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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43화 (4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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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넬은 엔디미온이 누구를 보고 말했는지 몰랐지만 성벽 아래에서 미약하게나마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찌뿌드드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두 사람은 병사들을 헤치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그 사이에 겔라오드 기수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설마 이 자가 헬리드에서 가장 강한 자냐? 더 강한 놈을 데리고 와라!”

헬리드 영주는 주먹을 쥐면서 다음 병사를 내보냈다. 전투도끼를 들고 나간 병사는 검은 기사와 몇 합을 나누다가 존이 그랬던 것처럼 목이 떨어졌다. 그 뒤로 두 명의 병사가 더 나갔으나 기사에게 제대로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헬리드 병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영주는 이번에는 누구를 보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갑자기 성문이 열렸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성문 쪽을 쳐다보았다. 병사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어떤 멍청이가 연 거야?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영주는 곧 안도했다. 성문을 열고 나온 것은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헬리드 병사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승리는 저 두 사람이 일구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겔라오드 쪽에서 나온 검은 기사가 얼마나 강하든 두 사람이 질 것 같지 않았다.

“······두 명이서 덤비려고?”

겔라오드 기수는 크흠 소리를 냈다. 그 역시 어제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의 활약을 똑똑히 보았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이쪽이 불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할 것 없소. 우리도 결투가 무엇인지 잘 아니까. 싸우는 건 혼자요.”

“그럼 둘 중 누가 덤빌 거냐?”

엔디미온이 손으로 라이오넬을 툭 쳤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걸어나간 라이오넬은 고개를 뒤로 돌려서 엔디미온이 있을 것 같은 곳을 보며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건가? 설명을 해줘야지. 난 장님이라니까.”

“장님이라도 귀는 들리잖아. 대충 이야기 들었을 거 아냐. 가서 싸워.”

마치 투견을 가지고 싸움을 붙이는 것 같은 말투에 라이오넬이 무어라 구시렁댔다. 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검을 뽑아들고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감각을 집중하자 적이 어디에 있는지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가 나는 간격이 길고 육중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키와 덩치가 큰 자였다. 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갑옷도 입은 게 분명했다.

소리만으로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라이오넬을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월의 무게에 무겁게 짓눌린 육체는 움직일 때마다 곳곳이 삐걱거렸다. 그래도 얼치기들에게 당할 만큼 약해지지는 않았다. 호흡을 정리한 후에 한층 더 민감해진 감각이 사악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것은 결투 상대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한때 의무로부터 도망쳤다고 해서 옳고 그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악마와 손을 잡은 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결투를 하기 전에 묻겠다. 이름이 무엇이냐?”

대답은 없었다.

“흠, 과묵한 자로군. 그럼 내가 먼저 소개하지.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

검은 기사가 갑작스럽게 움직였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반응하기 힘든 속도였는데 라이오넬은 오직 동물적인 감각에 의지해서 공격에 반응했다. 기사가 휘두른 검이 허공을 갈랐고 라이오넬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서 공격 자세를 잡았다.

빠르게 휘두른 검이 갑옷과 부딪쳐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불티가 튀면서 갑옷에 기다란 상처가 남았다. 손에 남은 감각으로 공격이 명중했다는 것을 알아챈 라이오넬은 다시 한 번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감히 반응하기도 힘들 정도로 잽싸게 움직이는 검은 기사의 갑옷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만약 기사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매서운 공격이었다.

“흐아아아!”

검은 기사는 갑옷을 믿고서 좀 더 저돌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날아오는 검을 건틀릿 낀 손으로 쳐낸 후에 반대쪽 손으로 검을 내질렀다. 라이오넬은 몸을 비틀어서 공격을 피했고 곧장 검을 회수해서 대각선으로 크게 올려쳤다.

한때 수많은 악마들을 죽이고 대악마 다르디낭과 싸웠던 영웅의 검은 갑옷을 길게 잘랐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웅의 노련한 검술과 강력한 완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갈라진 기사의 가슴 쪽에서 보라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라이오넬은 그것을 보지 못 했으나 직감적으로 무언가 스산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성벽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은 검은 기사의 투구 안쪽에서도 보라색 빛이 번쩍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라이오넬에게 조심하라고 소리칠 때였다.

기사는 기합을 지른다기보다는 울부짖는다는 느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거칠게 바닥을 박차고 달려서 라이오넬의 몸에 부딪쳤다. 그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자 기사는 두 손으로 검을 꽉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검 주변으로 보라색 기운이 회오리치더니 완전히 검에 달라붙어서 불길하게 번쩍였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라이오넬은 먼저 공격할 생각으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바닥을 박차기도 전에 기사가 휘두른 검이 직격했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서 막았으나 보라색 기운이 감싸진 기사의 검이 굉음을 발생시키면서 라이오넬을 뒤로 날려버렸다.

