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60화 (6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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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만. 우리 일단 대화를 좀 하자고.”

영주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엔디미온은 말해보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러니까 자네의 요구는 이거지? 내가 지하투기장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여명교단에 알리지 않는 대신에 금화 천 개를 달라?”

“맞소.”

“그런데 왜 금화 천 개인가? 아니, 애초에 왜 나한테 금화 천 개를 달라는 거야?”

영주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지하투기장은 어디까지나 도박장이다. 돈을 걸면 승부의 결과에 따라서 돈을 따거나 잃는 식이다. 비다르를 이겼다고 금화 천 개를 줘야 하는 규칙 같은 것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손가락으로 마르딜레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저 친구 도박장에서 금화 천 개를 땄는데 당장 줄 돈이 없으니 여기서 돈을 따서 주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우리는 라이오넬에게 돈을 걸었는데 만약 그가 비다르와 끝까지 싸웠으면 이겼을 거요. 내가 대신 싸우기는 했지만 누가 싸웠든 애초에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니 돈을 달라는 소리요.”

“······이봐, 자네도 지금 개소리하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글쎄, 난 모르겠소만.”

영주는 기가 찼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부른다고 해도 그 전에 엔디미온은 영주의 목을 몇 번이나 비틀 수 있었다. 영주를 죽이면 엔디미온은 병사들에게 쫓기겠지만 죽은 다음에 하는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돈 주고 목숨이나 건지는 것이 낫지. 영주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돈이라면 주겠네. 하지만 자네도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물론이지.”

엔디미온이 빙긋 웃었다.

“금화 천 개라고 했지? 이런 말을 하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 현금으로 줄 수는 없네. 무려 금화 천 개야. 그게 얼마나 많은 양인지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걸 이 자리에서 바로 줄 수는 없어. 애초에 그걸 정말 현금으로 다 주더라도 자네가 과연 들고 다닐 수나 있을까?”

물론 엔디미온이라면 금화 천 개의 무게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화를 그만큼이나 들고 다니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에드 은행에 내 이름으로 된 금고가 있어. 며칠 내로 거기에 금화 천 개를 맡겨두겠네. 자네가 원할 때마다 돈을 찾아 쓰면 될 거야.”

“은행? 그게 뭐요?”

“뭐? 은행도 몰라? 그곳에 돈을 맡겨두면 원할 때마다 돈을 찾을 수 있다네. 같은 은행의 지점이라면 어디서든 돈을 찾을 수 있지.”

“백 년 전에는 없었소.”

“백 년 전?”

영주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다가 손가락에 낀 반지 벗어서 엔디미온에게 주었다.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손가락에 끼우자 딱 맞았다. 반지가 금색으로 반짝였다.

“그리에드 은행에 그 반지를 보여주면 돈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잃어버리지 말게. 우리 가문의 문장이 찍힌 반지라서 분실하면 아주 곤란해.”

“알겠소. 깔끔한 거래 고맙소, 자엘라 영주. 다음에 또 봅시다.”

“아니, 다시는 보지 말자고. 얼른 내 방에서 꺼져.”

엔디미온은 웃으며 영주의 방에서 나갔다. 마르딜레아는 영주의 눈치를 보다가 엔디미온의 뒤를 따라갔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으면서 엔디미온이 말했다.

“영주의 분노를 사게 될까 걱정하고 있군, 마르딜레아.”

마르딜레아는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랐다가 고개를 떨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엔디미온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히 이런 일에 휘말려서 자엘라 영주의 분노를 사게 됐다. 이제 그는 사업장을 모두 정리해야 했다. 아니면 영주에게 강제로 정리당하거나.

“······덕분에 난 다른 도시로 떠나야겠군. 사업도 다 정리하고 말이야.”

“안타까운 일이군.”

“너한테는 잘 된 일이고. 금화 천 개 받아서 기쁘겠어? 응? 누구는 여길 떠나야 하는데.”

“나한테 금화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돈 따위 안 받아도 상관없었어.”

갑자기 또 무슨 개소리야. 마르딜레아는 짜증이 나서 입으로 쯧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은 나직이 말했다.

“그런데도 굳이 억지를 부려서 금화 천 개를 받아낸 것은 괘씸했기 때문이야.”

“······괘씸해? 뭐가? 지하투기장 운영하는 게?”

“너는 모르겠지만 백 년 전의 자엘라는 많은 성기사들의 고향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수많은 악마들을 무찔렀지. 그런 곳이 사치와 향락의 도시로 변한 것이 첫 번째로 괘씸했다.”

그럼 두 번째는? 마르딜레아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 번째로 괘씸한 것은 자엘라의 기사수도회다. 도시의 주인은 분명히 영주고 기사수도회의 의무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사악한 것들을 무찌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백 년 전 성기사들의 의지를 잇는 자들이고 도시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복도의 끝에서 멈추어 선 엔디미온은 창문을 통해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웃고 떠들고 있는 성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주와 결탁하여 자엘라가 무분별한 사치와 향락에 젖어들도록 방치했지. 그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물론 저들은 성기사들 중 일부일 뿐이고 대다수의 성기사들은 자신의 의무를 열심히 행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잘못은 결국 전체의 잘못이다.”

