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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49화 (4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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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 누명을 써?”

어이가 없어서 내뱉은 말에 라우렌시오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억울하다고. 난 변절자가 아니야. 누명을 쓴 거라니까.”

“내가 아는 누명과 네가 아는 누명의 뜻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엔디미온은 잠깐 주먹을 거두었지만 그건 라우렌시오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어중간한 위치에서 주먹이 멈추었기 때문에 다시 주먹을 날리기 적당한 자세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는 라우렌시오가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망설이지 않고 얼굴을 날려버릴 준비가 돼있었다.

“글쎄, 내 생각에는 같은 것 같은데.”

“누명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억울하게 이름이 더럽혀졌을 때 쓰는 말이야.”

“이런 우연이 있나. 내가 말하는 누명도 그건데.”

라우렌시오는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면서도 능글맞게 웃었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주먹을 거두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내가 널 무슨 수로 믿지?”

“내가 정말 변절자라면 여기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성배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어? 바로 나야. 왜냐하면 난 너와 함께 싸웠으니까. 그런 내가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러 여기에 온다? 그건 말이 안 되지. 자살을 하려면 더 깔끔하고 덜 고통스러운 방법이 많은데 굳이 왜?”

맞는 말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엔디미온을 이길 수 없었다. 그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악마의 힘을 얻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몸에서 사악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그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먼저 바닥에서 일어난 후에 아직 쓰러져 있는 라우렌시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정기사는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엔디미온은 날렵하게 일어나는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라우렌시오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크게 떴다.

“왜 때려?”

“괘씸해서.”

“······.”

“따라와. 일단 이야기 좀 들어보고 죽일지 말지 생각할 거니까.”

엔디미온이 먼저 등을 돌려서 걸어가자 라우렌시오가 얼른 뒤를 따랐다. 그는 요정답게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백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길을 걸으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지껄였지만 엔디미온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래 전에는 시답잖은 말장난에 크게 웃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서옵쇼!”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여관 주인이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여관 안으로 들어온 엔디미온과 라우렌시오를 보았다.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없이 식탁으로 걸어갔고 라우렌시오는 그 뒤를 따르면서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를 꺼냈다.

“술 한 잔씩 주시고 안주도 간단한 걸로.”

여관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엔디미온은 잠깐 라우렌시오를 흘겨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침묵했다. 엔디미온은 식탁 위의 얼룩을 보고 있었고 라우렌시오는 부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관찰했다.

잠시 뒤에 맥주 두 잔과 구운 소시지가 나왔다. 엔디미온은 술잔을 들어서 한꺼번에 다 마신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두는 모습을 보면서 라우렌시오가 잠깐 움찔했다.

“여기서 기다려.”

“응? 아, 그래. 알겠어.”

라우렌시오는 홀짝홀짝 맥주를 마시며 방으로 들어간 엔디미온을 기다렸다. 요정의 귀는 청각이 뛰어나서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말소리가 났다. 뭐하는 거야? 잠시 뒤에 엔디미온이 노인의 뒷덜미를 잡고 나타났다.

“그 영감님은 누구야? 물론 너보다야 어리겠지만 그래도 어른을······.”

“라이오넬.”

“······응?”

“라이오넬이라고.”

자다가 끌려나온 라이오넬은 라우렌시오의 시선을 느끼고 그쪽을 보며 말했다.

“누구쇼?”

“······진짜 라이오넬 맞아? 상태가 좀 나쁜 것 같은데.”

“나이를 많이 먹어서 노망난 것뿐이야.”

엔디미온은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런데 너는 왜 멀쩡하지?”

“······무슨 말이 그래? 그럼 내가 라이오넬처럼 노망난 노인이 됐어야 한다는 거야?”

요정은 인간과 수명이 비슷하다. 라우렌시오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성배의 힘 때문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역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요정기사는 백 년 전의 잘생긴 청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의심하자 라우렌시오가 한숨을 내뱉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나이를 먹었다. 마법이었다.

“노망난 노인이라니! 말이 심하군! 너는 누구냐! 이름을 말해라!”

라이오넬이 벌컥 화를 내자 라우렌시오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

“진정해, 라이오넬. 나라고, 라우렌시오. 설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라우렌시오! 이 쳐죽일 변절자 놈! 천둥검을 받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오넬은 검으로 식탁을 내리쳤고 날카로운 검은 그것을 반으로 잘라버렸다. 여관 주인은 라이오넬이 식탁을 반으로 자르는 것을 보고 숨을 삼켰고 엔디미온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서 그에게 던져주었다. 소란은 그것으로 종식됐다.

“아니, 엔디미온. 이 친구 괜찮은 거 맞아? 제대로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칼 맞겠는걸.”

“라이오넬은 멀쩡해.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만 빼면. 그리고 안전수칙만 잘 지키면 아무 문제없어.”

무슨 위험물이야? 라우렌시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 소리를 내뱉었다.

“라우렌시오.”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는 술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이 심심해서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라우렌시오의 머리통을 술잔으로 후려갈기려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라우렌시오가 그걸 몰라봤을 리는 없었다. 그의 목숨은 지금 엔디미온에게 달려있었다. 목숨을 건지려면 신중하게 말해야 했다.

“······왜?”

“나는 너희들과 함께 대악마 다르디낭을 죽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의무를 다한 것은 나 하나뿐이었지. 너에게 화를 낼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실망한 것은 도리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사람들을 위해 싸우지 않았던 거냐. 왜 사람들이 여전히 사악한 것들에게 고통을 받도록 그냥 두었지?”

라우렌시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요정기사라 불리며 수많은 악마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돕던 영웅이었다. 엔디미온의 말은 그에게 비수처럼 날아왔다. 한참만에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목이 졸린 것처럼 짓눌려있었다.

