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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52화 (5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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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을 대하는 촌장의 태도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귀한 손님을 모시듯 깍듯이 대했고 여관에서 가장 비싼 방을 내주었다. 마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엔디미온 일행은 안락하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촌장은 그들을 여관으로 안내해주면서 엔디미온에게 말을 걸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반짝거리는 두 눈을 보니 악마가 죽은 것이 정말 감격스러운 일인 듯 했다.

“이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우리 마을을 괴롭히던 악마 놈을 단번에 해치우시다니요. 혹시 성기사이십니까?”

“아니오.”

“그럼 악마사냥꾼이신지?”

“그것도 아니오.”

세상에 악마를 죽이는 사람은 두 종류였다. 성기사거나 악마사냥꾼이거나. 엔디미온이 둘 다 아니라고 했으니 촌장은 당연히 어리둥절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말했다.

“그냥 선량한 여행자요.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하기는 하지.”

“혹시 존함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엔디미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엔디미온이오.”

촌장이 엔디미온이 입고 있는 서코트를 보았다. 지난번 전투 때문에 상태가 좀 나빠졌지만 그래도 헬리드의 문장은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헬리드의 엔디미온입니까? 겔라오드의 이븐을 죽이고 악마숭배자 신디아를 죽였다는?”

이븐을 죽인 것은 그저께고 신디아를 죽인 것은 어제의 일이다. 이 마을이 헬리드에서 고작 하루 정도 거리에 있다고 해도 소문이 참 빨랐다. 엔디미온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이 알려졌을 줄은 몰랐다. 긍정하기도 애매하고 부정하기도 그래서 조용히 있는데 촌장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으시군요! 어쩐지 무용이 남다르다 했습니다. 엔디미온님,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한시름 덜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엔디미온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촌장이 내일 아침 식사를 준비해두겠다고 말했다. 식사를 대접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취침하는 것은 늦었지만 기상하는 것은 빨랐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났고 촌장의 지시로 준비된 아침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촌장은 점심도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바로 마을을 떠났다. 그들은 갈 길이 멀었다. 말을 타고 달리고 또 달렸다.

헬리드에서 출발한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기동성을 위해서 식량을 조금만 준비했더니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엔디미온이라도 식사는 해야 했다. 그건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도시가 있었다. 이름은 자엘라. 엔디미온도 백 년 전에 와봤던 도시였다.

마을 근처에 큰 강이 흘러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대신에 성벽이 단단했다. 자엘라에서 악마 열 마리를 죽이고 그 머리를 성벽 위에 내걸었던 일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용맹했고 두려움을 몰랐다. 자엘라 출신 중에는 성기사들이 많았다.

“······백 년 전에는 그랬는데.”

엔디미온은 두 번 놀랐다. 조그만 도시였던 자엘라가 거대하게 변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두 번째로 도시 안이 주정뱅이들과 질 나쁜 건달들로 가득 찬 것에 두 번 놀랐다. 물론 백 년의 시간은 길었다. 할리아가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성장했던 것처럼 자엘라 역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많은 성기사들의 고향이었던 자엘라가 술꾼들과 도박꾼, 왈짜들의 성역으로 변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내가 나이를 너무 먹은 거냐, 아니면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거냐?”

“둘 다라고 해둘게요. 그런데 저도 자엘라에 대한 소문만 들었는데 직접 와보니까 더 놀랍네요! 여기서는 물보다 술이 더 싸다던데 그 말이 진짜인가 봐요. 다들 술만 마시고 있네.”

엔디미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시 안은 혼잡했다. 말을 마구간에 맡겨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길이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도시 곳곳에는 술냄새로 가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었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혼자 바닥에 쓰러져서 잠에 빠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좀도둑도 많았고.

방금도 겁도 없이 엔디미온의 주머니를 털려고 했던 소매치기가 있었다. 물론 그는 주먹에 맞고 날아가서 주정뱅이 곁에서 곤히 잠들었다. 길거리에서 사람을 때렸는데 제지하러 오는 병사가 없었다. 하지만 치안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기름으로 광을 낸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었고 그들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걸음걸이만 봐도 훈련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살인이 벌어지지 않는 한은 길거리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이 도시의 분위기란 것을 엔디미온은 빠르게 알아챘다.

“자엘라는 사치와 향락을 바탕으로 발달했대요. 온갖 여흥거리들이 많아서 각지의 부자들이 자주 놀러온다고 하네요.”

돈 많은 자들이 자주 오는 곳이라면 치안에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진짜 돈줄이니까. 병사들의 훈련 상태가 상당한 것이 이해가 됐다.

엔디미온은 어제 하룻밤을 보냈던 마을은 악마 하나 때문에 덜덜 떨고 있었는데 이곳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영 이상했다. 같은 세상인데 그들의 상황은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할 일도 없는 놈들이 천지로군. 한심한 놈들. 이곳은 본래 가장 많은 성기사들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곳이었다. 이런 잡것들이 술 처먹고 자빠져 자는 곳이 아니라.”

“아, 그래요?”

“식량만 사서 바로 나가지. 이런 곳에서 더 머물 생각은 없다.”

엔디미온은 자신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주정뱅이를 밀쳐내고 걸어갔다. 베로니카도 얼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요, 엔디미온 씨!”

“왜?”

