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 * *
은사자 기사수도회가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았다. 사악한 기운에 오염된 시체들을 그냥 두면 땅이 오염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그들은 신전에서 미리 비축하고 있던 성수로 시체들을 정화하고 성유를 뿌려서 불을 붙였다. 몇 백 개나 되는 시체를 전부 태우려면 며칠이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시체들의 산을 쳐다보았다. 한때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아닌 것들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지금 타고 있는 것이 자신들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오싹함을 느꼈다. 악마숭배자 입장에서는 헬리드와 겔라오드 중 어느 곳을 선택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 아무래도 상관없는 선택 때문에 겔라오드는 오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밤이었는데도 낮처럼 환했다. 불 때문이었다.
“이야, 활활 타는군. 저 기세라면 며칠은 타겠어.”
엔디미온은 곁에서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엘런을 쳐다보았다. 성기사보다는 한량이 더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경박스럽고 말도 함부로 하는데 그게 오히려 매력이었다.
“내 제안에 대해서 생각은 해봤나?”
낮에 엘런이 했던 제안에 대해서 아직 답을 주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상황이 심각하니 엘런은 내일 아침이 되면 당장 로게나로 갈 것이니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대답을 해줘야 했다.
꾹 닫힌 입은 얼른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엘런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엔디미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토벌대가 꾸려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글쎄. 제법 걸리겠지. 일단 내일 내가 로게나로 가는 데 며칠이 걸릴 거고 로게나에서 여명교단 본청까지 마법으로 바로 연락을 보낸다고 해도 그쪽에서도 회의를 해야 하니까 또 며칠 걸리겠지. 그 다음에 토벌대에 참가할 성기사들을 선발하는데 또 며칠. 내가 볼 때 넉넉잡아서 한 달은 걸릴 것 같은데.”
“여명교단은 여기서 어느 방향이오?”
“음, 북서쪽일세. 그건 왜? 갈 마음이 생겼나?”
북서쪽이라. 본래 가려던 방향에서 조금 틀어지게 되겠지만 아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토벌대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신디아가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악마는 서른셋이나 되는 악마를 부하로 두고 있으니 세상에 끼치는 해악이 어마어마했다. 그런 존재를 죽이는 것이 바로 성배기사의 일이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성기사들과 함께 한다면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절약한 시간을 다른 악마들을 죽이는데 쓸 수 있을 것이고.
“참가하겠소.”
“아, 정말인가? 하하, 잘 생각했네. 사람들의 고통이 곧 우리들의 고통이니 정의로운 자라면 응당 전능자의 부름을 받아야지. 혹시 자네가 바란다면 성기사로서 일할 수 있게 도와주겠네.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바로 상등기사부터 시작할 걸세. 그리고 거기서 실적을 조금만 올리면 금방 특등기사로 올라갈 거고.”
백 년 전에는 모든 성기사들의 정점이었고 백 년 후에는 뭇 성기사들의 전설이 된 것이 바로 성배기사였다. 상등기사니 특등기사니 해봤자 엔디미온은 웃음이 날 뿐이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일없소. 그래서 난 이제 무엇을 하면 되겠소?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아니, 그럴 것 없네. 자네는 바로 여명교단 본청으로 가게. 헬리드에서 거기까지 가는데 스무일 정도 걸릴 것이니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시간이 딱 맞을 걸세.”
“미리 가라고? 하지만 난 길도 모르고 여명교단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엔디미온은 성기사가 아니었다. 엘런과 함께 가지 않으면 여명교단 본청에 가더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 뻔했다. 만약 엘런이 여명교단에 오는 것이 늦어져서 토벌대가 먼저 출발해버리면 엔디미온은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엘런은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갑옷 안으로 늘어트리고 있던 목걸이를 끌러서 엔디미온을 향해 가볍게 흔들었다.
“길이야 내가 가르쳐주고 지도를 줄 것이니 헤맬 일은 없을 걸세. 그리고 여명교단에 들어가는 것은 이걸로 해결하게.”
엘런이 은색으로 반짝이는 목걸이를 주었다. 처음에는 시체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게 이름과 출신 따위를 적어두는 목걸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어떤 문장의 모습을 한 목걸이였다. 물론 엔디미온은 그게 어떤 문장인지 몰랐고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냥 받아들었다.
“잃어버리지 말게. 그게 있어야 여명교단 본청에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네. 그리고 그걸 잃어버리면 나도 혼이 나니까 조심해주게.”
“누구한테?”
엘런은 대답 대신에 씩 웃기만 했다. 엔디미온은 목걸이를 대충 주머니 안으로 갈무리했다.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으니 잘 챙겨둘 생각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내일 로게나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해서. 목걸이는 기회가 되면 돌려주게.”
“기회가 없으면?”
“그럼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엘런이 떠나고 엔디미온도 잠깐 동안 시체 타는 것을 지켜보다가 성벽을 내려갔다. 그의 일행들은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헬리드 영주가 성 안의 방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럼 그 대신에 숙박비라도 내주겠다고 해서 그건 받아들였다.
