 라이오넬! 우리들의 영웅을 위해서 건배!”
라이오넬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잔을 들었다. 그 역시 전장에서 크게 활약했기에 병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병사들은 크게 웃으면서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셨다. 라이오넬은 본래부터 그들의 일부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았다.
엔디미온은 한층 더 시끄러워진 병사들 사이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멍청이들 사이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베로니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휴식하려는데 갑자기 병사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일반 병사와 다르게 제법 비싸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고 목소리에서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열자 점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엔디미온. 영주님께서 당신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엔디미온은 이 남자가 영주 곁에 있던 부관이란 것을 알았다. 입을 꾹 다물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관은 다시 한 번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영주님께서는 당신의 전공에 대해 치하하려고 하시는 것이니까요.”
한 나라의 국왕이 찾아왔어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에 성배기사를 어찌할 수 있는 군주는 없으니까. 그런데 일개 영주 따위가 뭐라고. 엔디미온은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승낙의 뜻으로 알아들은 부관이 그를 영주에게 안내했다.
헬리드 영주는 병사들과 같은 곳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영주라면 영주궁에서 손님들을 불러 고상하게 연회를 즐길 수도 있었으나 그는 일부러 함께 싸웠던 병사들과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작은 영지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그냥 그게 그의 성격인 듯 했다.
“겔라오드의 이븐은 혼자서 세 명의 기사를 연달아 죽였다. 그래서 별명이 도살자였지. 그는 언제나 선봉에 서서 적들을 거대한 도끼로 자르고 토막을 냈다. 사람들은 겔라오드 영주가 누구인지 몰라도 겔라오드의 이븐은 알았으니 그만큼 그의 명성이 대단했다는 소리지.”
생긴 것은 호탕한 장수인데 억양은 고상했다. 작은 영지의 주인이라도 귀족은 귀족인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겔라오드의 이븐을 헬리드의 엔디미온이 죽였으니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전사의 이름을 노래하겠구나. 엔디미온, 우리 헬리드의 영웅. 너는 대체 누구냐? 누구인데 헬리드의 전사를 자처하며 그 힘을 자랑하느냐?”
영주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 그의 숨결에서 와인 냄새가 미약하게 묻어났다. 영주는 자신의 휘하에 저런 엄청난 실력을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당연히 용병이라는 소리인데 용병이 헬리드의 문장을 달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공적을 바탕으로 기사가 되려고 한다고 해도 저만한 실력이라면 더 큰 영지의 기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차가운 바람은 약한 취기를 날려주었다. 영주는 엔디미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헬리드의 문장을 달고 싸웠던 것은 단순히 대장간에서 문장이 그려져 있던 서코트를 샀기 때문일 뿐이오. 다른 뜻은 없었소.”
“그건 내 아들의 것이군. 죽은 내 아들 말이야.”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말했다.
“그래서 정체가 무엇이냐? 떠돌이 용병이라고 하기에는 실력이 상당한데.”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용병으로서 영지전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악한 것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벌하기 위해서요.”
“사악한 것들이라고? 설마 헬리드 안에 악마나 그 하수인들이 있다는 소리냐?”
“헬리드가 아니오. 겔라오드요. 겔라오드 영주는 악마와 접촉했소. 오늘 내가 죽인 그 덩치 역시 악마에게 힘을 받았기에 그런 용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요.”
영주가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좁혔다. 그는 술잔을 들어서 목을 축인 후에 말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나는 겔라오드 영주와 사이가 나쁘지만 그래도 아주 오래 알고 지냈다. 그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고 사악한 것과 손을 잡을 만큼 어리석지 않아. 너는 내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대신에 정체도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사람의 말을 믿으라고 하고 있다.”
엔디미온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바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하무덤의 주인이자 검은 불꽃의 악마 아르할리나를 죽였소. 그리고 철십자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할리아 교구장인 율리아 경의 친구이며 옛 성터의 악마 오르탈라를 죽였소. 또한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로게나 대교구장인 그림발드 경을 대신해서 불 뿜는 거인 라가르디오를 죽였소.”
영주는 악마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도시에 악마가 한 마리만 나타나도 금세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다. 엔디미온은 그런 악마를 세 마리나 죽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악마사냥꾼이라면 겔라오드 영주가 악마의 꾐에 빠졌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나 역시 겔라오드 영주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점잖던 사람이 성격이 불같이 변하고 사소한 일로 사람을 벌하는 것을 즐겨한다는 이야기였지. 그런데 그게 악마 때문이란 소리냐? 너는 그 말을 증명해야 한다, 악마사냥꾼 엔디미온.”
“증명하는 것은 쉽지. 내일까지 기다려보시오. 분명 겔라오드 영주는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날 것이니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겔라오드 영주의 병사들은 오늘처럼 호락호락당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명심하시오. 악마숭배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전쟁이요. 왜냐하면 온갖 더러운 짓거리들을 거리낌 없이 벌일 수 있으니까.”
