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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손님이 많군.”
언덕 위의 무리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들의 모습을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 모두는 갑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창칼이나 메이스 따위를 들고 있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보통의 병사들은 아니었다. 대부분 덩치가 컸고 무기를 잡고 있는 모습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움직여서 깃발 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촛대를 들고 있는 사자 모양이었다. 깃발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무장한 병력과 덜컥 마주치게 되면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엔디미온은 아니었다. 그는 느긋한 동작으로 신디아가 떨어트린 검 두 자루를 집어 들었다. 백 년 전에 악마들과 싸우다가 무기가 부러져 악마의 무기를 들고 싸웠던 일이 생각났다.
악마숭배자가 쓰던 검이라 사악한 기운이 남아있었지만 그 정도야 성배기사의 힘으로 정화할 수 있었다. 일단 검을 챙기고 나서 언덕 위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엔디미온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쳐지나갔다. 엔디미온도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적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악한 것들을 벌하는 것. 방금 지나간 자들은 성기사들이었다. 도시를 떠났던 성기사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안녕하신가?”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는 체형이 호리호리하고 잘생긴 얼굴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는데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엔디미온도 웃으며 말했다.
“글쎄, 솔직히 안녕하지는 않소.”
“그래? 솔직한 친구로군. 나는 은사자 기사수도회의 엘런이라고 하네. 변변찮은 몸이지만 대장을 맡고 있지.”
다른 성기사들은 모두 헬리드 성으로 달려갔는데 엘런만은 엔디미온 근처에 남았다. 자기 부하들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싸움에 자신 없는 떠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우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겠지? 자네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아, 성기사란 작자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나타났지? 설마 내 공을 날름 빼먹으려는 건 아닐까? 맞지? 하하하, 생각을 들켰다는 얼굴이군!”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엔디미온은 이 수다쟁이의 입을 잡고 쭉 늘려주려다가 참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엘런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그런 경우 없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이건 자네의 공이야. 그건 자네의 발밑에 깔린 그 귀쟁이가 증명하지.”
엔디미온은 자기 발을 쳐다보았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신디아의 머리를 밟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발을 치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디서 뭐하다가 나타난 거요?”
“아, 그거 말이야. 설명하자면 길지. 그러니까 헬리드와 겔라오드 사이에······.”
“짧게.”
“그럼 짧게 하지. 우리는 처음에 로게나로 가려고 했어. 일단 그곳에서 머물면서 대교구장 각하의 도움을 좀 받으려고 했거든. 이런 말하면 내 자랑 같겠지만 로게나 대교구장이신 그림발드 경이 나랑 동문일세. 내 선배님이란 소리지.”
한 대 때릴까. 엔디미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물어본 것만 대답하시오.”
“······음, 로게나로 가려던 중에 사악한 기운을 느끼고 되돌아 온 걸세.”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알맞을 때 왔군. 나 혼자서 저들을 다 죽이려면 제법 시간이 걸렸을 거요. 덕분에 빨리 끝낼 수 있겠소.”
“나는 헬리드의 성기사로서 언제나 겔라오드 놈들이 마음에 안 들었지. 우리랑 별 다를 것도 없으면서 언제나 으스대는 게 좀 꼴같잖았단 말이야.”
“그럼 기쁘겠소. 그 재수 없는 겔라오드 놈들을 죽일 수 있으니.”
“기쁘겠다고? 하하하, 아무리!”
엘런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한참 웃다가 웃음을 멈추고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기쁠 리가 없지. 난 언제나 내가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네. 그리고 그건 내 부하들도 마찬가지고.”
정신 사나운 촉새인 줄만 알았는데 제법 점잖은 구석도 있었다. 엘런은 갈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신앙이 뿌리 내릴 토지였고 자란 것은 성기사로서의 소양이었다. 말했던 것처럼 그는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알았다.
사악한 것들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엘런은 그것을 알기에 괴로움을 느꼈다. 한때 사람이었던 것을 죽여야 하니까.
