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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51화 (5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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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는 멋쩍게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라이오넬이 벌떡 일어나서 별안간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베로니카는 이 할아버지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하고 놀랐다.

“사악한 놈들의 냄새가 나는구나! 죽여야 할 적들은 어디냐!”

왜 이제 와서 난리야. 엔디미온은 라이오넬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벌써 다 죽었어.”

“그거 다행이군!”

라이오넬이 다시 얌전해졌다. 베로니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식사 준비를 했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지만 헬리드에서 요리책을 구하고 요리를 배울 여건이 안 되서 식사 수준은 그대로였다. 모닥불 위에 걸린 솥 안에서는 이것저것 들어간 잡탕이 끓고 있었다.

그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에 뒷정리를 했다. 뒤르겔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 상태였다. 토벌대가 꾸려지는 시간에 맞추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지도를 보면 이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 같은데······.”

출발하기 전에 엔디미온은 지도를 보면서 방향을 점검했다. 제대로 가고 있다면 오늘 저녁 정도에 마을이 나와야 했다. 그는 말 위에 올라타고 나서 지도를 돌돌 말아서 가방 안에 보관했다. 다른 사람들도 말에 올라탔고 다시 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베로니카는 이제 승마에 제법 재미를 붙였다. 본래부터 말을 탈 줄 알았지만 가까운 거리만 돌아다녔지 이런 식으로 장거리 이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엉덩이와 허리가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말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해서 정을 붙이기 더 쉬웠다.

아마 마법사들 중에서 그녀만큼 말을 잘 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들은 대개 연구실이나 탑에 틀어박혀서 연구로 시간을 보냈으니까. 베로니카는 슬쩍 엔디미온을 보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말을 타는 모습이 과연 기사다웠다. 이번에는 라이오넬을 보았다. 졸고 있는데 용케 말에서 안 떨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오늘은 벌써 악귀들이 한 번 나왔으니까 이제 더는 안 나오겠지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고개를 고정한 채로 말했다.

“조용히 해.”

“······까칠하시긴.”

굳이 더 나불대봤자 돌아오는 것은 면박일 게 뻔했으므로 베로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은 조용히 말을 몰았다. 베로니카가 했던 말 때문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길을 가다가 악귀들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엔디미온 역시 밤마다 악귀들을 상대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으므로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악귀들을 죽이는 것은 발밑을 지나가는 개미를 죽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만 아무리 쉬운 일도 수없이 반복하게 되면 귀찮은 일이 됐다.

엔디미온은 백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시절에는 도시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악마와 악귀들이 자주 출몰했다. 상인들은 수많은 성기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고 가끔씩 너무 강력한 악마가 나타나서 전부 다 죽는 일이 일어났다.

백 년 전에는 세상 곳곳이 전쟁터였다.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도시를 왕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인들은 악마사냥꾼이나 용병들 약간만을 대동하고서 각 도시를 돌아다녔다. 여행자들 역시 활발하게 세상을 돌아다녔다. 백 년 전이라면 다 죽었겠지만 이 시대에서는 아니었다.

가끔씩 악귀들에게 당하는 자들이 나오지만 그건 산에서 짐승들에게 습격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운이 나쁜 사람들에게 왕왕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엔디미온은 대악마를 죽인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악마들의 뿌리를 뽑지는 못했으나 사람들은 이제야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지 않은가.

‘영웅들만 제대로 일했으면 더 나은 세상이 됐겠지.’

엔디미온은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느꼈음에도 모르는 척 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라이오넬은 검술의 끝을 보겠다고 은거했다가 노망이 나버렸고, 라우렌시오는 괜히 숨었다가 누명만 썼고, 영웅들 중에서 제대로 된 놈들이 한 명도 없었다. 엔디미온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다른 영웅들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와서 자신을 어이없게 만들지 기대가 됐다.

설마 정말로 변절자가 된 놈이 나타나지는 않겠지. 엔디미온은 그런 일은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는 남은 영웅들의 숫자가 몇 명인지 손으로 꼽아보았다. 일단 바이올렛이 있고······. 그런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백 년 동안 떨어져 지냈더니 얼굴은 물론이고 이름까지 헷갈렸다. 다섯 명이었나, 여섯 명이었나. 한 번 들으면 다 기억날 것 같은데 라이오넬이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엔디미온 씨, 해가 지고 있어요.”

베로니카의 말대로 하늘이 점점 빨간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가을의 낮은 짧다. 노을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멍하니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해가 졌다. 그러기 전에 마을을 찾아야 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말의 배를 차며 재촉했고 말들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더 빠르게 달렸다.

“마을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라이오넬이 입을 열었다. 엔디미온은 지도를 뚫어지게 보면서 말했다.

“조금.”

“바람이 차군. 노숙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얼른 마을을 찾아야 할 걸세.”

“노력하는 중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엔디미온이 마을을 찾은 것은 늦은 밤이 된 후였다.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지도를 돌돌 말았다. 이미 밤이 늦었으니 마을에 가봐야 여관의 문도 닫혔을 것이다. 우연히 그들을 발견하고 방을 내줄 마음씩 착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 결국에는 노숙을 해야 했다. 마을 안에서 노숙이라니. 참 우스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 무슨 축제라도 하나 본데요?”

