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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44화 (4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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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적들을 향해 바로 달려나가지 않았다.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겔라오드 병사들을 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가 죽여야 할 사람들이었다. 한때 겔라오드를 지키던 용맹스러운 병사들이었으나 지금은 사술에 걸린 악마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완전하게 불사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쓰러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 싸움을 끝내려면 얼른 악마숭배자를 찾아야 했다. 한 손으로 빙그르르 돌리던 창을 세게 붙잡았다. 창날이 흔들리면서 은은한 빛을 사방으로 뿌렸다. 다가오던 적들은 엔디미온을 보고서 주춤거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적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잠깐 주춤거렸지만 각자의 무기를 들고서 엔디미온에게 달려들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악마숭배자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악마숭배자의 힘이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악마는 더욱 강력할 것이고.

성배기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영문도 모르고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기꺼이 빼앗기로 했다. 그게 의무니까.

“덤벼라!”

커다란 외침은 적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충분했다.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엔디미온에게 달려들었다. 크게 휘두른 창이 그들의 가슴을 긋고 사지를 잘랐다. 창날이 지나간 곳에는 재가 흩날렸다. 강력한 신성력을 머금은 창날은 사악한 악마의 하수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신성력은 병사들의 몸을 태우고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렸으며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사악한 힘을 빼앗았다. 엔디미온은 두 손으로 창을 단단히 잡고서 달렸다. 날카로운 창이 병사의 몸을 관통했고 안쪽으로 쑥 들어간 창은 그대로 그 뒤에 있는 병사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창을 다시 회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병사들의 몸은 재가 되어 흩날리며 힘없이 무너졌다.

그것은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성배기사의 넘치는 힘은 온누리에 빛을 뿌리는 태양과 같았고 악마의 하수인들은 결코 그 강렬한 빛을 견딜 수 없었다.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났다. 빛을 머금은 창이 크게 움직일 때마다 병사들 두세 명이 죽었다.

하지만 엔디미온 혼자서 모두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수십 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며 숫자를 줄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백 명이 넘는 적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들은 엔디미온을 무시하고 곧장 성벽으로 달려가더니 맨손으로 성벽을 타고 올랐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헬리드 병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곧 영주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성벽을 오르는 적들을 창칼로 찔러서 밑으로 떨어트렸다.

그런 식으로 겔라오드 병사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성문을 지키고 있던 라이오넬이 처리했다. 미약하게나마 성배의 힘이 남은 그였기에 충분히 병사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다시 고개를 들어서 겔라오드 영주 쪽을 보았다. 그는 엔디미온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내가 무섭기는 한 모양이구나. 성배기사는 창을 어깨 위로 들었다. 그리고 어깨를 뒤로 빼면서 창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다음 동작은 간결했다. 허리에서 어깨까지, 그리고 어깨에서 손목까지, 효과적으로 힘을 전달하며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날려버릴 기세로 창을 던졌다.

라가르디오가 그랬던 것처럼 날아간 창은 처음에는 불꽃이었으나 그 다음은 빛이 되었다. 겔라오드 영주가 얼마나 대단하든 이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엔디미온은 확신했다. 창은 화살처럼 날아가서 살을 찢고 뼈를 부수며 사람의 몸을 분리시켰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며 날아가는 사지의 모습이 비현실적이었다.

엔디미온은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창이 떨어진 곳을 쳐다보았다. 겔라오드 영주는 아직 살아있었다. 방금 죽은 것은 영주가 아니라 어제 죽였던 이븐이었다. 그는 창이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영주를 밀쳐내며 대신 창을 맞았다. 목이 잘려서 머리도 손에 들고 있는 놈이 어찌 그리 빠르게 반응했는지 궁금한 일이었다.

회심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엔디미온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라가르디오가 했던 것처럼 손을 뻗고 창을 다시 불러오려고 했다. 하지만 창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바닥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불꽃을 일으키는 기능처럼 다시 돌아오는 기능도 사라진 모양이었다.

좀 살살 때릴 걸. 불꽃을 일으키는 기능은 없어도 괜찮지만 투창하고 다시 돌아오는 기능이 없어진 건 좀 고까웠다. 엔디미온은 날아간 창 대신에 몸 곳곳에 신성력을 둘렀다. 은은하게 빛이 나는 주먹으로 적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으깼다.

사술에 걸린 병사들은 오히려 멀쩡할 때보다 상대하기 쉬웠다. 그들의 몸은 신성력에 너무 취약해서 그냥 한 대 툭 치기만 해도 재로 변했다. 상대가 일반 병사들이었다면 겔라오드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위용을 떨쳤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성배기사였다.

“구역질나는 악마숭배자야!”

우렁찬 외침은 병사들의 움직임을 잠깐이나마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들은 움찔거렸다가 다시 엔디미온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한 순서대로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갈 뿐이었다.

“지금 나타나면 곱게 죽여주마! 이건 마지막 기회다! 내가 널 찾아내면 눈알을 뽑고 사지를 자르며 창자를 뽑아 그 목을 조를 것이다! 그런 꼴을 당하기 싫다면 지금 나타나라!”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 엔디미온은 악마숭배자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은 병사들뿐이었고 악마숭배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양손으로 병사들의 머리를 붙잡고 서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재가 되어 무너지는 병사들의 몸을 바닥에 내던지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 사실 나도 안 나오길 바랐다. 그래야 내가 말한 대로 죽일 수 있으니까, 이 더러운 개자식아.”