길 위를 터벅터벅 걸어서 여관에 도착한 엔디미온은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밤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런 날에도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주정뱅이 몇 명뿐이었다. 그 외에는 베로니카가 있었다.
“라이오넬은?”
“주무세요.”
“너는 왜 안 자?”
“엔디미온 씨 기다려줄 사람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베로니카가 싱긋 웃었다.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를 잡아당겼다. 의자 끄는 소리를 들으면서 베로니카가 물었다.
“오늘 엄청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악마숭배자를 혼자서 죽였다면서요?”
“응. 자기가 라가르디오만큼 강하다고 하던 요정이었지.”
“오우, 정말이요? 악마숭배자가 그만큼 강하다고요?”
라가르디오는 베로니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비록 엔디미온에게 졌다고는 해도 그건 상대가 나빴기 때문이지 라가르디오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악마숭배자가 그 라가르디오만큼 강하다고 하니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요정들은 다 그래. 거짓말쟁이에 남들 뒤통수치는데 선수야.”
베로니카의 길쭉한 귀가 약간이지만 밑으로 내려갔다.
“······그건 차별적 발언이라니까요. 세상에는 착한 요정도 많아요.”
“누가 있는데?”
“일단 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군.”
“크음······.”
베로니카는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명백히 그녀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엔디미온은 여상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아직 살아있잖아.”
“그게 왜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베로니카를 보고서 웃었다. 그는 더 설명하지 않고서 손을 내저었다. 베로니카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방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불쑥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데요?”
“여명교단 본청.”
“여명교단 본청이요? 뒤르겔이요?”
그런 이름이었던가. 엔디미온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는 왜요? 설마 교황 성하의 멱살을 잡으러 갈 생각인가요? 내가 없는 백 년 동안 세상이 이게 뭐야! 이런 거 하러?”
“상상력이 대단한걸.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난 백 년 전의 사람이고 여기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것이야. 내가 끼어들어서 왈가불가할 이유는 없어.”
“그럼 왜요?”
“난 성배기사고 내 의무는 악마를 죽이는 것이다.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있다면 마땅히 없애러 가야지.”
“아, 그러시군요.”
베로니카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를 죽이는 것은 늘 하던 일이었다. 다만 그녀는 이번에 죽여야 할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말할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러는 사이에 베로니카가 방으로 가버렸다.
엔디미온도 잠을 잘까 하다가 다시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조용히 산책했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의 몸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충만한 힘은 몸 전체를 순환하면서 열을 발생시켰다. 성배기사의 몸은 더위도 모르고 추위도 몰랐다. 단단한 살갗은 창칼에 찢기지 않았으며 상처를 입더라도 남들보다 배는 빠르게 회복했다. 무시무시한 근력은 무엇이든 박살낼 수 있었다.
악마들을 죽이기에 가장 알맞은 몸이었다. 그리고 이 몸 때문에 그는 백 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라가르디오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호수의 여왕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개소리. 엔디미온은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알았다. 살아있다는 증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서 번잡한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잠깐만 산책하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는 새에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달빛이 어두웠으나 그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민감한 감각은 등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재빠르게 뒤로 돌면서 손을 내뻗었다. 천이 잡혔다가 쭉 찢어졌다. 짙은 녹색 망토를 두른 사람이었다. 얼굴은 망토에 달린 모자로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그의 정체를 몰랐으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딱 보기에도 수상쩍은 놈이었는데 정체는 때려눕힌 다음에 알아내도 늦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주먹을 날리자 망토를 두른 사람이 날렵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주먹을 날렸으나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아무리 엔디미온이 전력을 내지 않았다고 해도 한 대도 맞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미간을 좁히자 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 정말 날쌔군. 여전한 실력이야, 엔디미온.”
목소리는 남자였고 미성이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누구냐, 너.”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자신을 아는 사람 같았다. 악마인가? 그런 것치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냐고? 이거 섭섭한데. 나야, 나. 라우렌시오라고.”
남자가 모자를 벗자 길게 기른 금발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엔디미온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똑같았다. 희고 고운 살결, 코 주변에 박힌 주근깨, 녹색으로 빛나는 두 눈. 달라진 점은 길어진 머리카락뿐이었다.
“하하, 오랜만에서 봐서 놀란 모양이군? 하긴 나도 그래. 설마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악!”
엔디미온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있는 힘껏 라우렌시오의 얼굴에 주먹을 때렸다. 주먹에 맞은 라우렌시오가 비틀거리자 발을 걸어서 바닥으로 넘어트렸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서 허벅지로 허리를 꽉 조였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 라우렌시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변절자 주제에 겁도 없이 날 찾아왔군.”
“아, 아니, 잠깐만! 잠깐만, 엔디미온!”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엔디미온이 주먹을 날리려고 하자 라우렌시오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기다려! 제발 좀 기다리라고! 아니, 씨발! 난 억울해! 난 누명을 쓴 거라고!”
잘생긴 얼굴을 짓뭉개려던 주먹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