늦은 밤인 만큼 마을의 불이 다 꺼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을 곳곳은 불꽃 때문에 환했고 사람들은 모두 집 바깥으로 나와있었다. 손에 횃불을 든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저들끼리 뭉쳐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엔디미온은 마을 입구까지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의 두 눈은 멀리 있는 것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손에 횃불만 들고 있었고 무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대화가 틀어져도 저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설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 것이고······.”

말을 탄 엔디미온 일행과 마을 사람들이 마주했다. 그들은 엔디미온 일행을 보고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왜? 대체 무엇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밤늦게 횃불을 들고 이곳에 모여 있게 만들었는가?

본래 활달한 성격의 베로니카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녀도 가만히 있었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 사이로 나이 많은 남자 하나가 나왔다. 딱 보기에도 그가 이 마을의 촌장이었다.

엔디미온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대뜸 촌장이 물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뒤르겔로 가는 선량한······.”

“당장 이 마을에서 떠나게! 자네들을 위해서 하는 말일세!”

“······여행자들이오.”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도 안 들을 거면서 왜 물어본 거야.

“우리는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오. 그저 하룻밤 머물 곳만 제공해준다면······.”

“당장 떠나게! 지금 당장!”

“······감사.”

씹, 나도 말 좀 하자. 엔디미온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촌장보다 키가 훨씬 더 컸다. 때문에 촌장은 엔디미온을 올려다봐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일견 위협적일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가진 엔디미온을 보며 주춤거렸다.

“짧게 말하겠소. 우리는 그저 뒤르겔로 가는 선량한 여행자들이며 당신들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고 그저 하룻밤을 보낼 곳만 있으면 충분하오. 또한 당신들의 호의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의향이 있소. 그래도 떠나야 한다면 떠나겠소.”

말에서 내려서 덩치로 위협한 것이 좀 효과가 있었는지 이번에는 촌장이 말을 잘라먹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촌장은 흰색 수염을 잘게 떨면서 외쳤다.

“떠나게!”

“······”

마을 촌장이 이리 완강하게 떠나라고 말하니 이 마을에서 머무는 건 힘들 듯 했다.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뱉으며 마을을 지나쳐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촌장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떠나라고 한다면 떠나겠소. 다만 이유나 좀 압시다. 우리도 힘들게 이 마을까지 왔는데 다짜고짜 떠나라고 하면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오.”

“이건 자네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네. 조금 있으면 악마가 올 거야. 그는 매달 우리에게 제물을 요구하고 있지. 그 악마가 만약 외부인인 자네들을 본다면 죽이려고 들 걸세. 그러니 얼른 떠나게! 얼른!”

하지만 엔디미온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촌장은 한숨을 내뱉었고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크게 외쳤다.

“촌장님!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악마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고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 촌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오는 악마를 쳐다보았다. 엔디미온도 악마를 보았다.

악마는 하늘에서 날갯짓을 하면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는 박쥐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몸 전체가 털로 수북했다. 머리는 개였다. 악마는 빨간색으로 빛나는 두 눈으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뭐야, 이번 제물은 남자냐? 내가 여자만 제물로 바치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어!”

악마가 성을 내자 마을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촌장은 덜덜 떨면서도 악마에게 걸어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엔디미온이 말했다.

“저게 그 악마 놈이요?”

“악마 놈이요? 악마 놈? 저게 미쳤나? 촌장, 내가 우스워? 남자가 제물인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상태도 별로잖아!”

짜증을 내던 악마는 말에 타고 있던 베로니카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뭐야, 요정이잖아. 아, 마음에 드는군. 요정이 맛있지. 살이 야들야들해서 맛있거든. 이번 제물은 저걸로 하겠다.”

악마는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베로니카를 향해 날아가려는데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눈을 움직여서 아래를 보았다. 엔디미온이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너 뭐야? 감히 내 몸에 손······.”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악마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한 번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그의 몸을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쳤다가 다시 들어올리기를 반복했다. 악마의 몸은 튼튼했지만 강렬한 충격으로부터 여러 번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이가 다 부러진 악마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술을 부려서 엔디미온의 손으로부터 탈출했다.

그 다음은 주문을 외워서 엔디미온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알량한 사술은 성배기사의 손짓 한 번으로 무력화됐고 악마는 다시 한 번 엔디미온에게 붙잡혔다. 단단한 주먹이 코와 광대뼈를 박살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얼굴을 완전히 관통했다. 엔디미온은 악마의 얼굴로 들어가서 뒤통수로 튀어나온 자신의 주먹을 몇 번 꼼지락대다가 다시 뽑았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엔디미온은 머쓱했다. 악마가 생각보다 너무 약했다. 그는 초록색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흔들어서 털며 촌장에게 말했다.

“혹시 임산부가 있었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겠소. 뱃속의 아이에게도. 그래서 다시 묻겠는데, 혹시 하룻밤 머물다 가도 되겠소?”

악마를 주먹 하나로 때려죽이는 모습을 똑똑히 본 촌장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 물론입니다. 마음껏 쉬다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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