엔디미온이 혼자서 죽인 병사들의 숫자가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숫자가 줄어든다는 느낌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적들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었어야 했는데 처음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고개를 들고서 겔라오드 영주 쪽을 보았다. 이미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그는 손에 책을 들고서 책장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는데 책에서 흘러나오는 보라색 빛이 대단히 음산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악한 기운이 강해졌고 책에서 흘러나온 보라색 빛이 땅 아래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그 안에서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몸 곳곳에 상처가 있는 모습을 보고서 저들이 어제 죽었던 병사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겔라오드 영주는 지금 사술을 부려서 죽은 자들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겔라오드 영주가 진짜 악마숭배자인 것은 아니었다. 사악한 기운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만 느껴질 뿐 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현혹시킨 악마숭배자는 분명히 이 근처에 있었다.

“조만간이다, 악마숭배자야.”

엔디미온은 호밀밭의 집을 습격했던 마녀가 떠올랐다. 그때의 마녀도 사술로 죽은 자들을 일으켰다. 무슨 거창한 이름의 악마를 추종하던 여자였는데.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머리는 그것 말고도 기억해야 할 것이 많아서 요정 따위에게 많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병사의 창을 주어들고 겨드랑이에 끼워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힘껏 잡은 후에 자세를 낮추었다. 왼쪽 어깨를 내밀고 달려나갈 준비를 했다. 여기서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은 겔라오드 영주였고 병사들을 상대한다고 너무 시간을 끌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영주가 바로 도망칠 것이다.

영주는 꼭 잡아야 했다. 그래야 그 뒤에 있는 악마숭배자와 악마를 찾아내서 죽일 수 있었다. 신성한 빛이 몸을 휘감았다. 성배기사는 그 스스로가 창이 되어 적을 향해 돌진했다. 병사들은 그를 막기 위해 몸을 던졌으나 불어오는 바람에 재가 되어 흩날릴 뿐이었다. 무시무시한 돌격을 막아낼 수 있는 존재는 없었고 겔라오드 영주를 향해 일직선으로 길이 뚫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엔디미온을 본 겔라오드 영주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한 장을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바닥이 진동하더니 엔디미온의 정면에 커다란 바위가 솟았다. 하지만 창은 바위를 마치 모래성처럼 부수며 전진했다. 그 다음 장을 찢어서 던지자 이번에는 넝쿨이 솟아올라서 엔디미온의 몸을 붙잡으려 했다. 넝쿨은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끊어지며 찰나의 시간조차도 벌지 못했다.

그 뒤로도 겔라오드 영주는 몇 개의 마법을 더 사용했다. 하지만 어떠한 마법도 엔디미온의 돌진을 막을 수 없었다. 영주는 두려움 때문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손으로 책을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남아있는 책장을 한꺼번에 모두 찢었다. 강렬한 보라색 빛이 사방을 물들였다.

엔디미온이 내지른 창이 보호막과 충돌했다. 그것은 강력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깨졌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보호막이 있었다. 아직 힘을 잃지 않은 창은 그대로 전진했고 다시 한 번 보호막을 깼다. 하지만 겔라오드 영주를 찌를 수는 없었다. 수십 장이 겹쳐진 보호막이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창은 보호막을 부수고 또 부쉈다. 박살난 보호막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이리저리 빛을 난반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의 보호막이 남았을 때, 엔디미온의 창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십 장의 보호막을 부수는 사이에 창은 처음의 기세를 잃었고 결국 한 장의 보호막을 뚫지 못했다. 겔라오드 영주는 슬며시 눈을 떠서 상황을 확인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불쑥 튀어나온 손이 마지막 보호막을 부수고 영주의 머리를 붙잡았다. 손은 말에 타고 있던 그를 그대로 들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날아온 주먹이 코뼈를 부수고 이를 부러트렸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영주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악마의 꾐에 빠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 수많은 악마의 하수인들에게는 수많은 사정이 있다.”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영주의 멱살을 붙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난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그게 널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으니까.”

겔라오드 영주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멱살을 잡은 손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으나 몸부림칠 때마다 숨통이 더 조일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사, 살려주게! 제발! 제발, 제발 살려주게!”

“그건 내 의무가 아니다.”

엔디미온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으로 이제 목을 움켜쥐었다. 두껍고 단단한 손이 힘을 불끈 주었다.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영주의 목이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움직였다. 목을 잡은 손에 힘을 빼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스르륵 쓰러졌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죽은 영주의 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바닥에는 책장이 모두 찢겨 너덜너덜해진 책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겉장이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가죽을 벗겨서 만든 책은 마지막 발악처럼 보라색 빛을 짜냈다. 그것이 재로 변하는 것과 동시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영주의 몸이 발작하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찢어진 살은 더 튼튼한 가죽으로 변했고 부러진 뼈는 다시 붙으면서 더 크고 단단하게 변했다. 스스로 몸을 부수고 재조립하던 영주가 다시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한 마리의 악귀였다.

엔디미온은 아까 투창했던 라가르디오의 창을 바닥에서 뽑았다. 그것을 악귀에게 내지르며 말했다.

“이게 내 의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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