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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고백에 비다르는 잠깐 침묵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한참 웃던 그는 얼굴을 굳히며 웃음을 뚝 그쳤다. 본래 여유가 넘쳤던 얼굴에는 딱딱하게 굳어서 바위처럼 변했다.
“난 그래도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네 생각이고.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는 하지 말게. 솔직히 말해서 자네는 영웅에 어울리지 않아. 싸움 좀 한다고 아무나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비다르는 숨을 크게 삼켰다가 후 내뱉었다. 그는 주먹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고 왼쪽 다리를 뒤로 뺐다. 오른쪽 다리 근육은 빠르게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달라졌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모두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투기를 뿜어냈다.
경기장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비다르가 먼저 한 발자국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거인이 움직이는 듯 묵직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발자국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빨랐다.
“그럼 이제 봐주면서 싸울 이유가 없군.”
온다. 라이오넬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무리 발자국 소리를 숨겨도 그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긴 다리로 껑충껑충 뛰어오는 모습, 오른쪽 주먹을 바짝 뒤로 당긴 모습, 그 다음에 바로 오른쪽 다리로 차려고 하는 모습. 검은색 세상 안에서 그 모두가 선명하게 보였다.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무려 백 년이나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수련의 결과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상관없었다. 민감한 감각은 살결에 부딪히는 바람만 느끼고서도 거리를 잴 수 있었고 백 년 동안 몸에 익어버린 동작은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이미 완벽하게 발휘됐다.
검과 주먹이 부딪혀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라이오넬의 검은 이미 뒤로 움직여서 상단을 방어하고 있었고 미리 생각했던 대로 비다르의 발차기가 날아와 검에 부딪혔다. 그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비다르가 어떤 공격을 하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검은 한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라이오넬이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히 공격을 방어하기는 했지만 충격을 모두 흘려낸 것은 아니었다. 비다르는 한때 영웅이었고 성배기사에게 신성한 힘을 받았으며 강철로 된 주먹은 어떤 것도 부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휘두르는 주먹을 받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검으로 주먹을 받아내다가 비틀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아무리 충격을 흘리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비다르의 주먹은 강철도 부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목숨을 건 싸움이고 상대를 죽여야만 끝이 났다. 상대를 죽이려면 공격을 해야 했고 그건 라이오넬이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는 검을 억지로 멈추었다. 그리고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는 주먹을 피했다.
그 다음은 공격이었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사납게 비다르의 목숨을 노렸다. 처음에는 왼쪽 상단, 그 다음은 허리를 노리고 마지막으로 검을 뒤로 당겼다가 빠르게 내질렀다. 세 번의 공격은 마치 한 번의 공격이었던 것처럼 행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검 한 번 휘두르는 것이 고작이었을 시간에 세 번의 공격이 비다르의 몸을 노렸다.
첫 번째 공격은 비다르의 왼쪽 어깨를 베었고 두 번째 공격은 허리를 베었다. 세 번째 공격은 비다르의 주먹에 검이 붙잡혀서 무위로 돌아갔으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악력으로 비다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버리고 주먹을 쥐었다.
주먹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노인답지 않게 강인한 육체를 가진 라이오넬의 주먹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비다르의 얼굴을 때렸다. 공격이 정확히 들어갔다는 것은 손끝의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비다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영웅들 중 누구의 주먹이 가장 강하냐?”
라이오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비다르의 얼굴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엔디미온이냐? 라우렌시오냐? 라이오넬이냐? 아니면 그 외의 다른 누구냐?”
비다르의 얼굴이 라이오넬의 주먹을 밀어냈다. 그는 쾅 소리를 내면서 발을 굴렀다. 바닥이 박살나고 그의 발이 그 안에 박혔다.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더 세게 주먹을 날리기 위해서.
“아니! 나다! 내가 제일 강하다! 강철 주먹의 비다르, 내 주먹이 제일 강하다!”
주먹은 갈고리처럼 날아와서 라이오넬의 배에 꽂혔다.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주먹은 말 그대로 철퇴였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고 비다르의 왼쪽 주먹이 라이오넬의 얼굴을 때렸다.
강력한 주먹에 맞은 라이오넬의 몸이 뒤로 날아가서 여러 번 바닥을 굴렀다. 그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정신 차려야 했다. 머리를 한 번 세게 흔들고서 주먹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비다르는 근처에 있었다. 그는 아주 빨랐고 주먹은 묵직했다. 라이오넬이 내지른 주먹은 빗나갔다. 하지만 비다르의 주먹은 정확히 적중해서 라이오넬의 머리를 흔들었다. 한 대 맞을 때마다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주먹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얼른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먹에 한 대 맞을 때마다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고개가 홱 돌아갔다.
“너는 내 상대가 안 돼! 너 따위는 내 상대가 안 된다고!”
비다르는 소리를 지르며 라이오넬을 사정없이 구타했다. 그 무자비한 모습에 관람객들은 열광했고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베로니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강하다! 백 년 전보다 더!”