베로니카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라이오넬 씨가 없어요!”

엔디미온은 제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서 베로니카에게 물었다.

“누가 없다고?”

“라이오넬 씨요! 길이 혼잡해서 떨어졌나 봐요! 빨리 찾아야 해요! 혹시라도 길거리에서 칼부림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가능성 있는 일이야.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베로니카와 함께 라이오넬을 찾기 시작했다. 백발을 길게 기르고 눈에 천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니 찾기 쉬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디를 돌아봐도 라이오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만 결국 라이오넬을 찾지 못했다.

베로니카가 발을 동동 구르자 엔디미온이 말했다.

“만약 라이오넬이 칼부림이라도 하고 있으면 우린 모르는 일이야. 알겠어? 일행이 아닌 거라고.”

“하지만 도시 들어갈 때 병사들이 우리 얼굴을 봤는 걸요?”

“······빨리 찾아야겠군.”

두 사람은 저녁이 될 때까지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디서도 라이오넬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면 병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베로니카가 고민하고 있는데 하늘이 점차 어두워졌다.

밤이 찾아오고 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많아졌다. 진짜 유흥은 밤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더 많은 주정뱅이와 더 많은 도박꾼, 더 많은 왈짜들이 나타났다. 엔디미온은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라이오넬이 보일까 해서였다. 물론 헛일이었다.

“아, 도박에서 돈을 많이 잃은 모양이지? 얼굴만 봐도 알겠어! 꿍한 얼굴 말이야!”

광택이 나는 비단옷을 입고 실크해트를 쓴 남자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경박한 목소리로 엔디미온에게 말을 걸었다. 척 보기에도 유흥에 끌어들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놈이었다. 하려고 한다면 주먹을 날려서 쫓아낼 수도 있지만 엔디미온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남자는 말이 많았다. 수다스럽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가 엔디미온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혹시 투기장에는 관심 없나? 내가 자네에게만 특별히 정보를 주지. 누구에게 돈을 걸면 딸 수 있을지 가르쳐주겠다는 소리야. 이건 흔치 않은 기회야. 도박으로 잃었던 돈을 복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엔디미온은 종이를 받아들였다. 거기에는 투기장의 이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호랑이가 두 발로 서서 무기를 든 그림도 작게 그러져 있었다. 그라마브니아 투기장. 최고의 여흥을 선사합니다.

“누구한테 걸면 따는데.”

베로니카가 깜짝 놀라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엔디미온에게 가까이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사였다.

“오늘 새로 들어온 신입이 있어. 그 자에게 걸면 돼. 실력이 아주 기가 막힌데 신입이라서 배율이 상당해. 사람들이 실력을 잘 모르거든. 날 믿어. 진짜 이건 무조건 따는 거야. 정말이라고!”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투기장으로 가려고 하자 베로니카가 얼른 그에게 속사였다.

“미쳤어요? 지금 도박하러 가려고요?”

“그 망할 놈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 때문에 더 복잡해질 거고. 차라리 내일 찾는 게 더 나아.”

“그러다가 영감님이 사람이라도 죽이면요?”

“왜 꼭 사람을 죽일 거라고 생각해? 그냥 벽에 똥칠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그것대로 좀.”

엔디미온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베로니카는 열심히 그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아니, 일단 그건 제쳐두고. 도박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도박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이 도시 분위기가 싫은 거야. 그리고 한 번 정도야 뭐.”

“사람들은 대개 한 번만 하려다가 도박에 빠지더라고요.”

“난 안 그래. 왜냐하면 성배기사잖아. 영웅이 도박중독자가 되는 거 봤어?”

엔디미온은 기어코 투기장에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뱉으며 따라갔다. 투기장 안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공기가 답답했다.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서 베로니카는 불쾌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자신이 돈을 건 선수들을 응원했고 때때로 취기가 올라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난동을 부렸다.

한심한 사람들. 베로니카는 쯧쯧 혀를 찼다. 엔디미온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경기장을 쳐다보았다. 방금 막 시합이 끝났는지 바닥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가 가만히 경기장을 쳐다보고 있으니 목에 목판을 걸고 있는 남자가 다가왔다. 목판 안에는 먹을 것과 돈이 들어있었다.

“형씨, 돈 걸었슈? 안 걸었으면 빨리 걸어.”

엔디미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목판 안에 던지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이 있다던데.”

“거기 거시려고?”

“거기 걸라던데.”

“누가? 나라면 안 걸겠슈.”

“왜?”

“내가 슬쩍 봤는데 장님에 노인네던데?”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생김새인데. 엔디미온이 뭐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남자는 종이쪼가리를 건네주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경기장 쪽을 보고 있으니 사회자가 걸어나와서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구경꾼들이 환호했고 사회자는 그에 질세라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엔디미온은 별로 흥미가 없어서 그냥 손가락의 거스러미나 떼고 있었다. 사회자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한 마디가 있었다.

“······이어서 새로운 전사를 소개해드립니다! 늙었지만 강하다! 노인의 노련함을 보여주겠다! 그라마브니아 투기장에 새롭게 등장한 전사! 천둥검의 라이오넬!”

뭐 씨발? 엔디미온은 사람들을 다 밀쳐내고 경기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철창을 손으로 잡고서 경기장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저 새끼가 왜 저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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