“혹시 자네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아, 오해하지는 말게.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 자네는 악마숭배자 같은 것이 아니야. 그건 내가 알아.”
이번에는 헬리드 영주에게 했던 것처럼 무슨 악마를 죽였는지 줄줄 말하고 율리아와 그림발드의 이름을 들이밀 이유가 없어졌다. 엔디미온은 짤막하게 말했다.
“엔디미온이오.”
“멋있는 이름이군. 영웅의 이름이잖나. 난 어릴 적에 자네처럼 영웅의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부러워했지. 그래서 어머니께 내 이름을 라이오넬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매만 호되게 맞았지. 엘런이란 이름이 뭐 어떠냐고. 나쁘지는 않지. 그런데 라이오넬이 더 멋있잖아.”
엔디미온은 잠깐 침묵했다.
“······어머니께 감사하시오. 라이오넬이란 이름은 좀 그러니까.”
“응? 그 이름이 왜? 난 라이오넬이 제일 마음에 들던데.”
“아니, 그냥, 음, 그런 게 있소.”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영웅이 지금은 노망 난 영감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엘런은 어떤 얼굴을 할까.
“아니,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잠깐 그 시체도 봐도 되겠나? 아무래도 그 귀쟁이가 이번 일의 주범인 것 같으니 말이야.”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신디아를 면밀히 관찰했다. 혹시나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다면 엔디미온에게도 유익한 일이었다. 이런 악마숭배자들은 아무리 죽여도 끝이 없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서 악마숭배자가 되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사람들을 보호하려면 악마숭배자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악마들을 잡아다 족쳐야 했다. 신디아가 모시는 악마 밑에는 서른셋 악마가 있다고 했으니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야 했다.
“오, 이런······. 이럴 수가······. 말도 안 되는 일이······.”
엘런이 자꾸만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엔디미온은 그가 무언가 대단한 정보를 알아낸 것 같아서 조용히 기다렸다. 벌떡 일어난 엘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 자는 여섯 날개 악마의 다섯 번째 칼날인 신디아일세! 정말 놀랍군!”
그건 나도 알아. 대단한 사실을 알아낸 줄 알았는데 별것도 아닌 정보였다. 엔디미온은 맥이 빠졌다.
“그거 말고 좀 다른 정보는 없소? 그 요정이 신디아라는 건 자기 입으로 말해서 알고 있었소.”
“응? 아, 그런가? 머쓱하군. 어쨌거나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일세. 신디아는 악마만큼 강한 악마숭배자일세. 혹시 이 자를 자네 혼자 죽였나? 그건 아니겠지?”
“나 혼자 죽였소.”
엘런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말고.”
“거짓말인 것 같소?”
“흐음······.”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곳에는 엔디미온과 신디아의 시체뿐이었다. 누군가 도와준 사람이 있다면 엔디미온과 함께 멀쩡히 살아있거나 신디아와 함께 죽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주변에는 산 사람도 없었고 죽은 사람도 없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신디아는 혼자서 기사수도회 하나를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일세. 성기사들이 여러 명 달라붙어야 죽일 수 있는 강적인데 자네 혼자 죽였다고? 무슨 수로?”
“창으로 심장을 찔러서.”
마치 손으로 때려서 벌레를 잡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엘런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분명히 엔디미온이 혼자서 신디아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악마사냥꾼들 중에서 혼자서 악마를 사냥하고 다닐 만큼 강한 자들이 있었다. 성기사들 중에서도 마찬가지고. 지금 여기 있는 엔디미온은 그만큼의 강자인 것이다.
“그것보다 다른 정보나 좀 알아내 보시오.”
엘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시체보고 이름 알아냈으면 다 알아낸 거지, 다른 정보라고 할 게 또 뭐가 있나.”
“당당하니까 오히려 호감이군.”
