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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르가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통통 튀면서 주먹을 가볍게 흔들었다. 빈틈이 많아 보이는 자세였지만 그것은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함정이었다. 의도적으로 노출한 빈틈은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였고 그것을 노리고 주먹을 날리면 그대로 반격에 당하는 것이다.
엔디미온은 그와 지낸 시간이 길었고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다르가 일부러 방심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 역시 당연히 알았다. 지금 그는 주먹을 가볍게 흔들면서 안면을 의도적으로 노출하고 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는 얼른 들어와서 얼굴을 때리라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비다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그리고 잽싸게 움직이는 비다르에게 농락당하며 연타를 맞고 그대로 뻗었으리라. 엔디미온은 뻔한 함정에 당할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튼튼한 두 다리가 바닥을 밀어내듯 몸을 날려보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고 일격을 날릴 만한 곳을 눈으로 찾고 있었다. 적당한 곳이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향해 날렸다. 바로 비다르의 얼굴에.
“크악!”
비다르는 얼굴에 주먹을 맞고서 뒤로 날아갔다. 그가 준비했던 함정은 엔디미온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토끼를 잡는 함정으로 멧돼지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비다르의 함정은 엔디미온에게 통하지 않았다. 강력한 힘은 간악한 수법을 압도했다.
“제법이구나!”
다시 벌떡 일어난 비다르가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왔다. 강철 주먹이 붕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뒤로 물러나던 엔디미온은 갑자기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멈추었다. 발등이 비다르의 발에 밟혀 있었다. 발을 뒤로 빼려고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주먹이 날아와서 얼굴에 직격했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무리 성배기사라도 고통은 느꼈다. 그냥 주먹도 아니고 강철로 만들어진 주먹이 얼굴을 때리는데 멀쩡할 수는 없었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달아 날아온 주먹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엔디미온은 맞으면서도 두 눈으로 비다르를 보고 있었다.
맞을 때 그냥 맞고만 있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단 한 번의 반격으로도 끝날 수 있는 것이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찾는 것은 끝없는 탐색이었다. 비다르의 어깨가 크게 들렸을 때, 분명히 아까보다 더 큰 힘으로 주먹을 휘두르려고 할 때,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얼굴이 얼얼할 때까지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큰 동작에는 큰 허점이 생긴다. 그리고 큰 허점은 큰 기회다.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비다르가 소리를 치며 주먹을 날렸다. 엔디미온은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기회가 왔다면 어떤 식으로 잡을 것인가? 막을 것인가? 피할 것인가? 아니면 맞아주고 반격? 그가 선택한 방식은 회피였다. 허리가 뒤로 크게 젖혀지면서 비다르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 상태에서 엔디미온이 왼쪽 다리를 들었다. 본래라면 불가능한 자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다르가 그의 오른쪽 발을 밟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뒤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들어 올린 왼쪽 다리로 비다르의 배를 강하게 찼다. 생각지 못한 반격에 비다르의 몸이 휘청거렸고 덕분에 엔디미온의 오른쪽 발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허리를 완전히 뒤로 젖히고는 길쭉한 팔을 뻗어서 손으로 바닥을 디딘 후에 두 팔의 힘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런 식으로 한 바퀴 회전하면서 오른쪽 다리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비다르는 턱에 발차기를 얻어맞고서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깔끔하게 한 바퀴 회전한 엔디미온이 빠르게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비다르가 방어 자세를 잡을 새도 없이 묵직한 주먹이 배에 꽂혔다. 그는 숨을 크게 토해내면서 달라붙은 엔디미온의 어깨를 손으로 붙잡았다. 악력으로 어깨를 분질러버리려는 것처럼 잔뜩 힘을 주자 엔디미온은 그의 몸을 힘으로 밀었다.
처음에는 몇 걸음 뒤로 밀려났으나 비다르는 곧 다리에 힘을 주고서 억지로 버텼다. 이미 박살났던 바닥이 다시 한 번 더 잘게 부서지면서 그의 다리가 고정됐다. 더는 힘으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서 엔디미온은 비다르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걸고서 힘을 이용해 뒤로 넘어트렸다.
아무리 다리를 바닥에 박았다고 해도 다리 하나만으로 엔디미온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비다르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엔디미온이 그 위에 올라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단단한 주먹이 묵직하게 얼굴에 꽂혔다. 한 번 주먹이 꽂힐 때마다 비다르의 머리가 자꾸만 아래로 처박혔다.
그는 손을 꿈틀거리다가 꽉 쥐면서 자신의 위에 올라탄 엔디미온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주먹이 날아와 그의 머리를 완전히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들어올렸던 주먹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할 테냐, 비다르?”
대답은 없었다. 너무 심하게 때렸나. 엔디미온이 별 생각 없이 비다르의 몸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비다르의 얼굴이 솟아오르면서 돌조각들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날아오는 돌조각들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려졌다. 엔디미온은 눈을 향해 날아오는 돌조각을 손으로 쳐냈다. 그러자 돌조각 뒤에 숨어있던 비다르의 주먹이 엔디미온의 얼굴을 때렸다. 강렬한 충격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비다르는 그 틈을 노려서 엔디미온을 몸 위에서 밀어냈다.
