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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53화 (53/199)

53

개를 잃어버렸는데 투견장에서 다시 만난 꼴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라이오넬은 이곳저곳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금세 침착해졌다. 이건 오히려 기회야.

엔디미온은 얼른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서 처음에 돈을 걸었던 남자를 찾아다녔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구석에서 잠시 쉬면서 동전을 세고 있었으니까.

“혹시 돈 더 걸 수 있소?”

“응? 돈 더 거시게? 하지만 경기 시작했잖아.”

엔디미온은 슬쩍 경기장 쪽을 보았다. 아직 선수 소개 중이었다. 선수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니 엄밀히 말해서 경기가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선수 소개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니라 선수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러 온 것이니까.

“아직 선수 소개 중이잖소. 돈 좀 더 겁시다.”

“음······.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저 영감에게 돈을 걸었잖아? 양쪽 전부에 돈을 거는 건 안 돼.”

“걱정하지 마시오. 아까 걸었던 데다가 다시 걸 거니까.”

“그려? 얼마 걸 건데?”

쿵 소리가 나면서 바닥에 주머니가 떨어졌다. 소리만 들어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놀란 눈으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자 웃으며 말했다.

“금화 백 개.”

“이, 이걸 다 걸겠다고? 저 영감한테?”

“다 걸겠소. 이기면 몇 배요?”

“열 배인데······.”

금화 백 개를 걸었으니 따면 금화 천 개였다. 어디 작은 영지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남자가 엔디미온을 보며 말했다.

“어디에 걸든 그건 자기 마음이니까 별 말은 안 하겠는데······. 진심이슈? 저 영감한테 금화 백 개나 건다고? 장님인데?”

“지금부터 투기장 주인한테 가서 돈을 준비해두라고 해야 할 거요. 금화 천 개면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남자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바깥의 호객꾼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몰라도 호구 하나를 잘 물어왔다고 생각했다. 엔디미온이 옷 입은 것을 보니 어디의 돈 많은 기사인 것 같은데 그가 금화 천 개를 받아갈 일은 절대로 없었다.

노인에 장님인 자가 승리해? 그럴 일은 없었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금화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투기장 주인이 기뻐하겠군. 그가 누구에게 얼마를 걸었는지 적혀 있는 종이를 엔디미온에게 주었다.

때맞추어 경기장에서 사회자가 소리쳤다.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남자는 돈 세던 것을 멈추고 경기장 쪽을 보았다. 이번에 나온 것은 검투사 알리우스였다. 그는 투망과 창을 쓰는 검투사였는데 힘이 세고 몸이 튼튼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남자는 알리우스가 무난히 이기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뭐야? 영감님, 죽을 자리를 찾아오셨어? 너무 오래 살아서 살기 싫어지셨나?”

구경꾼들이 웃었다. 라이오넬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내가 누구냐고? 날 몰라? 와하하하! 날 모르는군! 충격이군! 이 나를 모른다니!”

알리우스는 마치 양손을 크게 벌리고서 구경꾼들을 향해서 빙글 돌았다. 그리고 호응을 유도하듯 외쳤다.

“내가 누구냐? 다들 말해 봐! 내가 누구냐!”

“알리우스다!”

“승리의 알리우스!”

“알리우스! 알리우스! 알리우스!”

알리우스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는 더 크게 외쳤다.

“그래, 내가 바로 알리우스다! 열 번 싸워서 열 번 이긴 알리우스! 언제나 승리하는 알리우스! 그라마브니아 투기장에서 가장 강한 검투사! 내가 바로 알리우스다! 이제 알겠나? 어? 이제 알겠어? 어!”

알리우스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마치 북을 치는 것처럼 쿵쿵 소리가 났다. 그는 타고난 전사였으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면 자신의 인기가 더 올라간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더 호응하라는 듯이 양손을 들어 올리고 경기장을 빙빙 돌았다. 사람들은 연신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투기장 안은 금세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지금 이곳에서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엔디미온과 베로니카.

“엔디미온 씨, 진짜 돈 걸고 왔어요?”

“그래.”

“얼마나요?”

“금화 백 개. 이건 기회야. 그 호객꾼 말이 맞았어. 이건 무조건 따는 거야.”