엔디미온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 마르딜레아는 엔디미온의 등 뒤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게 진짜라고 믿었다.

“이 세상에는 아직 많은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들은 함께 어려움을 헤쳐가야 할 것이고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 영웅들의 시대는 갔다. 사람이 사람을 지킬 것이고 사람이 악마를 무찌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명교단 내부의 암적인 존재들을 배제해야 한다. 바로 자엘라의 기사수도회 같은 자들 말이다.”

옳은 말이었다. 기사수도회는 백 년 전과 달라졌다. 여전히 성실히 전능자의 뜻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영주와 결탁하여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기사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런 자들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마르딜레아도 동의했지만 과연 누가 그들에게 손을 대겠는가? 누가 감히 가시덩굴 안으로 기꺼이 손을 들이밀겠는가?

“마르딜레아, 상단을 운영한다고 했지.”

“아, 그래, 아니, 네. 맞습니다.”

마르딜레아는 다시 존댓말을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보기에 넌 야망도 있고 사업적 수완도 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나와 인연을 만들려고 했지. 난 능력 있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서 다시 지하투기장과 연결된 통로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르딜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무일 정도 뒤에 뒤르겔에서 토벌대가 꾸려질 거다.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겠지.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식량을 사들여라. 너희 가문의 힘을 빌려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그럼 식량의 가격이 서서히 올라갈 거고 여명교단이 토벌대를 꾸릴 때가 되면 본래보다 가격이 많이 올라있을 거다.”

“아하, 그때 차익을 남겨서 이익을 보라는 거군요.”

“아니, 여명교단에 가능한 싼 가격을 제시해라. 네가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마르딜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건을 한꺼번에 많이 사들이는 것은 나중에 비싼 값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익을 남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식량을 사들이겠는가.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그래야 여명교단에 빚을 하나 지울 수 있으니까. 나는 여명교단 내부를 좀먹고 있는 자들을 청소할 생각이다. 그건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야. 내 뒤를 봐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너한테 맡길 생각이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돈만큼 중요한 게 없거든.”

“서, 설마 성하의 자리를 노리는 겁니까?”

그것은 참으로 불경한 소리였다. 마르딜레아는 자기가 말하고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아니, 내 목적은 여명교단 내부의 청소일 뿐이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어.”

“하지만 여명교단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가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만큼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지하투기장으로 가는 입구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다시 병사들을 만날 것이고 이런 대화를 더 나눌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바다와 같은 두 눈에 따스한 빛을 머금으며 말했다.

“나는 성배기사의 의무를 다하는 자고 성배의 적법한 주인이니 너는 나를 엔디미온이라 부르라.”

마르딜레아는 다리가 붙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엔디미온이 내뿜는 빛은 은은했지만 강렬했고 감히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그는 빛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있어야 했다. 엔디미온은 모퉁이를 돌아서 지하투기장의 입구로 갔고 병사들은 그를 보고서 홀린 듯이 무기를 돌려주었다.

창과 검 두 자루를 받은 엔디미온은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비다르가 여전히 쓰러져 있었고 라이오넬은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돌아온 엔디미온을 보고서 활짝 웃었다.

“와, 돌아오셨군요!”

“그래, 비다르는 아직 안 일어났나?”

“네, 깨우면 영감님이랑 또 싸울 것 같아서 그냥 뒀어요.”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에게 손을 까닥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그녀는 얼른 수통을 건넸고 그걸 받아든 엔디미온이 먼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비다르와 싸우면서 다쳤던 상처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 다음에는 라이오넬에게 먹였으나 비다르에게는 성수를 먹이지 않았다.

그는 바로 성수를 먹이는 대신에 비다르의 몸을 뒤집어서 양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 그리고 작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차해 있는 손목에서 환한 빛이 일어나더니 양손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빛은 마치 끈처럼 변해서 비다르의 손목에서 엔디미온의 손까지 길게 이어졌다.

“오, 그거 마법인가요? 마법도 쓸 줄 아세요?”

“마법이라기보다는 그냥 신성력이지.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일어났을 때 난리치면 곤란하니까.”

베로니카는 동감이었다. 엔디미온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후에 비다르에게 성수를 먹였다. 성수는 엉망이 된 몸을 치유했고 비다르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벌떡 일어난 그는 양손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소리쳤다.

“뭐야, 이거!”

“신뢰의 끈이다.”

저 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베로니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뢰의 끈은 개뿔! 이까짓 거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비다르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빛의 끈을 끊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끈은 끊어지기는커녕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너는 성배의 종이니 결코 신성한 힘에 저항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끊을 수 없다는 소리다.”

“끄아아아아압!”

엔디미온의 말대로 비다르가 아무리 노력해도 빛의 끈을 끊을 수 없었다. 마치 동물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흐뭇하게 웃던 엔디미온이 끈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럼 뒤르겔까지 힘차게 한 번 가보자고, 비다르.”

“닥쳐! 거길 내가 왜 가!”

엔디미온은 무시하고서 줄을 잡아끌었다. 비다르는 도축장에 가는 짐승마냥 질질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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