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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많으면 헛짓거리를 즐기는 법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화 하나는 아주 큰 금액이지만 부자들에게는 아니었다. 잃어버리면 기분 나쁘지만 딱히 기를 쓰고 찾아야 할 만한 돈은 아니었다.
금화 하나에 대한 감각이 다른 만큼 유흥을 즐기는 방법도 달랐다. 가난한 자들은 기껏해야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노는 것뿐이지만 부자들은 사방에 돈을 뿌리며 생각지도 못한 유흥을 즐겼다. 처음에는 연회를 열고 춤을 추며 놀다가 나중에는 더 짜릿한 경험을 위해서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그들은 돈을 쓸 곳을 찾아다녔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바로 자엘라였다. 정확히 말해서 지하투기장이었다.
“여기가 지하투기장이냐.”
엔디미온은 이제 마르딜레아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 갑과 을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마르딜레아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맞아, 놀랐지? 설마 영주궁 아래에 지하투기장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야.”
지하투기장은 엄밀히 말해서 불법이었다. 자엘라의 법은 투기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당연히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영주궁 아래에 있을 줄은 몰랐다. 영주궁 아래에 투기장이 있다는 사실을 자엘라의 영주가 몰랐을 리는 없다.
지하투기장은 불법이지만 사실상 자엘라 영주의 수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엔디미온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용감한 성기사들의 고향이었던 자엘라가 이런 꼴이라니.”
마르딜레아는 이곳에 자주 와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술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투명한 유리잔을 엔디미온과 베로니카에게 주었다. 그리고 마침 지나가는 하인에게서 새 술잔을 받았다. 술을 홀짝거리면서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다들 놀란 모양이군. 하긴 지하투기장을 처음 와본 사람들은 다 그래. 투기장이라고 하면 좀 야만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여기는 아니야. 온갖 돈 많은 사람들이 오는데 당연히 고급스럽게 만들어야지. 천장에 달린 저 등불 보여? 저건 진짜 불이 아니라 마법이야. 저런 등불 하나에 얼마인지 알아? 알면 깜짝 놀랄 걸.”
베로니카가 감탄했다. 마법사인 그녀는 천장의 등불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궁금했다. 마르딜레아는 그녀의 반응에 으쓱하면서 말했다.
“경기는 자정에 시작될 거야. 잠깐 쉬다가 선수 대기실로 가자. 그리고 술이나 먹을 것들은 마음대로 먹어도 괜찮아. 다 공짜니까.”
“와, 진짜요? 이게 전부 공짜라고요?”
홀 안에는 하인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면서 술잔을 나누어 주고 있었고 곳곳에 설치된 탁자 위에는 온갖 고급 음식들이 많이 있었다. 베로니카는 지금 받은 이 술 한 잔을 살 돈으로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 한 번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게 다 공짜라니. 그녀는 부지런히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주인이 돈이 좀 많아.”
마르딜레아는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인 후에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엔디미온은 술잔을 벌써 비우고 지나가는 하인에게 새 잔을 받아들었다. 그는 마르딜레아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도둑질하다가 걸린 놈처럼 구는군. 왜 그러는 거냐.”
“······저기 왼쪽 대각선에 남자 하나 보이지? 아니, 직접 쳐다보지는 말고. 들키면 곤란하단 말이야.”
엔디미온은 고개를 약간 돌리고 눈알을 굴려서 마르딜레아가 말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손에는 반지가 번쩍거렸다. 그는 술잔을 들고서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왜?”
“내가 말했잖아. 여기 오면 만나기 껄끄러운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돈이라도 빌렸나?”
“아니, 그냥 사업적으로 좀 마찰이 있을 뿐이야. 오우, 이런 저 자식도 왔네.”
마르딜레아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방금 막 홀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자신을 발견할까 겁내며 등을 돌렸다.
“저 사람은 또 왜?”
“그냥 도박장 인수 과정에서 내가 저 사람을 좀 화나게 했다고 해두지.”
“대체 사업을 어떤 식으로 하는 거냐?”
“내 좌우명은 이거야. 잘 먹고 잘 살자, 나만.”
“행실이 어떤지 눈에 선하군.”
“이봐, 사업이란 게 다 그런 거야. 먹거나, 먹히거나. 이왕이며 먹어야지. 배 터질 때 터지더라도 말이야.”
엔디미온이 씩 웃었다. 새끼, 말은 잘 하네. 그들은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술과 먹을 것을 즐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홀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마르딜레아에게는 불행하게도 그건 그를 알아볼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젊고 야망 많은 사업가는 자엘라에 많은 적을 두었다. 그래서 보통 때는 저택에서 잘 나오지 않고 혹시나 사업장을 돌아봐야 할 일이 생기면 든든한 부하들을 항상 대동했다.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으면 돈으로 해결했다. 자엘라의 병사들은 언제나 돈 많은 자의 손을 들어주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를 지켜주던 부하들은 엔디미온의 손에 다 박살난 상태였다.
“이게 누구야? 콘타니디오 가문의 귀염둥이 아니야? 내 사업장 망친 우리 씹새끼. 잘 지냈나? 난 그 재수 없는 얼굴에 주먹을 날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마침 딱 그 기회가 내 손에 들어왔군.”
구석에 조용히 있었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다. 마르딜레아는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뚱뚱한 남자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의 뒤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부하들이 여러 명 있었다. 만약 저들이 주먹을 휘두른다면? 마르딜레아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오랜만이야, 다니엘. 잘 지냈냐고? 나야 늘 잘 지내지. 그쪽은 어때? 내가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하나 시작하려는데 혹시 관심 있어? 관심 있다면 이야기 좀 하자고. 음, 오늘은 말고 나중에 말이야.”