호객꾼은 아마 라이오넬의 정체를 몰랐을 것이다. 그저 바람만 좀 잡아서 호구들의 돈을 뜯을 생각이었겠지. 베로니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봐, 영감님! 왜 말이 없어? 내가 누구냐고 물었잖아. 겁이라도 먹었나? 그래서 목소리가 안 나오시나? 하! 그런다고 안 봐주니까 한 번 덤벼 보라고!”

“알리우스라고······.”

라이오넬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것 같은 다리, 그리고 하단에서 상단으로 빠르게 올려치는 자세. 엔디미온과 베로니카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몇 초나 걸릴까요? 저는 10초 정도 봅니다.”

“난 5초.”

라이오넬이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그 순간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고 그것보다 더 커다란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찢을 듯 집어삼켰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흠, 6초군.”

투기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경기장 안에 있던 사회자는 눈만 껌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경꾼들 역시 멍하니 경기장 안에 쓰러져 있는 알리우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6초. 달려가서 검 한 번 휘두르기도 빠듯한 시간에 승부가 나버린 것이다. 그라마브니아 투기장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화 주머니를 들고 있던 남자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얼른 투기장의 주인을 찾아 달렸다. 이건 비상사태였다.

* * *

마르딜레아 콘타니디오는 젊고 유능한 사업가였다.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 곧장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그는 커다란 상단을 소유한 콘타니디오 가문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크게 불렸다. 물론 사업적 수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심 많고 유능했다. 만약 콘타니디오 가문 태생이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성공했을 것이다. 시간이야 더 많이 걸렸겠지만.

하지만 그런 것은 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빛나는 업적들이 자랑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좆됐다.

‘금화 천 개? 금화 천 개? 씨발, 지금 장난해? 금화 천 개를 줘야 한다고?’

지금 그의 집무실에는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와 있었다. 한 명은 덩치 큰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여자 요정이었다. 각각 엔디미온과 베로니카라고 했다. 그들은 금화 천 개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르딜레아는 식은땀이 흘렀다. 금화 천 개. 딱 잘라 말해서 그만한 돈은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상단, 여러 도박장, 그리고 투기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아주 많았지만 그만큼 돈 나갈 곳도 많았다. 그의 사업은 여전히 성장하는 중이었고 그 때문에 자금 사정은 빡빡했다. 당장 금화 천 개를 현금으로 줄 수는 없었다.

‘가문에 돈을 빌려야 하나?’

콘타니디오 가문은 금융업 쪽에도 손을 뻗고 있었다. 마르딜레아가 바란다면 싼 이율에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빚이었다. 안 그래도 나가야 할 돈이 많은 상태에서 금화 천 개를 빌린다면 매달 내야 하는 이자만으로도 사업이 흔들릴 것이 뻔했다.

‘씨발, 일이 이런 식으로 꼬일 줄 알았나. 아무나 잡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 검투사가 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누가 위험하게 자신의 목숨을 걸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투기장에서는 빚쟁이나 부랑자들을 잡아다 훈련시켜서 검투사로 만들었다. 라이오넬을 데려온 것도 그래서였다. 장님인데도 길거리 건달들과 잘 싸우기에 훈련을 안 시켜도 될 것 같은데 정신은 또 온전치 못한 것이 말로 살살 꾀면 쉽게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르딜레아는 자신을 저주했다. 언제나 물건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아니었다. 설마 장님 노인이 알리우스를 6초만에 쓰러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거기다 금화 백 개를 거는 미친 자식이 있을 줄은 또 무슨 수로 알고.

“그래서 내 금화는 언제 주는 것이오?”

엔디미온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금화를 독촉했다. 마르딜레아는 다 식은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너무 탔다. 그는 탁자 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거기에는 작은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흔들면 소리를 들은 부하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쳐서 엔디미온을 붙잡을 것이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헬리드의 기사인 것 같지만 그깟 촌구석의 기사 따위 알 게 뭐야. 죽여도 거기서 찾아오기나 하겠어? 마르딜레아는 결심을 굳히고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뒤면 부하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엔디미온을 끌고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지.

“······뭐야?”

마르딜레아는 당황하면서 다시 한 번 종을 흔들었다. 이번에도 부하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식은땀이 이제 비처럼 흘렀다.

