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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45화 (4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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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는 거창하게 변신한 것치고 별다른 활약도 없이 쓰러졌다. 아무리 악마에게 힘을 받았다고 해도 악귀는 악귀일 뿐이었다. 악마가 와도 성배기사의 상대가 안 되는데 악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쓰러진 악귀의 몸에서 창을 뽑았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들은 모두 그를 지나쳐서 맨손으로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성벽 위의 헬리드 병사들이 창칼을 휘둘러서 그들을 떨어트리면 라이오넬의 검이 머리와 몸을 분리시켰다.

병사들의 숫자는 착실히 줄고 있었지만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 라이오넬 혼자기에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엔디미온은 성문으로 돌아가려다가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는 창을 바닥에 꽂고서 겔라오드 영주가 타고 있던 말을 향해 걸어갔다. 말은 주인을 잃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은 본래 겁이 많은 생물이었다. 주인이 죽었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엔디미온은 말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음산한 기운을 느꼈다. 이 말 역시 악마의 힘을 받은 것이다.

“날 지켜보고 있구나.”

말의 두 눈이 탁한 색깔로 변했다. 코에서 세찬 콧김이 뿜어져 나오더니 머리에서 두 개의 뿔이 솟아올랐다. 말은 입에서 불을 뿜었고 엔디미온이 신성력을 두른 손으로 불꽃을 가르자 머리에 난 두 뿔로 들이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이 내뻗은 두 손이 뿔들을 붙잡았다. 말과 힘겨루기에 들어갔으나 밀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겔라오드 영주가 타던 말은 덩치가 크고 황소처럼 힘이 셌으나 성배기사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가뿐하게 말의 머리를 밀어내면서 손으로 잡고 있던 두 뿔을 뽑았다. 그리고 곧장 자세를 낮추고 어깨로 말의 몸통을 받친 후에 두 손으로 목을 세게 붙잡았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지기 시작했다. 말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압박당해 숨을 쉴 수도 없었고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말의 두꺼운 목은 성배기사의 힘에 굴복했다. 목뼈가 부러진 말은 혀를 길게 내빼고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겁이 없는 거냐.”

엔디미온은 쓰러진 말을 보며 말했다.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거냐.”

“둘 다 아니다, 이 건방진 것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여자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가죽으로 만든 바지를 입었고 그 위에는 가죽갑옷을 입었다. 허리춤에는 길쭉한 검이 두 자루나 매달려 있었고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있었다. 키가 크고 전체적으로 늘씬한 체형이었다. 머리는 검은색이었고 살결은 희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차가운 인상의 미녀였다.

하지만 엔디미온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귀가 길쭉했다.

“······반만 맞았군.”

“뭐가 말이냐?”

엔디미온은 대답하는 대신에 바닥에 꽂혀있는 창을 뽑았다. 그것을 본 요정이 말했다.

“낯익은 창인데. 어디서 났지?”

“어디서 나긴.”

“설마 라가르디오를 죽인 거냐?”

요정은 엔디미온이 창을 들었는데도 무기를 뽑지 않았다. 그게 자신감의 발로인지 아니면 그냥 멍청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라가르디오는 그래도 악마인데 일개 하수인 따위가 친구 부르듯 하는 건 좀 우습군.”

“너는 내가 누구인 것 같나?”

누구긴 누구야. 악마숭배자겠지. 엔디미온이 말하기 전에 요정이 먼저 말했다.

“라가르디오는 오래 살아온 악마지만 나잇값을 못했지. 아주 긴 시간 동안 자기 동굴에 틀어박혀서 인형놀이나 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는 분명 강력한 악마 중 하나였지만 자존심이 세고 아집이 강해서 멍청한 짓거리를 자주 했다. 바로 내 주인님의 손을 걷어찬 것 말이야. 주인님은 서른셋 악마들을 이끄는 분이시며 대악마의 참된 적자이시다. 라가르디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주인님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에는 너 따위에게 목숨을 잃었다. 멍청한 자에게 어울리는 죽음이구나.”

구구절절한 사정 따위는 관심 없었다. 엔디미온은 대충 흘려들으며 요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나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 나는 다리 달린 뱀의 추종자이며 여섯 날개 악마의 충실한 종복이다. 내 주인께서 내게 강력한 힘을 하사하셨으니 얼치기 악마 따위는 내 적수가 될 수 없고 나는 라가르디오를 이름으로 부를 자격이 있다.”

줄줄 이어지는 자기소개를 들으면서 엔디미온은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다. 다리 달린 뱀의 추종자이자 여섯 날개 악마의 충실한 종복이라는 소리는 저번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두드리며 기억을 더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그건 내 동생의 이름인데.”

요정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엔디미온이 작게 아 소리를 냈다. 그래, 이제야 알겠군. 호밀밭의 집을 습격했던 올리비아가 사용했던 사술, 그리고 이곳에서 겔라오드 영주가 썼던 사술. 그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악마에게서 나온 힘이었다. 여기 있는 요정이 겔라오드 영주를 꾀었을 것이고 사악한 힘이 담긴 책을 주어 헬리드 영지를 공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체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루고 주변의 다른 영지로 전쟁의 불씨를 번지게 만들려고 했음이 분명했다.

자매끼리 잘하는 짓이다. 엔디미온은 혀를 한 번 찬 뒤에 말했다.

“요정 놈아, 이름이 뭐냐?”

요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내 동생의 이름을 알면서 나의 이름은 모른다는 소리냐? 날 기분 나쁘게 하는군. 올리비아는 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덜떨어진 얼치기였다. 내 동생에 대해서 알기 전에 응당 나부터 알아야 하는 것을.”

