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55화 (5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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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 다시 볼 줄이야.”

강철 주먹의 비다르. 그는 남부 출신의 악마사냥꾼이었다. 그가 악마를 죽이는 이유는 신실한 신앙심이나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였다. 더 많은 돈을 벌려면 더 많은 악마를 죽여야 했고 그것을 위해 그는 기꺼이 자신의 두 주먹을 강철로 바꾸었다.

신성한 의무를 함께 하기에는 인성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 실력만은 확실했기에 엔디미온은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비다르는 대악마와의 싸움에서 큰 활약을 했지만 백 년의 의무를 행하지는 않았다. 사실 엔디미온도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연히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고 비다르는 역시나 제일 먼저 도망쳤다. 그리고 백 년이 지난 지금 지하투기장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선수 입장이 있겠습니다! 먼저 아리오스 투기장의 켈라!”

사회자가 외치는 소리에 엔디미온은 고개를 움직여 경기장 쪽을 보았다. 검과 버클러를 든 남자가 입장하고 있었다. 비다르는 경기장 쪽만 쳐다보았고 엔디미온 쪽은 보지 않았다. 사회자가 다시 외쳤다.

“이번에는 그라마브니아 투기장의 라이오넬!”

라이오넬이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관람객들은 라이오넬을 보고서 웃었다. 켈라는 우람한 체격의 검투사인데 반해 라이오넬은 노인이었고 거기에 장님이었다. 체격은 비슷하다고 해도 장님인 것이 몹시 불리했다. 관람객들은 음식물을 경기장 안으로 던지며 라이오넬을 조롱했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사회자는 날아오는 음식물들로부터 도망치며 다급히 외쳤다.

“경기 규칙은 간단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이 납니다! 그 외에는 모두 자유! 어떠한 수를 써서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됩니다! 온갖 비겁한 수를 써도 괜찮습니다! 켈라와 라이오넬, 라이오넬과 켈라! 둘 중 누가 살아남을까요? 그럼 첫 번째 경기,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경기장 바깥으로 도망치고 이제 켈라와 라이오넬만이 남았다. 켈라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마르딜레아한테 감사해야겠어. 덕분에 낙승이겠군.”

켈라 역시 라이오넬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사실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단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서 라이오넬은 장님이었다. 장님이 무슨 수로 싸우나?

“그럼 빨리 끝내고 느긋하게 다음 경기를 관람해볼까.”

켈라가 먼저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그는 방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단칼에 라이오넬의 목을 베는 것만 집중했다. 단단히 칼자루를 잡은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나자 관람객들은 모두 라이오넬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만을 기대했다. 그들이 오늘 이 지하투기장에 온 것은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된 전투가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죽어라!”

사람의 목이 잘릴 때 무슨 소리가 날까. 켈라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목을 잘랐지만 무슨 소리가 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누구는 서걱하는 소리가 난단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살만 자르면 그런 소리가 날지도 모르지만 목을 자르려면 그 안의 뼈까지 잘라야 했으니까.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날카로운 쇳소리는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야?”

“뭐긴 뭐야.”

라이오넬은 켈라의 검을 힘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튀어나갈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다. 검은 허리 아래에 두고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이 한 번의 일격을 완성하기 위해서 백 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했던 자세였다. 그것은 그가 완성한 검술의 정수였고 전부였다. 그는 오직 이것만 연습했다. 왜냐하면 이것 하나로 충분하니까.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간 라이오넬의 몸은 한 순간 빛이 되었다. 엄청난 빠르기로 거리를 좁힌 다음에 휘두른 검은 빛의 칼날이 되어서 켈라의 목숨을 노렸다. 일개 검투사 따위는 결코 받아낼 수 없는 일격이었다. 켈라는 반사적으로 검과 버클러로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라이오넬의 검은 강철로 만든 검과 버클러를 잘라버리고 그대로 쭉 나아가서 상대의 가슴을 베었다.

관람객들은 침묵했다. 단 일격이었다. 공방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번의 공격에 승부가 끝이 났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스, 승자는 라이오넬! 그라마브니아 투기장의 라이오넬!”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서 켈라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사회자가 라이오넬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이게 진짜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제 라이오넬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가 백 년 동안 수련한 검술은 향락에 미친 부자들에게 재미난 볼거리에 불과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첫 번째 경기를 승리한 라이오넬이 다시 대기실로 돌아갔다. 경기는 빠르게 진행됐다. 8번의 결투가 끝나고 8명의 승자들이 다시 맞붙었다. 라이오넬은 언제나 승리했고 결코 두 번 상대를 베지 않았다. 그가 이길 때마다 관람객들은 더 크게 이름을 외쳤다.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란 이름은 하나의 흐름이 되었고 그가 마지막 대결에서도 일격에 상대를 해치우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이름을 외쳤다. 그들은 지하투기장에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음을 알았다. 지금 그들이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챔피언인 비다르와 도전자인 라이오넬의 대결이었다.