비다르가 벌떡 일어나서 아직 바닥에 넘어져 있는 엔디미온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 타격음만으로도 얼마나 세게 찼는지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충격으로 바닥을 한 번 구른 후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흘렀다. 마주 보고 있는 비다르의 얼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코뼈가 부러진 것인지 엉망이 된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손으로 피를 닦았다. 붉은 자국이 인중 위에 길게 남았다.
비다르는 이제 웃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어. 덤벼.”
엔디미온은 혀로 찢어진 입술의 피를 핥았다. 비릿한 맛이 입 안에 가득했다. 그는 입을 오므려 피와 함께 침을 뱉어낸 후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 말도 없이 왼쪽 다리를 뒤로 쭉 뻗었고 그대로 바닥을 밀어내듯 몸을 날렸다.
비다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주먹을 날렸으나 빗나갔다. 대신에 엔디미온의 주먹이 얼굴에 꽂혔다.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번에는 왼쪽 주먹이 얼굴을 강타했다. 그 다음은 복부를 관통할 정도의 강력한 주먹, 다음은 다시 한 번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며 타격하는 주먹, 마지막으로 쩍 벌린 짐승의 아가리처럼 자신의 얼굴을 노리는 상단차기.
머리 위까지 올라온 엔디미온의 다리가 비다르의 얼굴을 때릴 때까지는 걸린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하지만 비다르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다리를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위험하다.
“컥!”
발차기를 맞은 비다르의 몸이 공처럼 바닥을 굴렀다. 그는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귀가 멍멍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야가 흔들렸으나 그래도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발차기는 분명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위력이었다. 아무리 영웅이라도 그런 것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무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비웃지 않았을 것이다. 비다르의 상대는 성배기사였고 그는 할 수 있는 만큼 치열하게 싸웠다. 처음에는 엔디미온과 비등하게 싸우는 듯 했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제법 유효타를 먹이며 분전했다. 싸울 만큼 싸웠다. 할 만큼 했다. 애초에 승부의 결과는 명확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다르는 다시 일어났다. 아무리 주먹에 맞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다. 그때마다 그는 한 마디만 했다.
“덤벼.”
얼굴에 주먹이 꽂혀도, 발차기를 맞아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져도, 그래도 일어났다. 그때마다 다시 말했다.
“덤벼!”
바닥에는 비다르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그는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다시 한 번 주먹을 쥐었다. 강철 주먹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의 불꽃 같은 의지처럼.
“승부는 났다, 비다르. 넌 날 이길 수 없어.”
“개소리하지 마! 아직 안 끝났어! 날 봐라! 내가 쓰러져 있나? 내가 기절해 있나? 나는 아직 싸울 수 있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철 주먹의 비다르다!”
비다르는 몇 번이나 덤볐으나 몇 번이나 같은 결과가 나왔다.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비다르는 엔디미온을 이길 수 없다. 바닥에 흘린 피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날 이길 수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대체 왜 인정하지 않는 거냐.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냐? 나는 강하다고 외치면 이길 수 없는 승부를 이기게 되나?”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던 비다르가 피로 젖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강하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 나 같은 사람?”
비다르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갑자기 생기가 돌아온 것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주먹을 잘 쓰면 강한가? 검을 잘 쓰면 강한가? 아니면 그냥 힘이 세면 강한가? 아니야. 다 틀렸어. 그게 아니라고. 강하다는 건 간단한 거야.”
“의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거냐? 적에게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자신의 몸을 태워가며 강적에게 저항하는 불꽃의 의지, 그런 걸 말할 셈이냐? 그게 네가 생각하는 강함이냐?”
“개소리하고 있네. 그딴 거 알 게 뭐야.”
부릅뜬 두 눈, 힘줄이 드러날 정도로 꽉 쥐고 있는 주먹, 후들거리면서도 단단히 바닥을 딛고 있는 다리. 엔디미온은 깨달았다. 비다르는 결코 승부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그냥 강한 놈이 강하다. 그게 다야. 그리고······.”
이미 엉망이 된 바닥이 다시 한 번 더 잘게 부서졌다. 비다르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빨랐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약간 뒤로 당기고 주먹을 쥐었다.
“내가! 제일! 강하다!”
두 개의 주먹이 서로를 노리고 움직였다. 주먹끼리 닿을 듯 아슬아슬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날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먹을 날렸다. 그것은 정확히 서로의 얼굴에 꽂혔고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삼켰다.
경기장 안은 고요했다. 지금까지 바닥을 부수고 요란하게 싸웠던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침묵을 깬 것은 굳건하게 버티고 있던 커다란 몸이 스르륵 쓰러지는 소리였다. 쿵 소리가 나면서 한 명이 바닥에 쓰러졌고 한 명은 천천히 주먹을 내렸다.
“내가 이겼다, 비다르.”
이긴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그의 주먹은 이미 만신창이였던 비다르가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범벅이 되서 쓰러져 있는 비다르를 보다가 숨을 내뱉으며 경기장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라이오넬.”
“그래, 엔디미온. 안타깝지만 저 깜둥이를 죽여야겠지. 걱정하지 말게. 내가 책임지고 단칼에 죽이겠네!”
“······개소리하지 말고 비다르 챙겨. 데리고 갈 거니까.”
“아, 이거 지금 죽여야 되는데······.”
“좀 닥쳐.”
엔디미온은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서 베로니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마르딜레아와 베로니카가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냥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제대로 살고 있는 놈들이 한 명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