“흐흐, 혓바닥을 나불대는 걸 보니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군? 부하들은 다 어디 갔냐?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 나타난 거야?”
“아니, 난 겁 안 먹었어. 그리고 부하? 난 그런 거 거추장스럽게 줄줄 안 달고 다녀. 한 명이면 충분하지.”
다니엘이 슬쩍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데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으니 제법 위압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한 명이었다. 이쪽에서 수로 밀어붙이면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럼 그 한 명 실력 좀 볼까?”
턱짓을 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천천히 다가오자 마르딜레아는 움찔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는 짐짓 태연한 척을 하며 말했다.
“그래, 엔디미온. 실력 좀 보여주라고.”
엔디미온은 말없이 한 쪽 눈썹을 들어보였다. 마르딜레아는 얼른 그의 등 뒤에 숨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엔디미온, 제발. 나 한 번만 살려줘.”
“금화 백 개.”
“응?”
“한 번 도와줄 때마다 금화 백 개라고.”
마르딜레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엔디미온이 움직였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적에게 주먹을 날린 후에 왼쪽 주먹을 꽉 쥐었다. 날아간 주먹은 또 다른 적에게 직격했고 엔디미온의 두 눈은 벌써 다음 적을 쫓고 있었다. 발차기를 날려 한 명을 해치우고 몸을 돌리며 허리의 회전력을 이용해 발뒤꿈치로 적 한 명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머리에 뒤돌려 차기를 맞은 남자는 머리가 뚜둑 소리를 내며 홱 회전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엔디미온은 다시 주먹을 쥐고서 다니엘의 부하들을 타격했다. 그가 일곱 명의 사람들을 모두 해치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인들이 싸움이 일어난 것을 보고 경비들을 부르러 가려고 했으나 그 전에 모두 끝나고 말았다. 다니엘은 엔디미온을 쳐다보며 몸을 덜덜 떨었다. 마르딜레아의 말대로 정말 한 명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뒤에 숨어 있던 마르딜레아는 재빠르게 튀어나와서 꺼드럭거렸다.
“이런, 부하들이 전부 다 당해버렸군. 미안하게 됐어, 다니엘.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자, 그럼 우리도 이제 슬슬 선수 대기실로 가자고.”
엔디미온 일행은 멍하니 있는 다니엘을 남겨두고서 선수 대기실로 이동했다. 지하투기장에서 선수 등록을 마친 선수에게 개인실을 제공해주었다. 라이오넬은 바로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대기실로 들어가자 라이오넬이 소리쳤다.
“경기는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냐! 수많은 관객들에게 내 실력을 보여줄 생각을 하니 흥분이 멈추지 않는군!”
마르딜레아가 라이오넬을 진정시켰다.
“진정해, 제발. 경기는 이제 한 시간 뒤면 시작이야.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영감님.”
대기실 안은 널찍했다. 검투사가 누워서 쉴 수 있는 간이침대도 있었고 탁자 위에는 먹을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엔디미온은 의자 하나를 탁자 쪽으로 끌고 오며 마르딜레아에게 물었다.
“경기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냐?”
“경기 방식은 아주 간단해. 둘이 싸워서 이긴 쪽이 올라가는 거야. 쉽지? 참가자는 총 열여섯 명이고 다들 이름 좀 날린 검투사들인데 너무 걱정할 건 없어. 내가 봤을 때 라이오넬이 무조건 다 이겨.”
“그럼 우리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돈을 따는 거냐?”
“아······. 그건 아니야. 열여섯 명 중에서 1등을 한다고 해서 경기가 끝나는 게 아니거든. 그 다음이 진짜 중요해. 내가 봤을 때 이건 승률이 반반이야.”
“그 다음?”
마르딜레아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말했다.
“챔피언을 이겨야 해. 그래야 진짜 우승이야. 사실 그 전에 하는 대결은 그저 챔피언에게 도전할 사람을 뽑기 위해서 하는 예선에 불과해. 챔피언이랑 붙는 게 본선이라고.”
“그 챔피언이란 자가 제법 강한 모양이지?”
“제법 강하냐고? 아니, 엄청 강해. 챔피언 자리를 몇 년째 지키고 있는지 알아? 무려 오 년이야. 검투사 수명이 길어봤자 삼 년이란 걸 생각하면 엄청 대단한 거지.”
엔디미온은 심드렁했다. 검투사 따위가 대단해봤자 검투사지. 라이오넬은 백 년 전의 영웅이었고 검술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검투사에게 진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승부조작을 위해서 일부러 져준다면 모르겠지만.
“잠시 뒤 경기 시작입니다. 입장 준비해주세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후에 목소리가 들렸다. 엔디미온 일행은 대기실을 나와서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의 끝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감옥처럼 생긴 경기장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관람객들이 자리를 잡고 경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라이오넬이 지하투기장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서 경기장으로 걸어가는 사이에 마르딜레아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저길 봐. 저 사람이 챔피언이야.”
그곳에는 전사가 있었다. 살결은 검은색이었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몇 가닥씩 꼬아서 수십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웃옷은 입지 않아서 잘 단련된 근육들이 여실히 나타났고 그것은 충만한 생명력 덕분에 광택이 났다. 아래에는 반바지만을 입었고 쭉 뻗은 두 다리는 바위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단단했고 동시에 묵직했다.
새까만 두 눈은 고요했고 두꺼운 입술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겼다. 분명히 전사였으나 손에는 어떠한 무기도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단한 주먹과 두꺼운 다리가 그의 무기였으며 튼튼한 근육이 그의 갑옷이었으니까.
전사의 두 손은 강철이었다. 그것은 시적인 비유인 동시에 명확한 사실이었다. 남자의 손은 회색이었고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 자식 이름이 뭐냐?”
“비다르. 강철 주먹의 비다르.”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