라이오넬은 마지막 경기가 끝났음에도 가만히 있었다. 승리의 여운을 즐기기 위해서도, 사람들의 환호를 만끽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장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정확하게 비다르를 보고 섰다.

엄밀히 말해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단지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는 비다르를 감각에 의존해 찾아낸 것뿐이었다. 그건 비다르가 의도한 일이었다. 그는 라이오넬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투기를 발산했고 그것은 일종의 도발이었다.

백 년의 시간이 지났고 비록 노망이 났으나 라이오넬은 한때 자신과 함께 했던 전우를 잊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적으로 다시 만난 비다르를 향해 검을 겨누며 나직이 말했다.

“네가 내 마지막 상대인가. 한 번 붙자.”

비다르는 도발에 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경기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경기장과 관람석을 분리하는 벽을 단단한 주먹으로 박살난 후에 경기장의 입구로 들어가는 대신 창살을 좌우로 잡아당겨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비다르의 움직임에 열광했다. 아까까지 라이오넬의 이름을 외치던 사람들은 이제 전부 비다르의 이름을 외쳤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비다르는 멍하니 있는 사회자에게 턱짓을 했다. 얼른 나가라는 의미였고 사회자는 도망치듯 경기장을 벗어났다.

“라이오넬.”

“비다르, 오랜만이군. 설마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네.”

“나도 마찬가지야. 한때 악마들에 대항해 싸웠던 고결한 영웅들이 이제는 투기장의 짐승이 되어서 다시 만나다니. 참 우스운 일이군.”

“그래, 우습군.”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면서도 바로 싸움을 시작할 수 있게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비다르는 새까만 얼굴과 대조적으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넌 내 상대가 안 돼, 라이오넬.”

“허세를 부리는군.”

“글쎄, 허세인지 아닌지는 붙어보면 알겠지.”

먼저 움직인 것은 비다르였다. 그의 다리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주먹이 날아올 것을 직감한 라이오넬이 검을 들어서 방어 자세를 잡았다. 주먹과 검이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났다. 라이오넬은 주먹을 힘으로 밀어낸 후에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비다르는 지금까지 라이오넬의 경기를 쭉 지켜보았고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자세를 낮추고 두 주먹을 가슴 위로 들어올렸다.

천둥소리가 나고 라이오넬이 빛처럼 튀어나갔다. 비다르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갈고리처럼 휘둘렀다. 오른쪽 주먹이 검과 부딪히자 벼락이 치는 것처럼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관람객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으나 비다르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왼쪽 손을 내밀었다. 주먹에 맞고 튕겨져 나간 검을 손으로 붙잡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라이오넬은 들고 있던 검이 붙잡히기 직전에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검사가 자신의 무기를 버리는 것은 곧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라이오넬이 그걸 몰랐을 리는 없었다. 관람객들이 탄식하는 것과 동시에 라이오넬은 비다르의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 주먹을 위로 날렸다.

깔끔하게 턱에 직격한 주먹에 비다르의 고개가 약간 들렸다. 그 순간에 생긴 사각은 비다르에게 분명 치명적이었다. 라이오넬은 몸을 세게 부딪쳐서 비다르를 뒤로 밀어낸 후에 빠르게 허리를 돌려 갈빗대를 걷어찼다.

비다르의 몸은 바위와 같았으나 상대는 그와 같은 영웅이었다. 분명 유효한 타격이었고 비다르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 마침 노린 것처럼 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라이오넬은 초인적인 감각으로 검을 바로 잡아낸 후에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바위조차 베는 강력한 일격은 비다르의 가슴에 길게 상처를 남겼다. 본래라면 그대로 기세를 이어서 그의 목숨을 끝장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비다르는 이깟 상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저돌적으로 돌진하여 손으로 검을 잡으려고 했다.

라이오넬은 얼른 검을 뒤로 뺐으나 그게 실수였다. 애초에 비다르가 노린 것은 검이 아니었다. 그는 거리를 좁힐 시간을 벌려고 했고 검을 노리는 척 했던 것은 훌륭한 시간벌기가 되었다. 주먹을 날릴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한 비다르가 강철로 된 주먹을 날렸다.

공기를 찢는 무시무시한 소리에 라이오넬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다. 하지만 강철 주먹은 방어도 무시하고 그의 몸을 멀리 날려버렸다. 순간적으로 몸이 공중에 떴지만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한 손으로 바닥을 딛고 탄력적으로 튀어 올라 한 바퀴 회전한 후에 두 발로 착지했다.

멋진 착지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벌써 따라온 비다르가 발차기를 날렸고 그것에 맞은 라이오넬은 다시 한 번 뒤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철장에 몸을 부딪쳤고 비다르가 다시 달려오며 주먹을 휘두르자 얼른 바닥을 한 번 굴렀다.

그 모습을 본 비다르가 웃었다.

“말했지! 너는 내 상대가 안 된다고!”

라이오넬은 잔기침을 하면서 피를 약간 뱉었다. 그는 검을 고쳐잡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옛날부터 네가 싫었어, 이 깜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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