영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역시 악마숭배자들이 시체들에 사술을 부려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엔디미온의 커다란 덩치와 낮은 목소리, 그리고 서슬 퍼렇게 빛나는 눈이 영주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럼 내가 어쩌면 되겠나. 겔라오드의 악마를 쫓아서 온 악마사냥꾼이라면 비책이 있을 것 아닌가.”
“비책 같은 것은 없소.”
“뭐라고?”
엔디미온이 픽 웃었다.
“비책 같은 것은 없다고. 겨우 악마 따위를 상대하는데 비책까지야.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걱정 말고 잠이나 자시오. 그리고 병사들을 빨리 재우시오. 그래야 내일 한 명이라도 덜 죽을 것 아니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니 영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슬며시 곁으로 다가온 부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병사들 빨리 다 재워. 술 그만 마시라고 하고.”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술을 빼앗기고 강제로 잠자리에 처박혔다. 엔디미온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음 날을 기다렸다. 광장의 불꽃이 꺼지고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축제는 가장 불타올라야 할 때에 불만족스럽게 끝이 났다. 사람들은 툴툴댔지만 감히 영주의 명령에 토를 달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잠을 자는 사이에 달과 별들은 천천히, 그러면서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날이 밝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적들이다! 적들이야! 겔라오드 돼지 놈들이 다시 돌아왔다!”
땡땡땡 하는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투구와 무기를 챙겨들고 성벽으로 달렸다. 헬리드 영주 역시 문루 위에서 서서 겔라오드 병사들이 돌아온 것을 보았다. 그는 침음을 흘렸다.
“정말로 돌아왔군. 그 악마사냥꾼 말이 맞았어. 모두 위치로! 움직여! 빨리!”
영주의 재촉에 병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각자 위치로 이동했다. 그들은 성벽 위에서 점차 다가오는 겔라오드 군대를 보았다. 삼백 명 남짓한 것을 보니 새로 병력이 충원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뭘 믿고 다시 돌아온 거지? 병사들은 저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았다.
“헬리드 촌놈들은 들어라! 우리는 이 하찮은 성벽을 무너트리고 너희 모두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으나 헬리드 촌놈들을 불쌍하게 여겨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서로 영주의 대리인을 보내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자! 만약 우리가 진다면 그대로 물러나도록 하겠다!”
기수가 목이 터져라 크게 외쳤다. 결투라 함은 두 사람이 일신의 용력을 겨루는 일이었다. 전쟁을 하기 전에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자주 했다. 겔라오드 쪽에서 나온 것은 검은색 갑옷을 입고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였다.
“영주님,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화살이나 쏴서 쫓아내십시오.”
부관의 말에 헬리드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라니?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애초에 겔라오드 군대는 헬리드 성을 공략할 능력이 없었고 이대로 성문을 굳게 닫고 화살만 쏘아도 저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영주가 손을 들어서 궁병들에게 활을 쏠 것을 지시하려고 할 때였다. 겔라오드 기수가 다시 한 번 외쳤다.
“너희 헬리드 촌놈들은 죄다 겁쟁이들뿐이냐! 헬리드 영주는 사타구니에 달린 방울만 큰 고자라더니 그 부하들도 겁쟁이들뿐이구나!”
영주는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존을 내보내라.”
존은 덩치가 크고 검을 잘 쓰는 병사였다. 저 건방진 겔라오드 놈들을 상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성문이 열리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존이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갔다. 결투를 위해서 양쪽의 병사들이 둥글게 경기장을 만들었고 그 사이에서 검은 기사와 존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말하거나 인사를 하지 않았다. 탐색을 끝마치자 곧장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이 어지럽게 얽히다가 검은 기사가 팔을 내지르자 존의 손에 얕은 상처가 생겼다.
사람은 피를 보면 움츠러들거나 오히려 흥분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존은 콧김을 세게 내뿜으며 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실력은 출중하나 신분 때문에 기사가 되지 못했던 그였다. 이 새까만 기사가 얼마나 강하든 실력으로 누를 자신이 있었다.
강하게 내리친 검이 기사의 검과 부딪혀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존은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면서 기사를 압박했다. 겔라오드 기사가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검으로 상처를 낼 수는 없었다. 일단 기사의 자세가 흐트러질 때까지 압박하면서 검의 크로스가드로 투구를 찍어버릴 생각이었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검과 검이 부딪힌 충격으로 기사의 팔이 크게 들렸고 존은 그 틈을 노려서 투구를 후려치려고 했다.
그 순간 기사의 투구 안쪽에서 보라색 빛이 번쩍였다. 존은 갑작스럽게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억지로 검을 휘둘렀지만 기사의 검이 더 빨랐다. 그는 검을 비스듬히 휘둘러서 존의 투구를 날려버리고 맨살이 드러난 얼굴을 길게 그었다.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지고 존은 그대로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난 승부였기에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만약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있었다면 방금 전 기사와 존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겔라오드 병사들은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조용히 있었고 헬리드 병사들은 결과를 믿을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헬리드 영주는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엔디미온이 라이오넬에게 말했다.
“내려갈 준비해.”
“왜?”
엔디미온의 시선은 검은 기사를 향해 있었다. 그는 라이오넬이 장님이란 것을 알면서도 무심히 말했다.
“저 새끼가 수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