“부하들이라면 안 올 거요. 내가 오는 길에 잘 타일러서 집에 보냈거든.”

“뭐, 뭐라고?”

엔디미온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 생각이야 뻔하지. 금화 천 개를 곱게 줄 생각이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소. 그런데 나는 받아야 할 돈은 꼭 받아내는 성격이거든. 이 요정 친구도 내게 금화 백 개를 빚졌는데 그것 때문에 내 밑에서 일하고 있지. 당신이······.”

“······마르딜레아.”

“그래, 마르딜레아. 당신이 금화 천 개를 당장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소. 왜냐하면 내가 당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금화를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럼 말해보시오. 어떤 식으로 내게 금화 천 개를 마련해줄 것인지.”

엔디미온은 마르딜레아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었다. 결코 만만히 볼 자가 아니었다. 마르딜레아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무리 종을 울려도 부하들이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다 당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살 궁리를 해야 했다.

“······그 말이 맞아. 난 당신한테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 상단의 수익이 들어오는 건 일주일 뒤인데 그 돈은 사업 자금이야. 당신한테 금화 천 개를 한 번에 줘버리면 난 사업장 몇 개를 접어야 해.”

“다음에는 부디 내 금화를 지불할 방법에 대해서 말하길 빌겠소.”

엔디미온이 웃으며 주먹을 흔들었다. 마르딜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책상 위의 종이 한 장에 머물렀다. 마구잡이로 낙서가 된 종이 구석에서 투기장이란 글자가 보였다. 투기장. 그래, 투기장.

“······방법이라면 있어. 좀 도박이지만 말이야.”

“설마 도박으로 돈을 따서 금화를 마련하려고?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진심은 아닐 거라고 믿겠소.”

“도박은 도박인데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도박이 아니야.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하는 도박이니까.”

여기서부터는 말을 잘 해야 했다. 엔디미온의 주먹은 두꺼웠고 그것은 마르딜레아의 머리를 한 번에 박살낼 수 있었다.

“지하투기장이라고 알고 있나? 거긴 일반적인 투기장과 달라. 자엘라는 투기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걸 금지하고 있지만 거긴 아니야. 그곳은 사람을 죽여야만 경기가 끝나.”

“그래서?”

“거긴 아무나 입장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지. 돈 많고 시간 많은 부자들 말이야. 이건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거기에 입장할 자격이 있어.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이거야. 거기에 라이오넬을 내보내자. 거기는 돈이 걸리는 액수부터가 달라. 만약 라이오넬이 우승한다? 그럼 금화 천 개가 뭐야? 만 개, 이만 개도 얻을 수 있다고.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조금만 시간을 줘. 라이오넬이 경기하는 거 봤지? 내가 봤을 때 그 정도 실력이면 무조건 우승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마르딜레아는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았다. 설마 거절할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마르딜레아가 돈을 지불할 수 없음을 알았고 돈을 마련해 올 기회를 주었다. 기다려달라고 부탁한다면 분명 들어줄 것이다. 엔디미온이 마르딜레아의 머리를 부수는 건 기다림이 끝나도 돈을 구하지 못했을 때였다.

“나쁘지 않군. 그래서 그 경기는 언제 열리는 거요?”

“오늘 밤이야. 이럴 시간이 없어. 당장 가서 선수 등록을 해야 하거든.”

“그럼 빨리 가서 하시오.”

“그런데 약간이라고 할까, 조금이라고 할까, 사소한 문제가 하나······.”

“말꼬리 질질 끌지 말고 말하시오.”

마르딜레아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말했다.

“거기 들어가려면 경호원이 있어야 해. 거기가 좀 험한 곳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거기서 나랑 좀 껄끄러운 상대들도 많이 만나게 될 건데 나 혼자 들어가면 분명 맞아죽을 거야. 일단 내가 살아있어야 돈을 받아올 거 아냐?”

엔디미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커다란 덩치를 본 마르딜레아가 오우 소리를 냈다.

“같이 갈 생각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아, 그래? 이거 정말 다행이군. 덕분에 살았어. 덩치를 보니 내가 맞아죽을 일은 없겠군. 하하,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거야. 알겠지, 친구?”

마르딜레아가 괜히 친한 척을 하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엔디미온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 내려.”

“······네.”

마르딜레아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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