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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배는 이름과 다르게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함을 가진 어떠한 힘을 말하는 것이었고 지금 그것을 다루는 자가 바로 엔디미온이니 성배와 성배기사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성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체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의무로부터 도망쳤으나 결코 성배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엔디미온에게 성배의 힘을 나누어 받은 그 순간부터 영웅들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게 붙잡힌 것이다. 그들은 의무로부터 도망쳤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단순한 유보였다.
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성배기사가 세상에 나타난 지금, 길었던 유보는 끝이 나고 그들의 의무가 다시 한 번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뒤로 미룰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성배가 그들을 바라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가끔씩 했던 전우들에 대한 생각이 곧 성배의 부름이었고 라우렌시오는 그것을 따라서 여기에 왔다. 영웅들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다시 한 번 모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성배기사에게 죽거나, 성배기사를 죽이거나.
“그 악마 놈을 찾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라우렌시오.”
“한 달은 넘게 걸리겠지.”
“만약 그 악마를 찾게 되면 우리를 기다려라. 복수를 하겠답시고 혼자 달려들지 말고.”
라우렌시오가 주근깨가 난 콧잔등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날 걱정해주는 거야? 감동인걸.”
“우리는 약해졌지만 악마들은 더 강성해졌다. 네가 괜히 설치다 악마의 사술에 당하면 내가 널 죽여야겠지. 그런 성가신 일을 만들지 말란 소리다.”
“그래, 알겠어. 나도 잠깐만 참으면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그르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그런데 엔디미온, 옛날보다 많이 까칠해진 것 같네.”
가는 곳마다 승리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던 성배기사, 항상 웃는 얼굴로 남을 도우며 정의를 실현하던 성배기사, 옳고 그름을 구별하며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빛을 가져오던 성배기사.
백 년 전에는 그랬다. 지금은 아니었고. 엔디미온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백 년이면 열 번도 더 바뀔 시간이지. 네가 백 년 동안 호밀밭에서 호밀하고만 이야기하면 나처럼 변했을 거다. 아님 미쳐버리거나.”
“호밀? 호수의 여왕이 말한 백 년의 의무가 호밀밭에서 농사나 짓는 거였어? 그럼 미쳐도 이해할 수 있지.”
“······내 의무는 대악마의 시체를 지키고 생명과 성배의 힘으로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호밀은, 그래, 그건 내 실수였어. 호밀밭이 아니라 과수원을 했어야 했는데.”
라우렌시오가 웃었다. 의무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그들은 주방으로 들어간 주인을 찾아서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영웅들은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기에 모두 친했지만 그래도 친함의 정도가 각기 달랐다. 지금 여기 있는 세 사람은 특히 친한 사이였다. 본래 혼자서 성배탐색을 나섰던 엔디미온이 여행길에서 처음으로 영입한 영웅들이 바로 여기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으며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웅들의 술자리는 길게 이어졌다. 술을 나르고 안주를 만들던 여관 주인은 지쳐서 잠들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직접 주방으로 가서 술을 가져오거나 안주로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때때로 노래를 부르고 숟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거나 힘자랑을 하겠답시고 식탁을 부수기도 했다.
여관 손님들이 나와서 항의했으나 그 누구도 그들을 조용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백 년 전의 향수를 느꼈다. 그들은 웃고 떠들고 노래할 때마다 자신들의 처지를 강하게 상기했다. 그들은 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결코 살아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고 사람들은 그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살아있는 유령과 같았다.
살아있는 유령들의 술자리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밤잠을 설친 여관 손님들이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엉망진창이 된 식당이었다. 베로니카는 아침 댓바람부터 코를 찌르는 술냄새와 어째서인지 반으로 갈라져 있는 식탁, 노르스름한 토사물, 그리고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관 주인을 발견하고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술 좀 마셨을 뿐이야.”
엔디미온이 주머니에서 금화 대여섯 개를 꺼내서 여관 주인에게 던져주었다. 우울해 보이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변했다.
“아니, 그만큼이나 줘요?”
“돈이란 건 쓰라고 있는 거야.”
“한 글자가 빠졌네요. 잘 쓰라고 있는 거지요.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잘.”
엔디미온은 잔소리가 귀찮아서 손을 내저었다.
“물이나 한 잔 갖다 줘.”
“전 여기 급사가 아니거든요.”
베로니카는 툴툴대면서도 엔디미온에게 물을 갖다 주었다. 잔을 잠깐 잡고 있던 그는 물을 마시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던 라이오넬의 얼굴에 물을 부었다. 갑작스럽게 물을 맞았지만 라이오넬은 깜짝 놀라지 않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입을 쩝쩝거리면서 말했다.
“어, 물 달다. 목마른데 더 없나?”
“잠 깼으면 출발할 준비해.”
라이오넬이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방으로 갔다. 엔디미온은 이제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잠든 라우렌시오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대로 뒤로 잡아당겨서 얼굴을 들게 하자 고개가 뒤로 힘없이 넘어갔다. 엔디미온은 잔 안에 남아있던 몇 방울 안 되는 물을 라우렌시오가 마시게 했다.
베로니카가 물었다.
“어머, 그 요정은 누구인가요?”
“라우렌시오.”
“라우렌시오? 요정기사 라우렌시오? 진짜요? 그 사람은 멜리사가 죽었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리고 변절자라면서 왜 여기 있는 건데요?”
엔디미온은 어제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나중에 무시무시한 악마를 함께 죽이러 가야 한다는 점만 빼면. 과연 누가 영웅을 모함했을까?