그 충격으로 라이오넬은 바닥을 여러 번 굴렀고 먼지구름이 그의 모습을 감추었다. 헬리드 병사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들은 라이오넬이 졌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검은 기사가 보여준 엄청난 공격에 더 놀랐다. 저런 공격이라면 성문을 부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하하! 보아라! 우리가 또 이겼다! 이 헬리드 촌놈들! 어제의 승리로 우쭐하지 마라! 우리는 너희보다 더 강하다!”

겔라오드 기수가 경박스럽게 웃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있는 엔디미온을 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우리가 이겼으니 이번에는 네가 덤빌 것이냐?”

“나 말이오?”

“그래, 너. 여기에 너 말고 다른 누가 있다고.”

엔디미온은 팔짱을 풀고서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누가 보아도 몸을 푸는 듯한 모습에 겔라오드 기수가 웃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냥 몸만 가볍게 풀었을 뿐, 검을 뽑지도 않았고 싸울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 마디만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내가 왜?”

“왜냐니. 우리가 이겼으······.”

갑자기 먼지구름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의 모습을 보지 못 했다. 그것은 너무 빨랐고 애초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목이 잘렸다. 갑옷과 투구 사이의 얇은 틈을 노리고 날아간 칼날이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보이지 않는 칼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사의 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있던 기수의 목까지 잘라버렸다. 두 개의 목은 거의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수가 타고 있던 말이 주인의 죽음에 놀라서 도망쳤다.

모두가 침묵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서서히 걷히는 먼지구름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라이오넬이 있었다. 그는 마치 검을 휘두르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라이오넬이 기사의 목을 벤 것인가? 하지만 검은 기사와 라이오넬 사이에는 몇 발자국이나 되는 거리가 있었는데 대체 무슨 수로?

모두의 궁금증을 유발한 라이오넬은 천천히 자세를 바로 잡으며 검을 정리했다. 그리고 한 쪽 손을 위로 들며 소리쳤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천둥검은 강하다!”

병사들은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다시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라이오넬이 이겼다! 천둥검의 라이오넬이 이겼어!”

“천둥검! 천둥검! 천둥검!”

병사들의 환호를 들으면서 라이오넬이 어깨를 으쓱였다. 엔디미온은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목이 잘려 죽은 기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투구를 쓴 채로 떨어진 머리를 손으로 집었다. 투구는 머리를 완전히 가리는 형태라서 바이저를 열어서 안을 확인해야 했다.

엔디미온은 손가락으로 바이저를 밀어올렸다. 그리고 미간을 좁혔다. 투구 안에 들어있는 머리는 썩은 시체의 것처럼 악취를 풍겼다. 퉁퉁 부은 얼굴 위로는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고 눈알 하나가 사라진 눈구멍으로는 벌레들이 들락날락거렸다. 그리고 하나만 남은 눈알은 탁한 백색이었는데 거기서 보라색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기사가 갑자기 썩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엔디미온은 투구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창을 잡으며 말했다.

“지저분한 전투가 되겠군.”

쿵쿵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한두 명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겔라오드 군대가 전부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그대로 전진했다. 겨우 삼백 명 남짓한 병사들로 성을 공략하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지만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진군했다.

헬리드 병사들도 긴장한 얼굴로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궁병들은 시위에 화살을 걸었고 영주가 사격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엔디미온! 라이오넬! 얼른 성 안으로 들어와라!”

영주가 크게 소리쳤지만 엔디미온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성문을 연 병사들에게 다시 닫으라고 손짓했다. 병사들은 고민하다가 겔라오드 군대가 가까이 다가오자 얼른 성문을 닫았다.

적들이 성벽으로 거침없이 진군하자 영주는 사격 명령을 내렸다. 수십 발의 화살들이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비가 오는 것처럼 후두둑 쏟아지는 화살들은 적들의 머리를 맞추고 어깨에 박히거나 아니면 바닥에 처박혔다.

겔라오드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단순하게 두려움을 몰랐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본래라면 화살에 맞고 죽었어야 할 병사들이, 죽지는 않았어도 바닥에 쓰러졌어야 할 병사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성벽 위의 궁병들이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병사들 사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들은 영주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사격 명령뿐이었다. 쉬지 않고 날아간 화살들이 적들의 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움직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근처에 악마숭배자가 있는 모양이군. 라이오넬, 성문을 지켜라. 악마숭배자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러지. 사방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얼른 처리하게.”

라이오넬은 왔던 길을 더듬어서 성문 쪽으로 갔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고서 병사들의 제일 뒤에서 말을 타고 있는 겔라오드 영주를 발견했다. 그 곁에는 어제 목이 떨어졌던 이븐이 한 손에는 자기 머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도끼를 든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으어어어어!”

아까 전 목이 잘려서 죽은 기사가 다시 일어나서 공격하려고 하자 엔디미온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창을 내질러서 썩어버린 몸에 구멍을 내주었다. 기사가 다시 힘없이 털썩 쓰러졌다. 엔디미온은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았다가 다시 이븐을 보며 말했다.

“얼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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