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59화 (5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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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군······.”

마르딜레아는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입을 쩍 벌리고 있겠지. 분명 바보 같아 보이는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당연히 엔디미온이 비다르를 이겼기 때문이었다. 비다르는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진 적 없는 지하투기장의 강자였다. 라이오넬조차 약간 밀리는 느낌이었는데 그런 상대를 엔디미온이 이겨버리다니.

혼자서 저택의 부하들을 모두 해치웠다고 할 때부터 비범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마르딜레아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비다르와 엔디미온이 나누었던 대화였다.

비다르, 강철 주먹의 비다르. 그 이름은 어렸을 적 책에서 몇 번 보았다. 성배기사의 등 뒤를 든든하게 지켰다는 강철의 전사. 처음 비다르를 봤을 때는 영웅을 따라하는데 심취한 자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영웅의 이름을 따라하는 자가 많았으니까.

그럼 엔디미온은? 그 역시 영웅 놀이 중인 것일까? 그래서 우연찮게 비다르를 만나서 성배니 의무니 하는 소리를 지껄인 것일까?

‘그럴 리가 없어.’

마르딜레아는 사업가였다. 그가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콘타니디오 가문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확신했다. 비다르와 엔디미온, 이 두 사람은 백 년 전의 영웅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었다. 그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연을 맺어둬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이건 확신이었다.

“이야, 정말 대단하시군요! 강철 주먹의 비다르를 이기다니! 정말 놀라운 무용입니다!”

마르딜레아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엔디미온에게 아첨했다. 바닥에 누워서 숨만 쉬고 있던 엔디미온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갑자기 왜 존댓말 하냐.”

“엔디미온님을 흠모하는 마음이 넘쳐흐르는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오는군요.”

“날 흠모해? 이제 와서 갑자기?”

엔디미온이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헛소리하지 말고 돈이나 내놔. 어디 가면 받을 수 있는 거냐?”

“아, 그게 말이지요. 이게 다 절차라고 할까, 그런 게 있는데 지금 상황이······.”

마르딜레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엔디미온과 비다르의 싸움 때문에 경기장은 완전히 박살나서 엉망이 됐고 관람객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달라고 해봤자 마르딜레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기 주인이 누구냐?”

“지하투기장이요?”

“그래, 여기 주인이 누구냐고. 그 사람한테 가서 돈 받아야 할 거 아니야. 아니면 네가 금화 천 개 주면 조용히 떠나고.”

“아이고, 제가 얼른 안내해드리지요! 일단은 지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엔디미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싸우기 전에 벗었던 장비들을 모두 주섬주섬 챙겼다. 옷을 입고 갬비슨, 사슬갑옷, 서코트를 순서대로 입었다. 창은 등에 메고 두 자루의 검은 허리춤에 단단히 찼다. 얼굴을 너무 맞아서 입을 움직일 때마다 입가가 쓰라렸지만 그냥 참았다. 나중에 물 한 잔 마시면 다 나을 상처였다.

“라이오넬.”

“그래, 드디어 죽이는 건가? 맡겨두게!”

“······여기서 비다르랑 기다려. 베로니카, 라이오넬 좀 감시하고 있어.”

베로니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말했다.

“제가 과연 영감님을 말릴 수 있을까요?”

“죽으면 어쩔 수 없지.”

“······야.”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의 말을 무시하고 마르딜레아를 불렀다.

“너는 나랑 같이 돈 받으러 간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마르딜레아가 길을 안내했고 엔디미온은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왔던 길로 다시 나갈 줄 알았는데 새로운 길을 안내했다. 나선처럼 빙글빙글 도는 길이었는데 점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위치상으로 이대로 위로 올라가면 자엘라의 영주궁이 나왔다.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설마 지하투기장의 주인이 자엘라 영주냐?”

“맞습니다. 명목상 주인은 따로 있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영주님입니다. 이건 비밀이라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 내가 올라가서 영주에게 금화 천 개를 달라고 하면 줄까?”

“글······쎄요?”

솔직히 그 부분은 마르딜레아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엘라 영주가 과연 순순히 돈을 줄까? 그것도 금화 천 개나 되는 거금을? 경기는 비다르 때문에 엉망이 됐고 그 상황에서 비다르를 이긴 것은 미리 등록된 선수인 라이오넬이 아니라 엔디미온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엔디미온은 선수가 아니었고 갑자기 경기에 끼어든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자엘라 영주가 그에게 돈을 줘야 할 의무가 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엔디미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엘라 영주는 분명 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쩔까. 뜯어야지 별 수 있나.

“마르딜레아.”

“네, 부르셨습니까?”

“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다.”

“돈 받는 걸 말입니까? 제가 뭘 어떤 식으로 도와드리면 될 지······.”

“넌 그냥 내 말에 맞다고만 해. 그러면 된다.”

그게 뭐야? 마르딜레아는 의아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들은 지상으로 도착했다. 영주궁과 지하투기장이 바로 연결된 통로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엔디미온과 마르딜레아를 보고서 얼굴을 굳혔다.

“마르딜레아님이시군요.”

병사들 중 한 명이 마르딜레아를 알아봤다.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켈슨, 고생하는군. 혹시 영주님 자리에 있으신가? 좀 급한 용무가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지하에서 생긴 일 때문입니까? 아까 손님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맞아. 그것 때문이야. 급한 일이지.”

병사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처음의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무기는 제게 맡겨주시지요.”