“비꼬지 말게. 음, 그럼 여명교단 내부에서 얻은 정보라도 좀 알려주겠네.”
“여명교단 내부의 정보를 남에게 들려줘도 괜찮은 거요?”
“내가 아는 정보는 모두 바깥으로 흘러나가도 상관없는 정보들뿐이야. 난 겨우 촌구석에 처박힌 기사수도회의 대장일 뿐인걸.”
엔디미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엘런이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서 여섯 날개 악마의 하수인들이 일을 벌이는 경우가 많아졌어. 신디아의 동생도 그들 중 하나인데 아주 성가신 마녀일세. 혹시 들어본 적 있나?”
“올리비아 말이오? 내가 죽였으니까 걱정할 것 없소.”
“음? 정말로?”
“정말로.”
보통 사람이라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할 법도 한데 엘런은 엔디미온의 말을 그냥 믿었다. 어쩌면 신디아를 죽였으니 올리비아를 죽인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몰랐다.
“자네를 우리 기사수도회에 입회시키면 나도 대교구장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흠, 군침 도는 일이야. 어쨌거나 놈들이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어. 각지의 기사수도회들 중 일부는 여섯 날개의 악마가 직접 나서서 전쟁을 벌이고 세를 늘리려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중일세.”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군. 악마들은 언제나 악귀들을 이끌고 전쟁을 벌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을 즐겨했으니 말이오.”
엘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얼굴은 아니었다. 그 역시 성기사였고 기사수도회를 이끄는 자로서 악마들과의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이 세상에 대악마가 없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없는 것은 백 년 전의 영웅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난 이번 일을 로게나 대교구를 통해서 여명교단에 보고할 생각이네. 그러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여명교단이 토벌대를 꾸리겠지. 전에 없이 큰 규모의 토벌대일 걸세.”
엔디미온은 회의적이었다. 그는 로게나에서 토벌대를 꾸렸지만 라가르디오 하나 처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금 시대의 성기사들에게 라가르디오는 강력한 적이지만 그것도 이기지 못하면서 무슨 수로 여섯 날개의 악마를 토벌하겠는가.
“글쎄, 내가 들은 바로는 로게나의 토벌대가 라가르디오에게 졌다고 하던데 성기사들이 과연 여섯 날개의 악마를 이길 수 있겠소?”
“자네는 혹시 깡촌에서 왔나? 아니,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물론 로게나의 성기사들은 강하지. 무려 대교구가 있는 곳의 성기사들이니까. 우리 헬리드나 겔라오드의 성기사들에 비할 수 없이 강해. 하지만 그래봤자 지방 교구의 성기사들일 뿐이잖나.”
엘런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했다.
“여명교단 본청에는 쟁쟁한 실력의 성기사들과 수많은 특등기사들이 있다네. 그리고 성하를 모시는 여섯 기사들은 혼자서 다수의 악마들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고. 물론 여섯 기사들이 이번 토벌에 참가하지는 않겠지만 본청의 성기사들이 토벌대에 참가한다면 결코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니야.”
엔디미온은 여명교단 본청의 성기사들에 대해서 잘 몰랐으므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멜리사도 엔디미온의 정체를 알기 전에 여섯 기사들에 대해서 말했으니 그들이 제법 강하다는 것은 알았다. 사실 그들이 지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엔디미온 혼자서도 다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네도 그 토벌대에 참가해 보는 것이 어떤가? 실력 있는 자라면 악마사냥꾼이라도 토벌대에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추천서라면 걱정하지 말게. 내가 그림발드 경에게 부탁해서 해결해주겠네. 세상은 자네처럼 정의로운 자를 필요로 하고 있네. 부디 여명교단과 함께해주게.”
“내 이름 팔아서 자기 실적 올리려는 건 아니고?”
“부정은 안 하겠네. 나도 이제 슬슬 실적 올려서 본청으로 가야지.”
새끼, 솔직해서 호감이네. 엔디미온은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