싸움은 일방적인 구타로 변했다. 비다르가 주먹을 날릴 때마다 묵직한 타격음이 났다.
“날 봐라! 나를 보라고! 내가 옛날의 그 비다르 같나? 어? 그래 보여? 이 눈깔 병신아! 한 번 말해 봐!”
라이오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방어에만 집중했다. 지금까지 몇 대나 맞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전의를 잃지 않았다. 얻어맞은 곳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참았다. 고통이라면 익숙했다. 백 년 전의 그는 악마들과 싸우는 영웅이었고 그때는 이것보다 더 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싸움은 결국 상대의 목숨을 뺏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얼마나 때렸느냐, 얼마나 맞았느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의 목숨을 뺏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라이오넬이 가장 잘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쉬지 않고 주먹을 날리던 비다르의 기세가 약간 줄었다. 그 역시 사람이었고 숨도 쉬지 않고 끝도 없이 주먹을 날릴 수는 없었다. 주먹을 뒤로 빼면서 숨을 고르는 그 약간의 틈, 시간으로 따지면 몇 초도 되지 않는 바로 그 틈, 마지막이자 반드시 붙잡아야 할 기회였다.
라이오넬은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을 대신할 민감한 감각들이 있었다. 코로는 비다르의 냄새를 맡았고 귀로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살결은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감각이 민감해도 눈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었다. 지금 주먹을 뻗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확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믿었다. 자신을 믿기에 시력을 잃은 이후에도 검술의 끝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누구냐.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비다르가 주먹을 뒤로 빼는 찰나의 순간, 웅크리고만 있던 짐승이 달려들었다. 주먹이 노리는 것은 얼굴이었다. 얼굴의 위치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비다라의 체격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간발의 차로 빗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스스로 되뇌었다. 천둥검은 강하다.
관람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라이오넬의 주먹은 비다르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갈고리처럼 반달을 그리며 날아간 주먹은 얼굴에 스칠 듯 가까웠다. 라이오넬은 직감했다.
“······그게 아니지, 라이오넬.”
공격은 빗나갔다. 스치듯 가까웠던 주먹은 결국 얼굴을 스쳤을 뿐이다. 비다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주먹을 날리려면 똑바로 날려야지!”
씩 웃던 비다르가 주먹을 날렸고 라이오넬은 두 팔을 교차해서 공격을 막아냈다. 그럼에도 충격을 다 흘려내지 못해서 뒤로 몇 발자국이나 밀려났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가리던 팔을 내렸고 침을 한 번 삼켰다. 비다르가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가 무위로 돌아갔으니 이제 끝난 것인가? 이대로 져야하는가?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이오넬은 비다르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검술의 경지에는 세 가지가 있다.”
비다르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주먹을 날렸다.
“공격을 막는 것은 셋의 경지고.”
공격은 라이오넬의 팔에 막혔다.
“공격을 하는 것은 둘의 경지고.”
주먹이 날아와 비다르의 얼굴에 꽂혔다.
“베지 않아도 베는 것은 하나의 경지다.”
비다르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방금 전 주먹이 스쳐지나간 줄 알았던 바로 그 곳이었다. 콧잔등 위로 길게 이어진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비다르는 혀로 입술 위의 피를 핥았다.
“바로 여기까지가 세 가지 경지고.”
라이오넬이 두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음에도 마치 검을 잡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고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 다음 동작은 간결했다. 휙 내려치기.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단지 그것뿐인 동작 때문에 비다르의 가슴부터 배까지 길게 상처가 생겼다. 창으로 찔러도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단단한 근육들 위로 상처가 길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다가 금세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관람객들은 모두 침묵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검도 없이 벤다니? 설마 검에 마법을 걸어서 보이지 않게 해두었나? 정말 그랬다고 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문제였다. 두 사람은 몇 발자국이나 떨어져 있었고 정말 검이 있었다고 해도 결코 벨 수 없는 거리였다. 그런데 라이오넬은 베었다. 검도 없는데.
“검이 없어도 검이 있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부터는 나의 경지다. 잘난 척 지껄여대던 깜둥이 놈아. 한 번 말해봐라. 내가 누구냐?”
“흐흐흐······.”
비다르가 웃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 일견 실성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큰 소리를 내며 웃던 그는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백 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구나. 인정할 건 인정하지. 그럼 이제 서로 점잔 빼지 말고 제대로 한 번 붙어볼까?”
“바라던 바일세.”
비다르와 라이오넬이 서로를 마주 보고서 웃었다. 두 사람은 이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한 명은 죽을 것이고 한 명은 살 것이다. 이건 그런 싸움이니까. 두 사람의 투기가 서로 부딪혔다. 그것은 경기장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고 심약한 자들은 숨 쉬기 괴로워했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두 명의 영웅이 서로를 향해 뛰어나갔다. 서로 충돌하기 일보직전, 갑자기 누군가 말했다.
“그만, 거기까지.”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힘이 있었다. 엔디미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