엔디미온은 별 말 하지 않고 창과 검 두 자루를 병사들에게 맡겼다. 두 사람은 병사의 안내를 받아서 영주의 집무실까지 이동했다. 병사가 먼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누구냐고 물었다. 병사가 대답했다.

“영주님, 저 켈슨입니다. 마르딜레아님께서 오셨습니다. 지하의 일 때문에 오셨다고 합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병사가 문을 열어주자 엔디미온과 마르딜레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는 입에는 시가를 물고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뿌연 연기를 뱉어낸 후에 입을 헹구는 것처럼 술을 입 안에 머금었다가 꿀꺽 삼켰다.

나이는 마흔 정도 되는 것 같았고 제법 살집이 있었다. 술 때문인지 눈은 흐려져 있었다.

“오, 마르딜레아. 아버님은 잘 지내시지? 늘 신세 지고 있네. 저번에 보내주신 와인이 아주 기가 막혀.”

“영주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버님이라면 잘 지내고 있으십니다. 언제가 또 식사 한 번 같이 하자고 하시더군요.”

마르딜레아와 영주는 서로 살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엔디미온은 성큼성큼 걸어서 의자 위에 착석했다. 영주는 술냄새를 풍기며 물었다.

“마르딜레아? 이 자는 누구인가? 새로 고용한 부하인가? 덩치가 참 크군.”

“아, 그 사람은······.”

엔디미온은 말꼬리를 자르고 말했다.

“난 엔디미온이오.”

영주는 눈을 끔뻑거렸다.

“엔디미온? 그래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오. 금화 천 개요.”

“갑자기 금화 천 개를 달라니 당황스럽군. 그걸 내가 왜 줘야 하지?”

“내가 강철 주먹의 비다르를 이겼으니까.”

영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이번에 지하투기장에 참가한 선수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 엔디미온이란 자는 없었다. 그럼 돈을 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경기에 참가한 선수가 아니니까.

“이봐, 엔디미온. 자네가 정말 비다르를 이겼는지 아닌지는 내 알 바가 아니야. 이건 규정의 문제라고. 자네는 선수가 아니잖나. 그런데 내가 왜 돈을 줘야 하지? 내가 돈을 주기 싫어서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자네의 요구 자체가 부당한 거야. 안 그런가, 마르딜레아?”

마르딜레아는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은 웃으며 말했다.

“난 기회를 주는 거요.”

“기회? 무슨 기회?”

“금화 천 개로 끝낼 기회. 거부한다면 당신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날 협박하는 건가?”

영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였다. 그는 바깥에 소리를 쳐서 이 건방진 놈을 끌어내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엔디미온이 말했다.

“나는 여섯 날개 악마의 다섯 번째 칼날인 신디아를 죽였소. 이것은 은사자 기사수도회의 대장인 엘런 경이 증명할 것이오.”

“뭐?”

“그리고 나는 악마 아르할리나와 오르탈라를 죽였소. 이것은 할리아 교구장이자 철십자 기사수도회의 대장인 율리아 경이 증명할 것이오. 또한 나는 악마 라가르디오를 죽였소. 이것은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의 상등기사 멜리사 경과 로게나 대교구장이자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의 대장인 그림발드 경이 증명할 것이오.”

줄줄 흘러나오는 업적들은 결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고 있었다. 영주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자엘라는 독립된 교구이며 각 교구들끼리는 서로 간섭할 수 없다! 그리고 입으로만 떠드는 걸 누가 믿나! 네가 성기사라면 그 증거를 대야 할 거다!”

엔디미온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서 던져주었다. 그것을 받은 영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건······.”

엔디미온이 던진 목걸이는 엘런에게 받았던 것이었다. 사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냥 성기사라는 증거가 되겠거니 하고서 꺼낸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잘 먹힌 모양이었다.

“물론 각 교구들은 서로 간섭할 수 없소. 하지만 여명교단 본청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오.”

“여, 여명교단 본청?”

“나는 여섯 날개 악마를 죽이기 위한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서 뒤르겔로 가는 중이요. 나를 토벌대에 추천해 준 것은 엘런 경과 그림발드 경이니 내가 만약 여명교단 본청에서 당신을 고발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나를 지지해줄 것이오. 율리아 경 역시 마찬가지일 거고. 여명교단에서는 사사로이 투기를 하는 것을 금하고 있소. 만약 이곳에서 당신이 서로 죽고 죽이는 지하투기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여명교단에서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소?”

영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된다. 만약 여명교단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성기사들을 보내서 수사를 시작할 것이다. 그럼 왕실 역시 움직일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영주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하,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 내가 이 지하투기장의 주인이라는 증거가!”

“그것은 마르딜레아가 증언할 것이오.”

마르딜레아는 맞다고 대답해야 했다. 안 그러면 엔디미온에게 맞아죽을 테니까.

“마, 맞습니다. 제가 증언할 겁니다.”

“마르딜레아! 네가 감히!”

길길이 화를 내는 영주를 보면서 마르딜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엔디미온 때문에 자엘라 영주와 척을 지고 말았다. 엔디미온이야 자엘라를 떠나면 그만이지만 마르딜레아는 아니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시겠소, 영주? 이건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요. 금화 천 개로 끝낼 마지막 기회.”

영주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엔디미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탁자 위의 물잔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놋쇠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힘을 꽉 주자 종이가 구겨지듯 우그러들었다. 그걸 본 영주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럼 광휘와 광명과 광화의 이름으로 당신의 모가지를 비틀어야겠지. 겸사겸사 금고 안의 돈도 좀 챙기고.”

이게 악당이야, 성기사야? 마르딜레아는 질린 얼굴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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