애석하게도 두 요정 모두 엔디미온에게는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는 얼치기들이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다니 참 멍청하구나. 하긴 그러니 그 알량한 신성력을 믿고서 내게 대드는 것이겠지. 너는 제법 강력한 성기사지만 나를 이길 정도는 아니다.”

엔디미온은 그냥 웃었다. 멍청한 건 오히려 요정이었다. 그녀는 엔디미온이 성배기사란 것을 몰랐다. 그저 성기사라고 생각할 뿐이었는데 참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하긴 이 요정은 엔디미온을 죽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 엔디미온이 우연찮게 이 일에 관여하게 된 것이니 그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 년 전부터 살아온 악마가 아니라면 단번에 성배기사를 알아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나는 신디아다. 여섯 날개 악마의 다섯 번째 칼날이지.”

“그건 다섯 번째로 강하다는 소리냐.”

신디아가 두 개의 검을 천천히 뽑았다. 검이 검집과 마찰해서 나는 날카로운 소리는 신경을 절로 곤두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처음과 같이 덤덤한 얼굴이었다.

“······숫자는 강함과 상관없다.”

“제일 강한 건 아닌 모양이군. 그럼 네 동생은 몇 번째냐.”

“하! 내 동생? 그 덜떨어진 놈은 감히 주인님의 칼날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그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하수인들 중 하나일 뿐이야. 올리비아는 언제나 주인님의 인정에 목말라 있었지. 그래서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일을 벌이고 다녔지만 늘 대단한 수확은 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랬겠지?”

신디아의 검 하나가 엔디미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올리비아가 성배기사의 거처를 찾아내 습격했단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자매끼리 대화도 안 하고 사나.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녀는 내 손에 죽었다. 대단할 것도 없던 실력이더군. 그래서 동생의 복수를 할 셈인가?”

“내가? 동생의 복수를? 웃기는군. 애석하게도 우리 둘 사이는 서로의 복수를 다짐할 만큼 대단치가 않아서 말이야. 내가 널 죽이는 것은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음, 하지만 널 죽이면 의도치 않게 동생의 복수를 하게 되겠군.”

“너처럼 자신감 넘치는 놈들을 보면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지.”

엔디미온은 몸 안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힘은 주변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신디아는 몸을 찌르는 듯한 감각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당장 검을 들고 달려들지 않았다. 이 정도 신성력은 참을 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게 엔디미온의 전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할 수 있으면 한 번 해 봐. 자신 있으면 덤벼보라고.”

“······너, 건방진 성기사야. 이름이 무어냐? 헬리드와 겔라오드의 기사수도회를 도시에서 몰아냄으로써 이곳에 성기사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나타나서 나를 방해하느냐?”

“엔디미온.”

“구역질나는 이름이군. 성배기사의 이름이 아니냐. 그런 이름을 자기 자식에게 붙이는 자들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런다고 자기 아이가 영웅처럼 클 줄 아느냐? 무지한 자들이나 하는 짓거리지.”

내 이름이 뭐 어때서. 엔디미온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이자 산디아가 웃으며 말했다.

“성배기사에 대해 함부로 말한 것이 기분 나쁜 모양이구나. 하지만 사실인걸. 영웅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대개 대단치 않았다. 너 역시 그럴 것이고. 나의 주인님께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벌이도록 시켰으니 나는 마땅히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 지금부터 너를 이 전장에서 배제하도록 하지.”

엔디미온은 잠깐 침묵했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등 뒤에 메고 있는 그 화살통, 활도 없는데 무슨 수로 쏘는 거지? 설마 손으로 들고 던지는 거냐? 그건 좀 우습겠군.”

사실 아무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엔디미온은 그냥 화살통을 등에 멘 것이 눈에 들어오기에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뿐이었다. 신디아의 무장은 두 자루의 검이었고 어디를 쳐다보아도 활은 없었다. 정말 궁금했다기보다는 빈정거리려고 했던 말이었다.

신디아는 보라색으로 칠한 입술의 끝부분을 끌어당기며 웃었다.

“그게 궁금했느냐? 호기심이 많은 놈이로군. 내가 너의 궁금증을 해결해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곧 죽을 놈이니 특별히 가르쳐주마.”

“아니, 사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은데.”

“잘 보아라.”

“야, 안 궁금하다고.”

신디아는 엔디미온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두 자루의 검을 들어올려 손잡이의 끝부분끼리 부딪쳤다. 그러자 처음부터 한 자루였던 것처럼 두 자루의 검이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직선으로 곧게 뻗은 것이 아니라 칼날이 위로 갈수록 점점 휘어지는 형식의 세이버였다. 신디아는 두 자루의 검이 붙은 부분을 손으로 잡고서 다른 손으로 화살통을 뒤적였다.

검은 반달 모양을 그렸고 그것은 일견 활처럼 보였다. 검의 양쪽 끝부분에서 보라색 빛이 나는 실 같은 것이 생겼고 신디아가 그것을 시위 삼아서 화살을 걸었다. 시위에 걸린 화살은 한 대가 아니었다. 모두 세 대. 화살들은 보라색으로 빛나며 엔디미온을 향해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엔디미온은 화살에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그는 민첩하게 움직이며 세 발의 화살을 모두 피했다. 바닥에 처박힌 화살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고 주변으로 박살난 바닥의 잔해가 날렸다.

신디아는 깔깔 웃으며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잽싸구나. 그럼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분명 금세 끝이 나겠지만 말이야. 네가 겁도 없이 지껄였던 말들을 모두 되돌려주마. 눈알을 뽑고 창자로 목을 조르는 것 말이다. 몹시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영광스러운 일이다. 내 손에 죽는 것 말이다.”엔디미온도 웃었다. 거 씨발 되게 깝죽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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