“이야, 그런데 정말 놀랍네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영웅들이 하나둘씩 다시 나타나다니. 혹시 다른 영웅들도 살아있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베로니카가 입을 오므려 오 하고 소리를 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영웅들을 직접 보는 것은 제법 신기한 일이었다.
성수를 몇 방울 마신 라우렌시오는 몸을 꼼지락거리면서 일어났다.
“어······. 음, 깜빡 졸았네. 벌써 아침이야? 오우, 이게 무슨 일이야. 일어나자마자 아리따운 아가씨가 한 명 보이는군. 안녕하신가요, 아가씨? 당신의 얼굴에서는 마치 태양의 빛이 비추는 것 같군요.”
세상에, 요정기사 라우렌시오가 나한테 치근덕거리고 있어! 베로니카는 이 구닥다리 냄새 나는 말투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생긴 것은 청년이었어도 역시 백 년 전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라우렌시오는 미남이지만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으므로 살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제 얼굴에서 태양의 빛이 보이신다니 아직 술이 덜 깨신 모양이군요. 가서 냉수나 한 잔 마시고 정신 차리시는 게 어떠실까요, 라우렌시오 씨?”
라우렌시오는 엔디미온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차 한 잔 마시자는 말 대신에 냉수를 마시자고 하는 거야?”
“아니, 개소리하지 말고 꺼지란 소리야.”
“그럴 리가. 내 얼굴을 보고 안 반할 리가 없는데······.”
자신의 외모에 대한 과한 자신감은 요정들의 기본 소양인 듯 했다. 엔디미온은 여관 주인에게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출근한 여관 급사가 어지럽혀진 식당을 치우는 동안 여관 주인이 음식을 만들었다. 라이오넬이 짐을 정리하고 나오자 딱 맞게 식사가 나왔고 그들은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
그 다음에는 각자 짐을 들고 여관을 나왔다. 일단 그들의 목적지는 뒤르겔이었고 라우렌시오는 여기서 이만 헤어지겠다고 했다.
“그럼 엔디미온, 라이오넬, 나중에 다시 보자. 그리고 아가씨도요.”
라우렌시오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베로니카는 얼굴 전체를 찡그렸다. 요정기사는 소리 없이 왔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엔디미온 일행은 마구간에서 말을 찾아서 성문으로 이동했다. 성문에 가니 엘런과 성기사들이 말을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부지런한 친구로군.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하는 모양이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오.”
“나야 부지런해야지. 그래야 출세할 거 아닌가. 자, 이거 받게. 지도일세. 가는 길은 내가 설명해주도록 하지.”
엘런은 지도를 들고 뒤르겔까지 가는 길을 설명했다. 엔디미온은 설명을 모두 기억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뒤르겔까지 가는 길은 제법 험난할 걸세. 요즘 악마들이 좀 많이 설쳐서 말이야. 하지만 자네라면 잘 해결하겠지. 건강한 얼굴로 나중에 다시 보세나.”
“그래. 당신도 조심히 가시오.”
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성문을 나섰다. 성기사들은 로게나로 향했고 엔디미온 일행은 뒤르겔 방향으로 움직였다.
“참 부지런한 친구야.”
“급한 일이니까요.”
“우리도 부지런히 가야지. 흠, 옛날에는 마법으로 날아갔으면 됐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 베로니카를 쳐다보자 그녀가 발칵 화를 냈다.
“아니, 저는 백 년 전 마법사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 정도면 요즘 시대에서 수재거든요, 수재?”
“누가 뭐래?”
두 사람은 투닥거리면서 말을 몰았다. 라이오넬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이 똑똑해서 다행이었다. 주인이 잠들어도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서 따라가니 혼자서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낮의 여행길은 언제나 순조로웠다. 매번 그랬다. 악귀들이나 악마숭배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밤이었다. 베로니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밤이라고 해서 그들의 힘이 강해지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괜히 나타나서 저녁 식사나 망치고 잠이나 깨우고 하는 성가신 놈들.
“만약 악귀에게 출현 할당량이 있다고 하면요.”
잠시 이동을 멈추고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베로니카가 불쑥 말한 말에 엔디미온이 대꾸했다.
“그게 무슨 해괴한 할당량이냐.”
“만약이에요, 만약. 악귀들이 꼭 하루에 한 번씩 나타나야 한다, 그런 게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차라리 지금 나왔으면 기쁘겠네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잖아요?”
“무슨 헛소리야.”
엔디미온이 콧방귀를 뀌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바위 뒤에서 악귀 두 마리가 나타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모습에 베로니카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녀가 마법을 준비하며 말했다.
“이건 제가 처리할게요! 두 마리 정도는 가볍게······.”
마력이 손끝에 모이고 그것이 불타오르며 불꽃의 화살로 변하려는 순간 스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고 다시 악귀들 쪽을 보았을 때 갑자기 날카로운 것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소리가 났다.
아주 빠르게 날아간 두 개의 검은 각각 악귀의 머리를 하나씩 관통했다. 그리고 아직 날아가는 힘을 잃지 않은 검들은 그대로 악귀들을 뒤에 있는 나무까지 끌고 갔다. 악귀 두 마리는 머리에 검이 꽂힌 채로 나무에 대롱대롱 박혀 있었다.
베로니카는 허탈하게 손을 털어서 마력을 흐트러트렸다.
“······식전에 보기에는 좀 그런 장면이네요.”
엔디미온은 조용히 악귀들에게 걸어가서 두 자루의 검을 뽑았다. 신디아에게서 빼앗었던 검이었다. 그는 검에 묻은 오물들을 털어낸 후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마음에 드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정리하며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그리고 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알겠어?”
“넵,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