“그건 내 잘못이야. 솔직하게 말하지. 처음 몇 년은 호수의 여왕이 날 찾아낼까 겁이 나서 아무도 오지 않을 만한 곳에 숨어있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곳이었어. 완전히 바깥세상과 단절된 곳이었지.”

“그래서?”

“그게 문제였던 거야. 난 호수의 여왕이 날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오랜 은거를 끝내고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악마와 악귀들을 이끌고 사람들을 공격했다고 하잖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 내가 대체 언제 그랬는데? 하지만 그때는 이미 진실에 대해 말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어. 난 타락한 영웅이라 불렸고 어쩌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요정기사의 망령이 나타났다며 날 두려워했지.”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렌시오는 술잔에 남아있는 술을 한꺼번에 비웠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숨지 말고 사람들을 도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아니, 애초에 널 두고 간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그 후로 난 내 정체를 숨기고 악마들을 죽이며 사람들을 돕고 다녔어. 여기에 온 것도 신디아를 찾아내 죽이기 위해서였고. 물론 이런다고 내 잘못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겠지.”

라우렌시오는 지난날의 과오를 후회한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내가 널 믿어야 할 이유가 뭐냐. 멜리아나가 너의 시체를 확인했다고 했다. 너는 마법에 능통하고 분신을 만들고 도망치는 일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지. 하나만 물어보자. 나는 악마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내가 없어진 뒤에도 사람들을 위해 검을 들었던 성기사를 믿어야 하는 거냐, 아니면 의무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이제 와서 구구절절한 변명을 내뱉는 변절자를 믿어야 하는 거냐.”

목소리는 싸늘했다. 라우렌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여관 주인은 영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슬금슬금 주방 쪽으로 가더니 곧 모습을 감추었다. 라이오넬은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른 숨소리를 내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라우렌시오, 자네가 정말 결백하다면 스스로 증명해야 할 걸세. 누가 자네를 사칭하여 그런 일을 벌였는지, 그걸 말해야 한다는 소리일세.”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들었다.

“라이오넬, 너는 날 믿나? 아니, 안 믿겠지. 네가 날 믿었다면 내가 누명을 썼을 때 침묵하고 있지 않았을 거야.”

녹색의 두 눈은 식탁 위의 촛불의 빛을 받아서 번들거렸다. 라우렌시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괴로운 듯 손가락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

“미안하지만 그때 나도 자네처럼 검술 수련을 위해서 은거하고 있었다네. 솔직히 말해서 자네의 대한 소식은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 한참 뒤에야 알았네.”

“그래, 하지만 그때······. 누구라도 날 위해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얼씨구, 궁상은. 엔디미온은 콧방귀를 뀌었다. 애초에 자업자득이었다. 누굴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날 왜 찾아온 거냐. 용서해달라고? 그래서 함께 누명을 벗는 걸 도와달라고?”

“아니, 그건 아니야. 누명을 벗는다고? 이미 너무 늦었어.”

“그럼 왜냐.”

라우렌시오의 녹색 눈에 불꽃이 튀었다. 깍지 낀 두 손가락 끝이 반대쪽 손등을 꾹 누르고 있었다.

“복수를 해야 하니까.”

“나보고 복수하는 걸 도와달라는 거냐?”

“그래. 나는 아직 강하지만 옛날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그 누구도 시간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엔디미온, 날 한 번만 도와줘. 그럼 나도 널 도와줄게. 마지막 의무를 수행 중인 거 알고 있어. 내가 함께 하면 한결 더 쉬울 거야.”

라우렌시오는 간절했다. 엔디미온은 수염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턱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널 모함한 자를 찾았나?”

“아니, 그건 찾는 중이야.”

“찾는 중이라고? 아직까지?”

라우렌시오는 자신도 답답한지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난 악마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면서 날 모함한 자를 찾으려고 애썼어. 하지만 쉽지 않더군. 대부분은 잔챙이들이고 진짜 거물 악마들은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어. 그래도 괜찮아. 이제 겨우 꼬리를 잡았으니 말이야. 이걸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날 모함한 자도 찾을 수 있겠지.”

“설마 그것 때문에 신디아를 쫓던 거냐?”

“아니, 그 요정은 이 일과 관련이 없어. 그건 그냥 시답잖은 짓거리를 하고 있기에 죽이려고 했던 것뿐이야. 엔디미온, 다르디낭의 적자들에 대해 알고 있지?”

엔디미온이 미간을 좁혔다. 대악마 다르디낭이 모든 악마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가 정말로 수많은 악마들을 모두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다르디낭이 직접 창조한 악마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악마들은 다르디낭의 적자들이라 불리는 악마들에 의해서 태어났다.

다르디낭의 적자들은 그 이름대로 대악마의 힘을 일부나마 부릴 수 있었고 백 년 전에 수많은 성기사들을 학살했다. 그들은 엔디미온과 영웅들이 있어야만 겨우 상대할 수 있는 강적들이었다. 라우렌시오는 그때의 그 강력한 악마들이 아직까지 몇 마리 살아있다고 말했다.

“다르디낭의 적자들 중 하나가 날 모함한 거야. 그 자식을 찾아서 죽여야 해.”

“하지만 라우렌시오, 난 지금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다. 당장 널 도와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 그건 괜찮아. 아직 나도 그 녀석을 찾고 있는 중이니까. 만약 내가 그 자식을 찾으면 그때 날 도와줘.”

“그럼 우리가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해야겠군.”

“그건 안 정해도 돼. 내가 널 찾아낼 수 있어.”

라우렌시오가 지친 얼굴로 웃었다.

“성배가 우리를 부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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